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모든 걸 일궈냈고, 자신이 일원을 모두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여한올에게 명훤답지 않게 충고까지 해줬건만.
미간을 찌푸린 여명훤을 바라본 여지웅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목줄에 묶인 개만이 나를 물지 않을 거라고 믿어.”
여지웅이 한 말은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그는 평생 목줄에 묶여 주인이 허락하는 범위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개새끼는 소모품으로 여길 뿐이다. 여지웅은 약점을 쥐고 사나운 개를 억지로 굴복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뭘 원하는 겁니까.”
고로 여지웅은 단 한 번도 여명훤을 믿은 적 없다.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여명훤이 여지웅을 몇 년 따랐다고 한들 여지웅은 늘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네가 내 밑에 들어왔을 때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싶었을 때도 있었지.”
핏줄이 당긴다는 말조차도 여지웅에게 통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우주언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속았다는 분노보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가장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우주언의 등장은 꼭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L 기업과 인연을 맺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거기에 목맬 만큼 가치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여한올이 네게 시킨 일 범위를 조금 줄이자는 것뿐이야.”
“…….”
긴밀하게 인연을 맺어 아군으로 만들 수 없다면 방해만 될 뿐인 존재들이다. 여지웅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여명훤도 아까운 패지만, 가지지 못할 거라면 남도 가져서는 안 된다.
여지웅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미 여한올과 무슨 대화까지 나눴는지 파악했고, 벗어날 틈은 봉쇄했다.
“손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주인을 배신한 개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다시 묶을 수 있다 하더라도, 더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마지막까지 쓸모를 다 해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 이제껏 거둬준 은혜를 갚아야 할 차례다.
“특정 인물을 죽이라는 소리군요.”
경멸 어린 여명훤의 말에 여지웅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훤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여한올이 제안한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은 거래 조건임에도, 여지웅 쪽이 한층 더 악의적이었다. 그의 악의에서는 악취가 났다.
“그래. 그러면 돌려주지.”
여지웅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죽이는 순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텐데, 그 당연한 일이 마치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예.”
명훤의 대답에 서윤진이 움찔했으나 여명훤이 한쪽 손을 들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걸 여지웅도, 여명훤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이변이 일어난 건, 초조함에 마음이 다 타들어 갈 때쯤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방 안에 들어왔다. 방음이 잘되는 문인지 상대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여한올이 민첩하게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곤 휙 소리가 날 정도로 재빠르게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야.”
“왜 들어왔어?”
“내가 대신 있을까 싶어서. 너 피곤해 보인다고 얘기 들어서.”
여한올의 날카로운 말투에도 상대가 부드럽게 말하며 문을 닫고 들어왔다.
‘밖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 거지?’
주언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일단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밖의 구조도 알지 못하고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도 모르니, 여기서 벗어난 후부터가 더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예민한 거 보니까 진짜 피곤한가 보네. 가서 좀 자.”
상대는 허물없이 여한올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여한올은 곧 대답을 할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다가 곧 멈칫했다.
“…아니.”
여한올은 손을 휘저으며 다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너답지 않게 왜 사양을 하고 그래?”
“그냥…. 어차피 지금 신경 쓰여서 잠도 제대로 안 올 거라서.”
여명훤의 한마디에 흔들릴 만큼 AGT의 멤버들을 믿지 않는 건 아니다. 심지어 지금 들어온 사람은 AGT 내에서 제일 오래 있었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다만 여명훤이 말로 사람을 교란시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두 가지 사실이 서로 반대를 가리키고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뭘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건지 조금 더 캐물어 볼 걸 그랬다. 여한올은 뒤늦은 후회에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어 피곤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원래 오늘 밖에 나가는 건 너 아니었어?”
“어. 그런데 볼일이 있어서.”
태연한 말에 여한올이 기지개를 쭉 켜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우주언을 바라보았다. 왜 저런 표정을 짓지. 뺨을 쳐도 미간만 조금 찡그릴 뿐, 크게 동요하지 않던 우주언의 눈이 크게 뜨인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퍼억-!
“윽! 무… 슨….”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 짙은 통증이 파고들었다. 여한올이 뒤돌아볼 새도 없이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쿵.
