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그래서 그렇게 죽는 얼굴을 하고 온 거야?”
“아무도 연락이 안 돼서 일단 나왔어.”
“경찰에 연락은?”
“여명훤 에스퍼님이 일 더 키우지 말고 일단 기다리라고 하셔서….”
구영의 말이 옳았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수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답답하기만 하고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갔을까 싶다가도 울컥 다시 화가 치솟았다.
“일단 내가 어떻게든 여명훤이랑 만날 수 있게 해볼 테니까 나랑 같이 있어.”
스태프로 있는 수희가 여명훤과 만날 확률이 더 높았다. 구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단상에서 할 일 끝내시고 내려올 때 그때를 노려볼게.”
수희가 단상 위를 가늠하듯 바라보았다. 곧 사람들 사이로 여명훤의 이름이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나오셨나 보다.”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그 사이에서 여명훤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것같이 큰 키, 옷 너머로도 보이는 탄탄한 몸, 그리고 흉포한 몸과 다른, 어떻게 보면 금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 얼굴.
여명훤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들도 분명 계속 같이 회의실에 있었을 텐데 여명훤이 등장하자 경탄 어린 시선으로 침묵하며 여명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명훤입니다.”
단단한 목소리가 마이크에 닿아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숨을 죽여 여명훤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였다.
퍼퍼퍼펑!
폭발이 폭죽처럼 화려하게 터지기 시작했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탄이 터졌다. 불시에 시작된 테러에 사람들이 순식간에 패닉에 빼졌다.
“으아악!”
수희는 반사적으로 옆에 지나가고 있던 일반인의 팔을 붙잡아 이끌었다.
펑!
“이게… 무슨…!”
갑자기 붙잡혀 바닥에 처박힌 곽성관은 따지려는 것도 잠시, 자신이 걸어가야 할 바닥이 부서지고 까맣게 탄 것을 보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감사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테러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네?!”
곽성관이 펄쩍 뛰었다. 갑자기 테러라니. 운이 없어도 참 지지리도 없다 싶었다.
“저희랑 동행해요. 지금 저 인파에 휘말리면 더 답 없으니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수희의 말에 곽성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구석에 있어 빨리 대처해서 피해가 없을 수 있었으나, 사람이 많은 쪽은 달랐다. 폭발 때문에, 폭발로 터져나간 건물 파편에 맞은 수십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사람들 생각도 안 하고 그대로 짓밟고 가네.”
구영이 빠르게 쓰러진 사람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대로 뒀다가는 폭발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밟혀서 죽을 것이 자명했다.
지금 여명훤을 찾아간다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도저히 눈앞에 쓰러진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
단상 앞에 있던 사람들의 수행원은 재빨리 경호해야 하는 사람을 보호하며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으나, 일반인은 달랐다.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어려워 서로를 밀쳤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으면서 되는대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로 다시금 폭탄이 터졌다.
“퍼펑!”
오늘 총회를 위해 있는 스태프 중 능력자 몇 명이 나서서 일반인들을 통제하려고 했으나 무리였다.
여명훤은 자신 앞에 벌어지는 지옥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폭발을 일으킨 사람은 여명훤이 아니었다.
누가 들으면 비정하다고 욕하겠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더 길게 끌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와중, 폭발로 인해 시간을 벌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지웅의 제안에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면 틈을 보이는 거나 다름없어, 단상에 나가서 마지막에 하겠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 전에 주언의 일이 해결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한 말이기도 했다.
“연락은?”
“구출했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말끝을 흐리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다. 서윤진의 낭패 어린 시선에 여명훤이 인상을 구겼다.
“그런데요?”
“바로 뒤에 연락이 끊겼어요.”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소리군요.”
“네. 그래도 다시 다른 쪽에서 연락 온 건 아니니까….”
“이 테러. 누가 일으켰다고 보십니까.”
여명훤이 서윤진의 말허리를 끊고 물었다. 여명훤은 지금 터져 나오는 분노를 숨기는 게 아니었다. 그의 상태를 살펴보니 온몸을 둘러싼 기운이 아까보다 조금 진정되어 보였다. 서윤진은 여명훤의 질문을 곱씹었다. 보통 테러를 자행하는 단체는 AGT였지만, 이번에 AGT는 여명훤에게 테러를 지시했다. 그러니 현재 AGT가 테러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여 의원? 서윤진은 고개를 저었다. 여 의원이 무모하게 테러를 자행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AGT가 명훤에게 테러를 지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우주언이 있었기 때문에.
