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누나. 아니지?’
‘미안. 너 후원하는 거에는 문제없게 해주시겠대.’
그제야 알게 됐다. 이 모든 건 거대한 덫이었다. 자신에게 쓸모가 있어서 거뒀고, 학업에 성과가 있자, 여지웅은 다른 곳에서 온 제안에 흔들리는 자신을 보고 묶어둬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멍청하게도 가족 같은 관계라고 하셨으니까, 자신에게 온 더 좋은 기회를 응원해 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을 했었다.
‘누나는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거야.’
‘그럴 사람 아니야.’
그때 알아차렸다. 향후 자신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여지웅에 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뒤로 누나와 연락하지 않았다. 누나가 자신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멍청한 척, 여전히 여지웅만을 보고 곁에 머물고 있는 척했다.
“이젠 그것도 글렀네.”
자신을 원망하려고 전화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윤재는 그런 원망을 받을 여력이 없었다. 몸이 수면 아래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다. 차라리 더 깊게 가라앉아 완전한 심해에 가라앉고 싶었다.
“AGT에 있던 애들 다시 돌아온다던데?”
“뭔 개소리야.”
“개소리 아냐. 이번에 의원님 자식 중 한 명이 갑자기 돌발 행동을 했다나.”
“납치했다던데. 그 여명훤 능력자 애인.”
익숙한 이름에 윤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문밖에 서 있었지만, 방음은 썩 좋지 않아 두 사람의 대화가 선명하게 들렸다. 윤재를 감시하고 있으면서, 아무도 윤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늘 술에 절여져 있고, 나가려는 시도조차 안 했으니까.
기밀 사항이 줄줄 나왔다. 게다가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알게 된 정보가 아니라 내부에서 알음알음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얘기인 듯했다.
“왜?”
“그건 모르지. 그런데 탈환 성공하면 돌아오기로 했나 봐.”
“AGT는?”
“그건 모르지.”
“하여튼 다시 못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돌아오면 우리보다 직급이 높대. 나 엄청 갈궜는데 어떡하지.”
윤재도 여지웅의 손이 AGT까지 닿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AGT에 지급하던 몇몇 물품은 윤재의 손을 거쳐 그 근처까지 직접 가본 적도 있었다.
자신이 나가봤자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곳에서 나갈 방법은 많았다. 특히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안심하고 있는 지금은. 특수능력기관에 있을 때, 선택 수업으로 납치당했을 때 대처하는 수업을 떠올리곤 낮게 웃었다. 주언과 유일하게 같이 듣던 수업이었으니까.
**
초조하게 차를 몰았다. 경기 북부 외곽에 있는 AGT 건물은 경비가 삼엄했고, 구금당해 있는 걸 AGT 내부에 있는 여지웅 아래 사람들이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집에 자신을 감시하던 두 사람처럼 쉽게 일이 풀리지 않을 것도 알았다. 윤재는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속도를 더 내기 시작했다. 여명훤은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여지웅도 있었다. 여명훤이 우주언이 사라진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계속 그곳에 있다는 건 어떤 조건이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한올은 몇 번 만난 게 다지만 그는 제 아버지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약점을 잡는 건 여지웅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누구의 손에 우주언이 잡히더라도 여명훤은 자신처럼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나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된 지금.
여명훤이 얼마나 우주언을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차는 AGT 건물에 도착하기 직전에 길가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에 의해 멈춰졌다.
왜 갑자기 네가 여기서 나와?
우주언은 아무것도 없는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윤재는 서둘러 차 문을 열었다. 정말 우주언이었다.
“우주언!”
“…윤재?”
차에서 문을 급히 열고 나온 윤재를 본 주언도 윤재와 마찬가지로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는 표정을 지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해? 너 지금 AGT한테 잡혀 있던 거 아니었어?”
윤재는 급하게 나왔는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있었다. 주언은 급하게 나온 듯한 윤재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
“나 감시하던 사람들이…!”
“감시?”
갇혀 있을 때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윤재가 자신 때문에 구금당했다던 이야기. 다른 충격적인 일들 때문에 잊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새삼 얼굴을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거칠어진 피부, 정돈되지 못한 머리, 눈 밑에 짙게 내려온 그림자.
