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90화 (90/112)

#90

“멍청하긴.”

여명훤이 낮게 혀를 찼다.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밀어붙일 줄은 몰랐다. 한 치 앞만 본 생각이었다. 만약 요구를 따르면 명훤은 국제 범죄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범죄자가 됐다고 한들 주언을 두고 협박한 AGT에 가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놀아나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수락할 건 아니죠? 구출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희망적이고 희박한 가능성에만 맡길 수는 없습니다.”

명훤은 잠시 서윤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녀 또한 불안한지 쉴 새 없이 팔짱을 끼고, 머리카락 넘기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다려져 있던 베이지색 정장 재킷 팔 부분에 어느새 선명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명훤을 바라보며 섣부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주언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는 확률이 낮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서윤진이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아까보다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능력을 못 쓴다고…. 서약했다고 하면요? 그러면 되잖아요.”

총회 회의실 안에 들어올 때 능력자는 의례적으로 서약 아이템으로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명훤도 예외 없이 밟아야 하는 절차였다. 중요 인사들이 모인 곳에서 최소한의 안전핀 같은 절차였다.

“그런 걸로 저를 억제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문제는 상대도 같은 능력자이고, 여명훤의 능력을 가장 잘 아는 여한올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늘 입장 전 썼던 아이템은 분명 A급이었다. 능력자들은 대부분 그 아이템이 가진 강제력에 영향을 받을 것이기에, 안에 입장한 모든 사람은 아이템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A급 이상 아이템이 없어 S급 능력자에겐 무용지물과 다름없었다.

“하… 그걸 안다고요? 미치겠네.”

여명훤에게는 통하지 않는 강제력이었다. 그에게 완전히 유효한 강제력을 행사하고 싶으면 등급이 높은 아이템을 써야 했다.

“…혹시 모르는 거 아닌가요? 모를 확률도…!”

“이미 그 아이템 저에게 쓴 적 있습니다.”

“네?”

서윤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명훤은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짧게 설명했다.

“그때는 말장난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럼 괜히 거짓말해서 자극해봤자 안 좋은 꼴만 보겠네요.”

맹세할 때 말장난했다는 사실을 여한올도 이제는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설픈 변명은 도리어 그의 화를 더 돋우기만 할 게 뻔했다. 이미 말장난으로 한 번 넘어간 적이 있기에 더더욱.

“나 명훤 씨 이런 제안 수락하는 꼴 보려고 명훤 씨 따르겠다고 한 거 아니에요.”

“…….”

“심어둔 사람한테도 연락 왔어요. 기회 봐서 빼돌리겠다고.”

서윤진이 고민하는 듯한 여명훤의 팔을 붙들고 다급하게 말했다. 여명훤은 잠시 침묵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그 책임감의 무게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칼에 거절해서 주언이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습니다.”

“명훤 씨!”

서윤진의 경악 섞인 말에 명훤이 고개를 저었다. 여지를 주는 말에 서윤진이 크게 동요했으나 곧 그녀의 시선이 명훤의 손에 멈췄다. 손바닥 안에 손톱자국이 짙게 새겨질 정도로 명훤은 주먹 쥐며 참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참고 있는 건 여명훤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만 선택하지 않도록 살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단상에 나설 때, 그때 한다고 하세요.”

지금 여기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시간을 버는 방법밖에 없었다.

또다시 제자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를 차라리 곁에 둘 걸 그랬다. 더 나은 사람이 됐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에게 구차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같잖은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서. 네가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인데.

땅이 푹 꺼지고, 늪 속에 처박힌 기분이 들었다.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두근.

몇 년 만에 주언에게 가이딩을 받은 후부터 마력을 절제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걸 파괴시키고 싶어 하는 흉포한 기운이 이를 드러내며 우주언을 요구했다. 주언을 저만 볼 수 있도록 가두고 싶었다. 그러곤 연약한 목덜미에 제 이를 박아 넣고, 제 기운을 진정시켜 줄 주언의 체취에 흠뻑 젖어 있고 싶었다.

명훤의 턱이 도드라졌다. 밀도 높은 공기가 사납게 일렁거렸다. 마력 한 줌 없는 일반인마저 한 번씩 여명훤 쪽을 바라볼 정도로 기운이 쉬이 갈무리되지 않았다.

