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상대는 그런 주언을 보고 작게 심호흡을 내쉰 후, 문을 열었다.
“들어와.”
남자의 명령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배신자가 한두 명이 아니구나 싶었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한올을 들어 올려 밧줄로 꽁꽁 동여매기 시작했다.
“왜 이 사람은 기절 안 시켰어요?”
“비명도 안 지르고 가만히 있길래. 꼭 기절시켜놓으라는 말도 없었고.”
남자가 주언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구해달라고 소리쳐봤자 쓸데없이 체력만 낭비하는 꼴이다.
“봐봐. 안 지르잖아.”
남자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부어오른 뺨을 툭툭 두들겼다.
“차라리 들켜서 다행인가. 이런 집단에 진심인 척하는 것도 골치였잖아.”
“돌아가면 의원님이 자리 하나 내주신다고 했었지?”
“어.”
상상만 해도 좋은지, 그들은 화난 기색을 순식간에 지우고 방 안이 울릴 정도로 크게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후우….”
주언의 숨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무력한 자신은 여명훤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 인도되어 약점으로 또다시 쓰일 것이므로.
**
총회 시작은 낮이었으나, 회의가 끝날 때쯤에는 해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세부 법안은 따로 조율해야겠지만, 앞으로의 방향성은 정해진 것 같군요.”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두가 각자 다른 의미로 이 회의의 끝을 바라고 있었다.
회의를 갈무리하는 멘트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바로 앞에서 직관하던 기자들만이 흘끗거리며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명은 엉덩이를 이미 반쯤 들고 있는 채였다. 기사를 제일 먼저 내는 건 저 문을 가장 먼저 통과한 사람이다. 이 이후에 따로 공식적으로 오늘 나온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을 테지만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 신문사에 연락을 하는 게 먼저였다.
‘오늘 여명훤도 온다 그래서 있을 줄 알았더니….’
기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느긋하게 있는 곽성관이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주언에게 옷을 강탈당했을 때 소지품 몇 개가 뒤섞였다. 다른 건 자질구레한 거라 무시하려고 했으나, 주머니 속에 챙겨온 알약은 달랐다.
수상한 냄새가 났다. 라벨도 붙여지지 않은, 가이드가 들고 다니는 알약. 아주 혹시 몰라 알약 하나만 빼내어 성분 검사를 맡겼으나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나 몰래 뺀 거 들키진 않겠지.’
곽성관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알약 통을 굴렸다. 성분은 나중에 알면 되는 일이고, 일단 중요한 약 같으니 돌려줘야겠다 싶었다. 다른 속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여명훤이 불러서 오긴 했으나 따로 얘기할 시간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우주언이 없는 걸 빌미 삼아 여명훤에게 대신 약통을 건네주며 인터뷰 한 줄이라도 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셈도 있었다.
“큼.”
곽성관은 밖으로 빨리 나가려는 기자들을 보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영문을 모르는 주변 기자들은 저렇게 여유 부리다가 낙오될 곽성관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공식적인 발표는 특별히 이번 법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여명훤 능력자가 할 예정입니다. 발표 장소는 내정되어 있던 홀에서 야외 홀로 변경되었으니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문을 보던 기자들을 포함해 모든 시선이 여명훤 쪽으로 쏠리자, 여명훤이 이에 대응하듯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명훤 씨.”
뒤에서 서윤진이 초조한 목소리로 명훤을 불렀으나, 명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대한민국의 특수능력 관련 법안은 오늘부로 특수능력 국제법과 동일시하게 개정되었음이 선언되었다. 실제로 법이 제대로 적용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국제 사회에 발맞춰 간다는 건 굉장한 변화였다.
모두가 법이 개정된 것에 들떠 있는 가운데, 여명훤만이 별일 아니라는 듯 조금의 미동도 없이 표정을 완벽하게 갈무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바라도 시간은 흐르고, 곧 여명훤이 테러를 자행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자를 제외한, 테이블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뜬 건 여지웅이었다. 뱀 같은 시선이 명훤을 훑고 지나갔다.
“한동안 특수능력기관도 많이 바쁘시겠습니다.”
여지웅이 지나가던 와중, 아직 자리에 앉아 있던 한 명이 여지웅을 멈춰 세웠다.
“예.”
“앞으로 일이 많으실 테니 그리 급히 가시는 걸 이해해드려야죠.”
“잠시 중간에 업무만 보고 다시 우리 명훤이가 연설하는 모습을 보려 합니다.”
