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
“당장은 말고. 일단 쓸모 있을 수도 있잖아.”
“…알겠어.”
“잘 감시해라.”
“어.”
두 번째로 들어온 사람에게 몇 번이나 당부한 남자가 나가기 위해 문 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퍼억-!
“…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주언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눈앞에 일어난 일은 그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두 번째로 들어와 여한올의 몸을 칭칭 동여매던 남자가 쏜살같이 문 앞에 있는 남자의 뒤에 다가가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지가 배신하니까 아주 경계를 늦추지를 않네.”
상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한 방에 기절했는지 바닥에 쓰러져 축 늘어졌다. 남자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일으켜 남은 의자에 앉히고 가져온 줄로 몸을 둘둘 말았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주언은 눈을 끔벅이며 이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축 늘어진 몸을 옮기는 게 제법 힘에 부쳤는지 남자가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자 두둑 소리가 났다. 상대가 얼빠져 있는 우주언을 흘끗 보다가 주머니에 있던 칼을 꺼내 묶여있던 주언을 풀어주었다.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자유로워진 주언은 바로 움직이는 대신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나 기억 안 나나 보네. 저는 예전에 그 백화점에서 봤었는데. 한올이랑 같이 있던 이초원이에요.”
이 상황에 태연하게 통성명을 하는 이초원을 보며 얼떨결에 손을 건넨 주언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방금 기절시킨 사람이랑… 같은… 그… 아니었어요?”
“맞아요. 그런데….”
“야!”
설명 도중 날카로운 소리에 주언과 초원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쪽을 향했다. 두 사람이 통성명을 하는 사이에 여한올이 깨어났는지 살벌한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일어났네.”
“이초원!”
살벌한 목소리에 이초원이 여유롭던 태도를 버리고 의아한 얼굴로 여한올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까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분노가 일렁이는 시선에 그제야 이초원이 뒤에 널브러진 남자와 여한올을 번갈아 보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변명했다.
“내가 네 뒤통수친 거 아니야. 쟤가 너 쳤거든?”
“쟤는 그럼 왜 저러는데.”
“내가 쟤 뒤통수쳐서.”
“너는 왜 쟤 뒤통수 쳤는데. 너도 오늘 밖에 일 있다고 했잖아.”
“같은 편인 척했는데 같은 편 아니라서.”
여한올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난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주언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밖으로 뛰쳐나갈까? 흘끗 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뺨을 후려친 남자는 밖에 사람이 더 있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러면 일단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자신을 풀어줬다는 것은 일단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여한올은 기절한 남자를 잠시 보더니 진정된 목소리로 돌돌 묶여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뒤에 얘기는 일단 이거 풀고 얘기해.”
여한올은 이초원이 자신의 뒤통수를 친 배신자가 아니란 걸 확인하고 안심이 되었는지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한올이 원하는 반응과 다르게, 이초원은 고개를 저으며 여한올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다가와 풀어주지는 못할망정 멀어지는 이초원의 행동에 여한올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싫어.”
“뭐 이 새끼야?”
“싫다고.”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나도 아니야. 네가 나중에 더 화낼까 봐 내 입으로 미리 얘기하는데 나도 네 동향 보고하는 사람 있어.”
이초원이 느긋한 목소리로 자신이 배신자라고 말했다. 여한올은 일상 대화라도 하듯 평이한 이초원의 어조에 말문이 막혔다. 그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한참 곱씹은 후에야 이초원의 말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어차피 알게 될 걸 미리 말하니까 참으로 다행이지 않냐는 이초원의 태도에 여한올이 벙쪘다.
“…뭐?”
옆에서 지켜보는 제삼자인 주언도 얼빠진 얼굴로 이초원을 바라보았다. 배신했다는 말을 잘도 돌려 말한다 싶었다.
“너는 AGT 너 혼자 다 일군 것 같지?”
이초원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하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여한올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몸이 파들파들 떨리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여한올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알아먹게 얘기해. 무슨 개소리야.”
“네가 아무것도 없이 나왔는데, 사람들이 뭘 믿고 너한테 붙었을까. 네 능력 등급이 높아서?”
“…….”
“여명훤이 너한테 경고하지 않았어? 주변 사람 너무 믿지 말라고.”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지금 그럼 네가 하는 말은 처음부터 나만 보고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소리야?”