그녀가 불안한 시선으로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폭탄 같은 여명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후….”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서윤진은 잠시 움츠러든 등을 꼿꼿하게 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들 점잖은 척하고 있지만, 이곳만큼 숨 막히는 곳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한 폭탄에게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사이에 어떻게든 우주언을 구출해야 했다. 여명훤이 직접 움직이는 순간 일이 어그러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으니까.

서윤진의 얼굴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길드 합법화는 당장이 아니라 10년 뒤 미래를 생각한 상생안입니다. 의무만 쥐여주고, 권리는 박탈하는 게 지속되면 붕괴만 야기시키는 꼴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국민의 안전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아주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위험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권리를 주면 되는 겁니다.”

점점 여론이 예상했던 쪽으로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다. 각자 때때로 언성을 높이는 모습이 한 편의 잘 짜인 연극처럼 보였다.

띠띠띠-

윤진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기다렸던 수신음이 울렸다. 그녀는 연락을 받기 전 마른침을 삼켰다. 여명훤은 온 촉각을 서윤진 쪽으로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면 통화 내용을 다 듣고도 남을 것이다.

하물며 옆에 있는 여지웅마저도 뒤쪽을 한 번 흘겼다.

제발 희망적인 소식이길 바라는 간절한 얼굴로 서윤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놓쳤어요.

헐떡거리는 숨과 함께 들린 소식에 서윤진이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전화 너머로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여명훤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왜.”

여지웅은 여명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운을 뗐다. 멀리서 보면 그저 지금 이 회의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애가 없어졌다는 소식이라도 들었나 보지?”

여지웅의 말끝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나왔다. 여명훤과 서윤진이 동시에 여지웅을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말투에 담긴 노골적인 뉘앙스는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그 대상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무슨….”

여명훤이 당황한 얼굴로 되묻자 여지웅의 시선이 그제야 명훤에게 닿았다.

“내가 아직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알고 계신 줄은 몰랐지만, 데려간 건 다른 쪽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강윤재가 안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 아닙니까.”

“…쯧. 그렇게 쉽게 단정 짓는 것만큼 한심한 건 없어.”

“…….”

“하지만 반은 맞다고 해두지.”

지금 강윤재가 보이지 않는 이유도 읽혔다. 언제부터 알았는지 몰라도 여지웅은 우주언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강윤재도 같이 발각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간 강윤재가 쌓아온 입지가 있고, 오늘 일에 잡음이 있어선 안 되기에 강윤재의 처분을 미뤘을 뿐, 그도 곧 꺼질 촛불이었다.

여지웅의 의미심장한 말투에 명훤의 목울대가 잘게 떨렸다. AGT가 데려갔다는 걸 안다고 말했음에도 변하지 않는 태도는 다른 가능성을 불러일으켰다.

“주언이 가로채신 겁니까.”

“놀라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구나.”

시시하다는 듯 여지웅이 앞에 놓인 펜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으레 나이를 먹으면 눈빛에 이제껏 살아온 삶의 편린이 깃들기 마련이다. 여명훤은 눈꺼풀 뒤에 감정 한 톨 없는 여지웅의 인간 같지 않은 비정함을 알았다.

“여한올 아래 당신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자식조차도 인간이 아닌 부품으로 취급했으니까.

“그러냐.”

“그쪽의 아랫사람들이 여한올을 부추겨 자행한 일들도, 당신이 벌이고 AGT에 뒤집어씌웠던 일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정작 그 애는 여전히 눈치 못 채고 테러 놀이한다고 날뛰고 있지. 이용하기 쉬워서 편하긴 하다만.”

여지웅은 명훤의 말에 놀라는 대신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지었다. 명훤이 알고 있는 치명적인 일들이 밖으로 새어 나가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미소였다.

여지웅이 그리는 청사진에는 무수한 부품이 있다. AGT는 여한올이 단독으로 만든 테러리스트 조직이 아니었다. 여한올은 모든 걸 스스로 일구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AGT는 만들어진 악이었다. 공통된 적이 있어야 남은 사람들은 더욱 뭉치는 법이다. 여지웅은 AGT의 리더인 여한올까지 속였다. AGT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고 필요할 때 의도적으로 테러를 일으켜서 사회에 필요한 공통된 적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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