여기서 바로 간다고 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무시하려던 여지웅은 일부러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강조했다. 여지웅이 하는 말에 숨겨진 계산을 읽지 못한 상대가 묘한 얼굴로 여지웅을 바라보았다. 인간적인 대화에 사뭇 놀라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한숨도 쉴 틈이 없군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미래를 위해서니 바쁘게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여지웅은 반박 대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볍게 묵례했다.
평소와 다른 여지웅의 태도에 상대가 당황해하며 마주 고개를 숙여왔다. 평소라면 웃는 낯으로 속을 긁어 놨을 텐데. 항상 먼저 시비를 걸지만, 결론은 항상 자신이 속 타는 것으로 끝나던 상황이 쉽게 종식되자 뒷맛이 찝찝한지 표정이 석연치 않아 보였다.
여지웅에게 시비를 건 사람은 다른 정당의 인물로서, 사사건건 여지웅과 대립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정치하는 사람답지 않게 직설적이며, 드물게 개인의 손익을 따지지 않는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예. 그럼 살펴 가세요.”
그리고 여명훤이 테러를 가장해 죽여야 하는 여지웅의 눈엣가시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여지웅을 필두로 테이블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제 수행원을 데리고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주변에서 명훤을 지나칠 때마다 축하 인사를 건네며 호의를 표했다. 그 인사를 받는 사람 중 이호윤도 있었다. 다음 부흥하는 세대에 미리 눈도장을 벌써부터 찍는 발 빠른 사람들의 행동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태도는 단맛보다는 혀끝이 아릴 정도로 쓴맛이 났다.
쟁취해낸 것이 아닌 쥐여진 권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훤 씨.”
서윤진이 낮아진 목소리로 굳은 듯 서 있는 명훤을 불렀다.
“예.”
굳이 다른 대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명훤은 한번 마음을 굳히면 말린다고 듣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서윤진도 여명훤의 행동을 제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서윤진은 반 발자국 뒤에 서서 여명훤을 바라보았다. 곧 이곳은 완전히 뒤집힐 것이다.
저 인간의 범위를 아득히 벗어난 자비 없는, 신의 현신 같은 존재에게.
**
총회가 끝난 후 연설은 원래 같은 건물 내, 가장 큰 홀에서 할 예정이었으나 호텔에서 생긴 던전 사건으로 인하여 불안한 일반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야외로 장소를 바꾸었다. 일종의 이벤트였다. 호텔 사건이 있었던 만큼 정부가 발 빠르게 현세대에 맞춰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일반인들도 연설 장소에 올 수 있어 단상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여명훤은 천천히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여명훤을 보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온 사람들인 만큼 다들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여명훤이 고개를 숙여 낮게 자리 잡은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여명훤입니다.”
하지만 여명훤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여명훤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콰아앙-!
거대한 굉음이 순식간에 공기를 찢어발겼다. 거대한 폭탄 소리에 세상이 흔들린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평화로운 일상을 지옥도로 변하게 만드는 신호탄이었다.
“으아아악!”
절망에 가득 찬 비명 소리조차 묻힐 정도로 거대한 굉음이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
“네. 저희 쪽에서 잡았습니다.”
거만했던 태도는 어디 갔는지 전화 너머 상대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과도하게 굽실거리는 남자를 보고 주언은 혀를 내둘렀다. 의원이라는 사람이 명훤의 아버지인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주언도 기억을 되찾고 마냥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주언은 사진 속 여명훤과 같이 찍혀 있었던 여지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왜 그렇게 다들 명훤이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건데.’
주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래서 그만큼 속이 쓰리기도 했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데, 몇 년 전에는 훨씬 더 무지했었고 어쩌면 그 무지가 명훤을 할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 네. 그럼 30분 후에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넵.”
전화를 마친 남자가 흘끗 여전히 한올을 돌돌 묶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더럽게 까다롭네.”
“뭐래?”
“30분마다 한 번씩 보고하래.”
“30분마다? 귀찮네.”
“전화 받는 새끼, 지도 같은 말단이면서, 더럽게 고고하게 구네. 내가 다시 의원님 밑으로 돌아가면 직급 훨씬 높을 텐데.”
“그때까지 일 똑바로 해야겠다.”
“너도, 나도 여기서 실수하면 이도 저도 안 되는 거 알지?”
“응.”
“잘 지키고 있어.”
“응. 한올이는 어떻게 할 거야?”
“죽여야지.”
여한올의 곁에 오래 있었지만 일말의 동정조차 하지 않는 냉랭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