#89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주언이 퍼뜩 고개를 들자, 주먹으로 벽을 친 여한올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런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라고 너한테 설명해 준 거 아니야.”
주언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주언의 등장에 공들였던 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여한올은 벽을 세게 내리쳤다.
“X발.”
신경질적인 한숨에 주언은 침묵했다. 곧 여한올도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인지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필요 이상으로 얘기를 많이 해버렸다.
“저….”
어떻게 됐든 지금 주언이 여한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여한올도 이제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주언은 자신에게서 쓸모를 찾지 못한다면, 그냥 보내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주언은 조금 진정한 여한올에게 운을 뗐다.
“지금 여기서 풀어주신다면 신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주언이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여한올을 설득하려 애썼다.
“신고?”
주언의 진중한 말투에 그가 고개를 젖히고 파핫, 하는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어이없다는 뜻이 노골적으로 담긴 웃음소리에 주언이 인상을 굳혔다.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금방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그의 웃음이 잦아들 때쯤에는 주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주언의 턱을 잡은 여한올은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쪽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희고 말간 얼굴이었다. 현실 파악을 잘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구석에서 맹한 모습이다. 찰나 맹한 척하나 싶었으나 얼굴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오해한 것 같으니 풀어달라?”
“…네.”
눈치는 빠르지만 지나치게 희망적이라 어이가 없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 어이없네?”
“…네?”
“너한테 유감은 없는데, 그래도 내가 너를 지금 그냥 놔줄 수는 없지.”
“…….”
“여명훤은 이미 네가 사라진 걸 알고 있을 테고, 내가 착각했다고 놓아준다고 한들 여명훤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 아니야?”
“제가…! 제가 잘 말할게요. 착하니까 오해였다고 설명하면 분명….”
여한올이 주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명훤이 자신을 엿 먹이려고 한 건 착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꼬였다. 여명훤은 제 역린을 건드린 자신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착하다고?”
저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듯 되물었다. 착한 여명훤. 이제껏 들은 얘기 중 그와 가장 매칭이 안 되는 말이었다.
우주언이 사라진 후, 명훤에게 그를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어디 떠난 것도 아니고. 죽었는데 왜 아직도 기관에 있는 건데?’
정보를 주는 것보다 그가 AGT에 합류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건넨 권유였을 뿐이다. 무슨 미련이 남아 계속 기관에 남아 있는건지 여한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속을 짐작하기 힘들 만큼 여한올의 시선 속 여명훤은 냉철했고, 전과 다름없이 빈틈을 보이지 않아서 몰랐다. 여명훤의 빈틈없는 모습은 그가 의도한 모습일 뿐 속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닌 공격이었다. 그의 손안에서 반짝, 하고 빛이 튀어 오르는 걸 보는 순간이었다.
콰콰콰콰쾅!
반응하기도 전에 뜨거운 화기가 어깨 너머를 스치고 지나갔다.
쩌저저적.
뒤를 돌아보니 벽 한쪽 면이 완전히 날아가 있었다. 부서진 벽 안 철근 끝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쿨럭.
얼굴로 날아든 재 때문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터전을 잃은 짐승에게 완전히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면 안 된다. 여한올은 제법 큰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그 사실을 학습했다.
‘야.’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읏.’
치지지직-
폭발 한 번에 벽 한쪽 면이 완전히 날아갔다. 능력이 스친 것도 아니고, 옆을 지나가기만 했는데 화끈한 열기에 화상을 입었는지, 피부가 화끈거렸다.
‘닥쳐.’
고저 없는 목소리에 짙은 살기가 배어 나왔다. 깊게 가라앉은 시선이 무겁게 자신을 압박하자, 위압감에 숨이 막혀왔다. 고작 한마디에 사람 하나 죽일 뻔한 새끼였다.
차분한 분노를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한올은 괜히 매끈한 볼을 쓸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넋 놓고 도움만 바라는 머저리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이쪽도 이쪽 사정이 있다.
“어떻게 해도 여명훤은 다시 이쪽에 안 붙을 것 같거든.”
우주언이 사라진 이후 겨우 여명훤과 이어져 왔던 연결고리였다. 우주언이 돌아온 이후에 이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
‘절대 아니겠지.’