서윤진은 새삼스럽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공격 1팀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AGT와 맞닥뜨릴 일이 가장 많았던 팀이다. 눈에 익은 테러 스타일이었다. 궁지에 모는 것처럼 테러를 자행해, 몰린 사람들을 더욱 패닉에 빠지게 만드는 방식.
“이런… 스타일은… 설마.”
서윤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여명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대답했다.
“여한올입니다.”
“그럼 여 의원 측 사람이 다시 주언 씨를….”
“여지웅 손에 주언이가 있었다면 여한올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제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여지웅에게 빼앗기고는 못 견딜 여한올이니까.
“그럼 지금 적어도 양쪽 모두 우주언을 데리고 있지 않다는 뜻이네요.”
서윤진도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명훤은 잠시 미동 없는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우선 이 상황을 정리하도록 하죠.”
**
‘너에게는 참 실망이구나.’
여지웅의 말을 곱씹으며 강윤재가 피식 웃었다. 기대한 적도 없는데, 실망이라는 말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지금껏 수많은 업적의 공로를 여지웅에게 돌렸음에도 그에게 있어서 강윤재는 그저 조금 유용한 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잡힌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더라. 자신을 바로 죽이면 여지웅이 의심받을 테니, 한동안은 죽이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 것이 자명해 보였다.
기분 나쁘진 않았다. 안 그래도 한동안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주언이 떠나고 강윤재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술을 퍼부으면 조금 채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라도 할 수 있어서 술에 빠져 살았다. 술을 한계치까지 마셔야 잠깐이라도 잘 수 있기도 했다. 이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 애의 잔향이 아직까지도 가슴 끝 언저리에 남아 윤재를 괴롭혔다.
“미친 새끼.”
이 와중에 보고 싶어서 핸드폰 화면에 적혀 있는 주언의 이름을 화면이 검게 변할 때까지 바라보곤 했다. 매몰차게 떠난 주언이 원망스럽고, 밉다가도 주언의 야멸차게 떠난 뒷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이 무겁게 짓눌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신의 욕심이 언제 이렇게 비대해진 걸까. 윤재는 팔로 제 두 눈을 가리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어떻게든 여지웅 눈에 다시 들어서 쓸모를 다해야 됐다. 여지웅이 자신을 처리하지 않고, 아무것도 압수하지 않고 단순히 구금해 두는 것은 아직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전처럼은 안 되더라도, 그래야 살 수 있을 테니까. 이성적으로는 알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알고 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Rrrr.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오랜만에 보는 번호였다. 윤재는 핸드폰을 바닥에 엎어두었다. 그 누구도 윤재에게 총을 들이밀고 협박한 것이 아니라, 그때 나름의 최선의 선택이 이런 최악의 결과를 낳은 것뿐이다.
능력자 특수 전형으로 일반인 신분으로 특수능력기관에 들어가며 모든 게 시작되었다. 가진 게 없어서 성공하고 싶어서, 아무것도 몰라서. 처음에는 여 의원의 손을 잡았다. 높은 사람 눈에 띄어서 나쁠 것 없으니까. 여지웅은 겉만 보면 좋은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아직 뭣도 모르는 애송이었던 자신 정도 구워 먹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후원을 받기 시작했고, 그 후원은 윤재의 천재성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내 아들놈들이란 게 하나같이 말썽만 피워대서.’
‘저로는 부족하시겠지만… 제가 더 노력할게요.’
‘차고도 넘쳐.’
수렁의 초입은 달콤했다. 뱀이 건넨 사과의 과육이 너무도 달아서 번들거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가족까지 후원해 준다던 여지웅 덕분에 윤재는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학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여명훤과 우주언을 만났다. 여명훤은 뭐가 문제길래 훌륭한 가족과 연인까지 옆에 뒀는데 그렇게 불만족스러워할까 싶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때는 그 어떤 욕심도 학구열을 이길 정도로 강렬한 색채를 띠지 않았었으니까.
이변이 코앞에 온 후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갔을 때 마주한 건 배가 부른 누나였다. 자신과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친밀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어. 왔어?’
마주치는 순간 실험에 몰두하느라 외면했던 현실이 싸늘하게 윤재를 반겼다. 현관문 앞에서 짐을 떨군 윤재가 제발 아니라는 대답을 듣기 위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