“그건 아니고. 네가 제일 믿는 사람들이 다 온전한 네 편이 아니라는 소리지.”
지지직.
애매하게 말을 마친 이초원은 품 안에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만 한 작은 기기를 꺼냈다. 몇 번 기기를 만지자 곧 지직, 소리와 함께 기기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강윤재가 안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 아닙니까.
-쯧. 그렇게 쉽게 단정 짓는 것만큼 한심한 건 없어. 하지만 반은 맞다고 해두지.
-주언이 가로채신 겁니까.
-놀라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구나.
주언은 두 사람 중 명훤의 목소리만 알아들었지만, 여한올은 두 목소리 다 익숙한지 눈을 크게 떴다.
-여한올 아래 당신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여명훤의 담담한 목소리와 다르게 대화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충격에 목이 막혔는지 여한올은 공기가 새어 나오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지웅이랑 여명훤?”
“맞아.”
대화 내용까지 들려주는데 대화 상대를 속일 수는 없어서 그런지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이거 진짜야?”
“녹음된 거 아니고 지금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내용이야.”
두 사람의 또렷한 목소리가 멈추자 희미하게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는 대화가 들렸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쪽의 아랫사람들이 여한올을 부추겨 자행한 일들도, 당신이 벌이고 AGT에 뒤집어씌웠던 일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정작 그 애는 여전히 눈치 못 채고 테러 놀이한다고 날뛰고 있지. 이용하기 쉬워서 편하긴 하다만.
“뭐…?”
여한올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자신이 하는 일이 소꿉놀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것도 모자라 대부분 스스로 했다고 믿었던 일들이 자신도 모르게 여지웅의 손에 휘둘려서 벌인 거라니. 표정에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지금 그가 얼마나 비참한 심정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태를 지켜보던 주언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타깝다고 해도 그는 자신을 납치했고, 여기서 한가롭게 그를 동정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음으로 인해서 명훤은 또다시 상처 입었을 테니까. 자신의 존재가 명훤의 상처가 됐다는 사실이 치가 떨릴 만큼 싫었다.
‘내가 납치됐다는 것보다도 더.’
여기 있는 모두 AGT의 오래된 일원이지만 쓰러져 있는 남자는 여지웅 밑에 있던 첩자였고, 그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이초원은 삼중 첩자 노릇을 하며 여명훤의 밑에 있는 사람인 건가.
“…이 얘기를 왜 하는데?”
“우주언 내가 데리고 가야 되는데. 말없이 갔다가 애들이 너 풀어주면 너 또 속을까 봐.”
배신자라고 했으면서 다정한 걱정을 입에 담는 이초원의 태도를 참을 수 없는지 여한올의 목에 핏대가 섰다. 하지만 곧 여기서 화를 낼 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격앙된 목소리가 거둬졌다.
“일단 풀어줘.”
“나 안 때릴 거야?”
“지금 너 때릴 시간 없어. 그나마 네가 제일 나으니까.”
이초원은 잠시 가늠하듯 여한올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칭칭 동여맸던 줄을 풀어주었다.
“뭐 이렇게 꽉 묶어 놨어?”
여한올이 손목을 문지르며 중얼거리자 이초원이 허둥지둥 여한올의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미안. 많이 아파?”
퍽!
“아!”
그리고 그가 고개를 내린 순간 여한올은 주먹으로 이초원의 코를 강타했다. 이초원이 코를 움켜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신자 새끼면서 누가 누구를 걱정해?”
“여한올!”
“너는 너 볼일 봐. 방해 안 할 테니까.”
여한올이 존재감 없이 기절해 있는 남자 쪽을 바라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저 새끼한테 볼 일 있거든.”
움찔, 이미 깨어나 있었는지 축 늘어져 있던 몸이 움찔 떨렸다.
끼이익.
쾅.
복도로 나온 주언과 이초원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쿵, 하고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새된 비명이 새어 나온 걸 들은 주언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제 소지품은 못 돌려받겠죠?”
“지금 멀쩡히 나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연락은….”
“이미 했어요.”
지금 당장 명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주언은 굳이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연락을 했으면 그걸로 됐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가요.”
이초원이 재촉하듯 말하자, 주언이 고개를 돌리고 앞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예상과 다르게 나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고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