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94화 (94/112)

#94

타다다닥.

두 사람 모두 어설픈 대화를 하느니 침묵이 낫다 싶은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생각보다 넓어.’

여한올이 다 이룬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가 이 공간에 얼마나 애정이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주언은 달라붙는 상념을 떨쳐내려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자신의 코가 석 자였다.

빨리 명훤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자신이 동정하려는 남자는 자신을 이용해 명훤에게 테러를 시키려던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내부가 크네요.”

“후원도 생각보다 많이 들어오거든요.”

“…그 후원 내역도 그 사람한테 가는 건가요?”

“네.”

자신을 만나기 전, 어린 시절 명훤은 어땠을까.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 명훤이 여지웅 손에 자라며 어땠을지를 떠올리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의 부모님이 사이가 좋았다고 해서 다른 집이 당연히 그럴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가족은 다시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여서 피했고, 자신이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만큼 상대에게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그래놓고 명훤이 끊어냈던 약점이었던 어머니까지 자신이 끌어들여 결국 죽게 만든 거나 다름없지 않나. 이성적으로는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몰랐던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았으나 감정적으로는 죄책감에 빠져 익사할 것 같았다.

“힘들어요? 조금 쉬었다 갈까요?”

이초원은 주언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오해했는지, 문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래요?”

주언의 대답에 이초원은 곧바로 지문 인식기에 제 엄지를 댔다.

삐이이이-

인증 완료되었습니다.

벌써 세 번째 문이었다. 이초원이 앞장서며 보안 장치가 설치된 문을 하나둘씩 열었다. 혼자 나왔으면 오도 가도 못하고 바로 붙잡혔을 거라는 생각에 쓰게 웃었다. 갑자기 서로의 뒤통수를 계속 치는 이상한 콩트 같은 장면을 보다가 박차고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멀었어요?”

“거의 다 왔어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근처에서 다른 인기척이 느껴져 몇 번 걸음을 멈춰야 했다.

삐이이이-

인증 완료되었습니다.

“이게 마지막 문이에요.”

이초원의 말에 긴장을 조금 푼 주언은 문이 열리길 얌전히 기다렸다.

지이잉. 문이 열리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사람이 두 명 서 있었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

“급한 일이 있어…서.”

이초원은 최대한 초연한 척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두 사람은 이미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행은 아니죠?”

주언의 물음에 이초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밖에서 일정 있던 거 아니었어?”

“통제실에 뭐를 놓고 와서 돌아왔는데, CCTV에서 재밌는 걸 봐서.”

CCTV까지 봤으면 달리 변명할 거리도 없다. 주언이 팔이라도 묶인 상태였으면, 인질을 옮기는 중이라고 변명이라도 해 볼 텐데, 무방비한 상태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려 버렸다. 이초원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바로 저 너머가 출구다.

“그쪽 인기 엄청 많네요.”

“그런 걸 보통 인기 있다고 하지는 않죠.”

이초원이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주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무슨 이런 개판이 있나 싶긴 했다. 같은 테러 조직이지만 다들 사실은 국가를 위해 이바지해야 하는 의원 밑에 있다니. 웃기지조차 않는 농담 같지 않나.

이초원이 한쪽 팔로 주언의 옆구리를 밀며 낮게 속삭였다.

“저 문은 일반 집이랑 다름없이 평범한 잠금장치로 되어 있어요.”

안에 잠금장치가 잘되어 있는 만큼 나가는 문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일반 집처럼 위장하고 있어 밖으로 향하는 문에 달린 잠금장치는 일반 가정집과 동일했다.

“네?”

“같이 나가주지는 못할 것 같아서.”

타악.

이초원은 주언의 대답도 듣기 전 가볍게 뛰어올라, 앞에 있는 두 사람을 공격했다.

“저기요!”

주언이 애타게 불렀으나 이초원은 더 이상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스스슷.

챙!

이초원이 주언의 목에 닿으려던 단도를 막아냈다.

“빨리 가요!”

이초원이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소리 지르며 두 사람의 공격을 받아쳤다. 주언은 이초원의 말을 따라 세 사람을 가로질러 문 쪽으로 뛰어갔다. 여기서 괜히 도와주겠답시고 옆에 있는 게 더 방해라는 걸 잘 알았다.

“고마워요.”

타다다닥. 재빠른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주언을 본 한 명이 외쳤다.