머리가 욱신거렸다. 뜨거운 액체가 콧속에서 주륵 흐르는 게 느껴지고, 곧 짙은 혈향이 코끝을 찔렀다. 기습인가? 기습이라면 상당한 실력자일 터였다. 바로 뒤에서 자신도, 제 동료도 반응하기 전에 공격했다면 그만큼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 아닌가.
찰나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여명훤이 직접 온 건가. 우주언이 관련되면 항상 예상한 범위를 벗어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혈혈단신으로 AGT의 본부 가장 깊숙이 있는 이곳까지 찾아온단 말인가.
“어떤 새끼가… 읏…!”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틀어 뒤로 돌아 동료를 바라봤다. 타격음은 이쪽에만 들렸으니, 내가 불청객의 바짓자락이라도 붙잡고 있는 동안 너라도 도망가라고 말하려고 했다.
“한 번에 쓰러트리려고 했는데, 안 되네.”
“…어?”
아, 이래서 우주언이 놀란 표정을 지었구나.
자신을 때린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괴한이라기보다, 처음부터 뒤에 있었던 멤버라고 생각하는 편이 당연했는데. 끝까지 믿음을 놓지 못했던 아둔함의 말로였다.
“정말 조금도 눈치 못 챈 얼굴이라 조금 미안한데?”
“흐윽….”
후두둑.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피가 차가운 회색 바닥 위를 적셨다. 여한올은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여 샐쭉 웃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온통 붉었다.
“그러니까 진작 내가 봐준다고 했을 때 나갔으면 좀 좋아? 그럼 배신감 느낄 일도 없잖아.”
익숙한 목소리가 빈정거리며 여한올을 비난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대신 우주언을 봐주겠다며 다정하게 말하던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인데, 지금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왜… 어떻게… 언제…부터… 누구….”
어떻게, 왜 자신을 배신 한 걸까. 언제부터 자신을 기만한 걸까. 누구를 위해서 우리의 이념을 꺾고 그 밑에 들어가 이중 첩자 노릇을 하게 된 걸까.
무수한 질문이 여한올의 앞을 스쳤다. AGT 인원이 늘며 첩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여명훤이 한 말이 가슴에 불편하게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초기 때부터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제 곁을 든든히 지켜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산이었다. 여명훤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여명훤이 알게 됐을 정도면 얼마 전에 배신한 건 아니라는 소리지 않나.
“울어?”
상대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가가 뜨겁다 싶더니 눈물이 흐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여한올이 가까이 온 상대를 밀어내기 위해 팔을 휘저었으나, 상대는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 그의 손등을 자비 없이 짓밟았다.
뚜둑.
“아악!”
도망치라고 말하려던 스스로가 멍청해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세상이 빙글, 하고 도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정신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일련의 사건을 바로 앞에서 목도한 우주언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여한올이 흘린 진득한 피가 주언의 발 언저리에 닿았다.
주언은 괜히 숨을 죽이며 여한올 쪽에 온 감각을 집중했다. 희미한 호흡 소리를 들은 후에야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그러게 왜 오늘따라 혼자 감시한다고 해서는.”
남자는 제 얼굴에 아주 찰나 스쳤던 연민을 익숙하게 갈무리했다.
“너만 아니었으면 조금 더 여기서 테러 놀이할 수 있었을 텐데.”
남자는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주언을 원망하고 있었다. 주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계속 기만하는 건 그쪽이었으면서, 절 원망하지 마세요.”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기만한 사실은 변하지 않고, 언젠간 그 기만은 들켰을 일이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으니까. 그러니 그 원망이 자신을 향하는 것은 응당하지 못했다.
자신을 납치해온 사람이고, 이용할 사람이니 싫어해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눈앞에서 배신당한 사람을 꼴 좋다고 비웃을 수도 없었다.
“사납네.”
그가 몸을 빙글 돌며 웃었으나, 그 웃음에 내포된 분노가 느껴졌다.
퍽.
아니나 다를까 단단한 주먹이 부지불식간에 주언의 뺨을 강타했다.
“읏.”
아까는 여한올이 나름 조절했던 거였구나 싶을 정도로 매서운 아픔과 동시에 입 안에 비릿한 향이 감돌았다. 입 안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주언이 틀어진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고 눈앞에 사람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