여명훤이 스스로 기관에 목줄을 끌고 들어갔던 것도 우주언 옆에서, 우주언이 바라는 평범하고 무탈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그가 돌아온 이상 여명훤은 위험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끊을 것이고, 정리해야 하는 가장 우선순위에 AGT가 있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착각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여명훤을 보면서 축적된 정보에 기반된 추측이었다. 추측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뻔한 미래였다.
“지금 놔주면 다음에는 접촉하기 더 어려울 거 같기도 하고.”
산뜻한 여한올의 말투는 언뜻 이 상황을 가볍게 보이게끔 했으나 주언은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읽어냈다. 저 말의 끝이 부디 최악이 아니길 바랐지만.
“여명훤은 너를 얼마나 사랑할까.”
“무슨…!”
“너를 위해서 여명훤은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을지 궁금하네.”
주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도 선명한 불행에 주언이 인상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낮은 조도의 조명이 주언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림자 속에 빠져 죽고 싶었다. 자신의 존재가 여명훤에게 그저 걸림돌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
언제나 그렇듯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대부분의 예외를 누릴 수 있는 건 특권층이기 마련이다.
“연락은?”
모든 기자는 인터넷과 휴대폰 사용을 제한받았으나 회의 참석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에 연락조차 못 하는 상태로 이 안에 몇 시간 갇혀 있어야 했다면, 여명훤은 진작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서윤진은 여명훤이 감정적이 아닌 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뒷말을 이어나갔다.
“연락 온 건 아직 없지만, 그쪽에 심어둔 사람이 이변을 눈치 못 챘을 리 없고 아직 못 구했어도 문제는 없을 거예요.”
“…….”
인질은 살아있을 때 유의미한 법이니까. 그러니까 분명 이쪽에 연락을 취해 올 때까지 우주언의 신상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다행히 그녀의 설득이 먹힌 듯했다.
톡톡.
기다랗고 유려한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책상 위를 두들겼다. 막연히 괜찮을 거라는 어쭙잖은 말보다 현실적으로 말해주는 게 나았다.
“큼.”
전이라면 주변에서 눈치를 줬을 테지만, 이 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L 호텔 던전 사건에 휘말렸던 사람들이었다.
던전이 생성되자마자 정신을 잃어 그때의 상황은 모르지만, 이후 언론에서 던전이 S등급이라는 것을 보도하면서, 피해 없이 S급 던전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다들 감사해했다. 그들 대부분 여명훤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법이 제정된 후 태동하는 권력 속 중심에 있을 여명훤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그 사이에 L 기업 회장과 그 뒤에 수행원으로 따라온 이호윤도 있었다.
“큼.”
여지웅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헛기침을 내뱉자, 주변의 시선이 흩어졌다.
“대한민국에서는 능력자를 아직 공무원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능력의 발현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발현되는 것이 아니므로 국가에 강제 귀속시키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하지만 던전의 위험성을 따지면 국가에 이바지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능력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겁니다.”
짜인 판이라는 낌새는 전혀 없이 두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식지 않은 토론의 열기를 무감하게 바라보는 것도 잠시, 회의가 길어져 잠시 휴식을 위해 회의를 중단했을 때였다. 서윤진이 명훤의 어깨를 두드린 후, 턱짓으로 회의실 안에 있는 개인 휴게실 쪽을 가리켰다.
탁, 문이 닫히고 둘만 남자 명훤은 태연한 척 굴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합니까.”
서윤진이 이 말을 전달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선택해야 하는 건 윤진이 아닌 명훤이었다.
“…데리고 간 건 AGT 쪽이 맞나봐요.”
서윤진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건은 뭐라고 말합니까.”
여명훤은 한때 자신의 형이었던 여한올을 떠올렸다. 모든 건 자신 탓이었다. 더 조심해야 했는데, 꼬리가 밟혔고 여한올은 우주언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한올은 눈치가 빠르니 주언이 돌아온 후 일어난 자신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을 것이다. 여한올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조건은 총회가 끝나기 전까지 여기에서 능력을 쓰는 것.”
“하.”
명훤의 능력은 폭발이었다. 그 능력을 내부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쓰라는 건 한 가지 뜻밖에 없었다.
“하지 않을 거죠? 여기 안에 있는 사람들 다 죽이라는 뜻이잖아요!”
“…….”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요.”
국제적인 테러범이 되라는 뜻이다. 서윤진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으나 명훤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또다시 주언을 잃을 수는 없었다. 여명훤은 여한올이 끝에 내몰려 있다는 걸 눈치챘고, 여한올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