“저 새끼 잡아!”

“너네 둘이 있으니까 내가 우스워?”

이초원은 AGT 내에서도 실력자로 통하는 인물이었고, 두 사람은 겨우 중간급에 있었다. 이초원의 도발에 두 명이 동시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퍽.

“윽!”

주언은 재빨리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니 내부와 매치가 안 되는 연식이 제법 되어 보이는 복도가 보였다. 외관은 아주 평범한 복도형 아파트처럼 보였다. 주언은 서둘러 복도를 가로질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밖에 나간 주언은 주변에 낯선 건물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건물이 몇 개 있기는 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나오긴 했지만 핸드폰도, 돈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조직원들이 뒤쫓아 올지도 몰라서, 멈추지 않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지만, 선택이 틀렸는지 걸으면 걸을수록 건물은 줄어들고 정돈되지 않는 비포장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까.”

방향을 틀어야 할지 고민했으나 곧 주언은 고개를 저었다. 거길 다시 지나가다가 붙잡히면 그때는 이도 저도 안 된다. 자신을 데리고 나왔던 이초원의 등급도, 이초원을 막아서던 상대의 등급도 알지 못했다. 비슷한 급이라면 이초원이 할 수 있는 건 시간을 벌어주는 것뿐이다. 그 기회를 헛되이 날릴 수 없었다.

“여기 대체 어디지?”

주언이 걸음을 멈추곤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기절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해 보았다. 갇혀 있었을 때 여명훤이 나누는 대화는 분명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목소리라고 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깨어난 건 몇 시간 전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곳에 갇히고 나서 시간이 많이 지나지는 않다는 뜻이다.

“경기도 외곽… 정도로 생각하면 되려나.”

쉴 새 없이 걸은 탓에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일단 가장 큰길로 나오긴 했는데 어떻게 된 게 차 한 대도 안 지나가나 싶었다. 죽은 도시 같았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액셀러레이터를 풀로 밟는지, 엔진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차가 주언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라지만 저렇게 차를 거칠게 모는 사람이 제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주언은 손을 뻗어 휘젓기 시작했다. 밑져야 본전이고, 아쉬운 쪽은 주언이니까 핸드폰이라도 잠깐 빌릴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싶었다.

끼이이익-!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차는 주언의 바로 앞에서 급정거했다.

**

구영의 잘못은 아니지만, 구영은 주언이 납치된 것에 극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명훤에게 말했으니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주언에게서 여전히 연락이 없었고, 주언을 구하러 갔다고 믿었던 여명훤은 국제연합총회에 참석해 있었다.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는 구영은 총회가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가서 여명훤과 대화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

그리고 그곳에는 스태프로 일하며, 일반인을 통솔하고 있는 진수희가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주원 오빠 감시해야 된다고 안 온다고 했었잖아. 주원 오빠랑 같이 왔어?”

“…아니.”

풀죽은 구영의 목소리에 진수희는 옆에 있던 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목에 걸고 있던 스태프 카드를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저, 잠시만 자리 좀 비울게요.”

“이제 곧 여명훤 능력자 나오는데?”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수희의 단호한 태도에 상대가 어쩔 수 없이 그럼 잠깐만 봐주겠다고 말했다.

“너 일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 정도는 괜찮아. 뭔데. 왜 죽을 것같이 그러고 있어.”

일하다가 쉴 때 오려고 봐 둔 장소로 구영을 데리고 간 수희가 양 허리에 손을 얹고 구영을 추궁하자 구영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뭔데 그래. 나 불안하게.”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수희가 고개를 푹 숙인 구영의 어깨를 흔들며 아까보다 강한 어조로 구영에게 답을 닦달했다.

“그게….”

물에 젖은 목소리가 힘겹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구영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가만히 듣던 수희가 곧 버럭 하며 구영의 등을 쳤다.

짝.

큰 소리가 나고 구영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구영이 막을 거라고 생각해서 있는 힘껏 손을 내려친 수희는, 구영이 피하지 않고 맞자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처럼 있는 것보다는 나았어!”

“…미안.”

수희의 역정에 구영은 괜히 더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평소였다면 수희의 강한 어조에 맞춰 말대꾸를 했을 테지만, 지금의 구영은 그럴 여유는 전혀 없어 대답하는 대신 눈시울을 더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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