“너 구금됐었다는 거 진짜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항상 깔끔하게 다니던 강윤재답지 않았다. 갇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술 마시며 자책하느라 그런 거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주언은 갇혀 있느라 저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돌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띵해졌다.
“일단 타.”
“다시 너를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
“뭘 알고 하는 말이야?”
“나 때문에 구금당한 거잖아.”
“그런 거 아니야.”
“…맞잖아.”
주언이 뒷걸음질 쳤다. 윤재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자신의 상황이 급한 것도 알고, 자신이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그래도 자신 때문에 구금당했던 윤재의 손을 생각 없이 빌릴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시간은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아직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다시 보지 않을 수 있으면, 보지 않고 싶었다. 그냥 서로 각자 자리에서 잘사는 게 가장 좋은 헤어짐이라고 생각했다.
윤재는 잠시의 침묵 끝 입을 열었다. 이런 소리를 제 입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속에서 쓴 물이 왈칵왈칵 치솟는 것 같았으나 윤재는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 아직 친구긴 하지.”
“…….”
“친구가 위험하니까 도울 수는 있는 거잖아.”
“…….”
“그러니까 일단 타.”
친구라고 단정 짓기엔 너무 깊었고, 애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얕았던. 어디로든 갈 수 없어 방황했고 그래서 더 괴로웠던 게 두 사람의 관계였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윤재일 것이다. 주언은 두 손을 주먹 쥐고 재빨리 조수석에 탔다. 윤재에게 미안하지만 여기서 더 거절할 여력이 없기도 했다. 여명훤이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미안한데 부탁 좀 할게.”
주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
차 내부는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좋게 헤어지지 않았다. 이별의 끝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사실을 알지만, 혀끝에 맴도는 쓴맛에 적응할 수는 없었다.
한번 깨진 파편은 다시 전처럼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 관계도 그랬다. 없던 일로 치부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함께한 몇 년을 송두리째 잘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써 막아두었던 감정들이 범람하는 기분이다. 끝끝내 윤재를 사랑할 수 없었던 죄책감. 나를 이용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함께 웃었던 그리움. 상반된 감정이 한데 부딪쳐 주언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손에 피가 통하지 않는 기분에 주언은 의미 없이 손을 주먹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고개를 틀지 않고 흘끗 운전하는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어색함에 먼저 항복한 것은 주언이었다.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오래 생각한 것과 다르게 나온 목소리는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윤재는 자신을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자신이 그 순간을 그리워하고, 조금이나마 윤재를 연민할 수 있는 건 자신이 감정적 갑이기 때문이다. 윤재에게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건 형태조차 잃은 재뿐이다. 바람 훅 불면 공기 중으로 흩어질.
‘정말 나 때문에 목숨까지 건 걸까.’
사실 진짜 물어보고 싶은 건 이거였다. 하지만 차마 묻지 못한 건, 그 질문에 혹여라도 윤재가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서였다.
아니라고 대답한다고 한들 믿을 수 있을까. 염치없게 입 닫을 일도 아니지만, 윤재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여기에 물건 납품하려고 와 본 적 있어.”
윤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잠겨 있었다. 못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많이 야위었다. 언뜻 신경질적으로까지 보일 정도로 인상도 많이 바뀌었다.
“여기에…?”
“AGT 대부분도 알고 보면 국가 기관 소속일걸.”
신호가 멈춘 사이 윤재는 눈 밑에 가라앉은 짙은 다크서클을 손가락으로 쓸며 신랄하게 대답했다.
주언은 아까의 대화 내용을 상기시켰다.
“아.”
강윤재는 여 의원과 AGT가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윤재의 실험 물품이 AGT에도 흘러들어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싶었다. 이에 대해 따로 대화하기 애매한 주제라 입을 다물었는데, 윤재는 주언의 침묵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는지 쓰게 웃었다.
“그다지 놀라지 않은 눈치네. 나한테 더 실망할 게 없어서 그런가.”
“아니야. 그런 거.”
“그럼 기대할 게 없어서 그런 건가.”
자조 어린 말투에 주언이 뒷목을 쓸었다. 연달아 서로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걸 보며, 자신이 아는 여한올 측 사람과 여명훤 측 사람 말고 다른 측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도 눈치챘다. 정황상 그게 여지웅이라는 것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