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놀라긴 했어. 티를 안 내려고 했을 뿐이지. 너도 교류하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주언은 피에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풀어 내리며 대답했다.
“많이 실망했겠네.”
“…아니.”
“…….”
“실망할 정도로 기대도 안 했다고 생각해?”
윤재의 침묵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질문했다. 정곡이었는지 윤재의 어깨가 경직됐다.
“독심술 능력이라도 생겼어?”
“아냐! 난 그냥 네가 나 때문에 갇혀 있었다길래….”
“…….”
“…….”
“입이 참 싸네. 너 가둔 사람들.”
“진짜라는 소리구나.”
“부담스러워하지 마.”
핸들을 쥔 윤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언에게 죄책감을 심어서 무엇을 하려는 심산이 아니었다. 주언은 부탁한 적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이기심일 뿐이라는 걸 이제는 잘 알았다. 윤재는 시큰거리는 가슴을 애써 무시했다. 주언은 그런 윤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윤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야 보였다. 조금 더 일찍 알게 되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치닫지 않아도 됐을까.
‘해봤자 이제는 쓸모없는 생각이지만….’
분명 바로잡을 수 있는 지점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더욱 괴로워질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왔어?”
“맨날 연구소에서 연구만 하는 사람이니까 무시하더라고. 큰코다치게 해줬지.”
“다치진 않았고?”
“몰래 도망치기만 했어. 너야말로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거기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안에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은?”
“나 먼저 나왔어.”
뒤통수 때리기 릴레이를 보다가 마지막 승자가 자신을 내보내 줬다는 말까지 구구절절 할 필요를 못 느껴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가이드라고 무시해서 나도 큰코다치게 해준 거지.”
괜히 팔뚝을 들어 올려 빈약한 근육을 보여주자 윤재가 저항 없이 마른 웃음을 뱉어냈다.
하지만 곧 웃음이 멎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창밖을 보자 어느덧 외곽에서 빠져나왔는지 차가 제법 밀렸다. 교통체증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앞을 보는데, 윤재가 불쑥 우리가 억지로 얘기하지 않으려 했던 순간을 입에 담았다.
“이제 와서 용서해달라고 이러는 거 아니야.”
“…….”
“나 용서하지 마. 주언아.”
사실은 용서받고 싶었다. 조금만 더 일찍 주언을 만났더라면 나를 용서해달라고, 너를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나라고 애원하며 매달렸을지도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도 그러고 싶었다. 모든 걸 설명하면 마음 착한 주언은 마지못해 자신을 용서할 확률도 있었다.
‘안 돼.’
핸들을 너무 세게 잡았는지 윤재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주언을 떠나보내고 후회뿐이었다.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욕심부렸다. 한여름 밤의 꿈은 끝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제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주언을 상처 입혔다.
“윤재야. 나는….”
“대답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야.”
주언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을 벙긋거리다 곧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은 더 이상 윤재에게 충고나 조언을 해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손 놓고 싶지 않았다.
“여 의원 밑에서 나올 수는 없어?”
“내 이기심 때문에 너를 숨겼다가 들통난 건데, 그걸로 네가 부채감 느낄 필요 없어.”
“부채감이 아예 없다고는 안 할게. 그런데 그래도 이 말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
“처음에는 자의로 들어갔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잖아. 네가 나를 잘 아는 부분이 있듯이 나도 그래. 너 지금 거기 있고 싶지 않잖아.”
“…….”
“거기서 나와.”
윤재는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은 여지웅의 품을 벗어나도 충분히 발휘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나가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여지웅은 뿌리가 썩은 고목이었다. 바로 앞에 마주 서 그 크기에 압도된 윤재와 저 멀리서 고목을 바라본 주언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주언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주언을 믿는 것과 별개로 동정 한 톨이라도 아쉬웠으니까.
“내 조카. 명훤이 동생이야.”
멈칫. 이왕 말했으니 강경하게 재차 말하려던 주언이 멈칫했다. 같이 살면서 윤재의 가족 얘기를 들은 적은 손에 꼽았다.
그 짧은 한마디로 많은 것들이 설명되었다. 윤재가 왜 여전히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 부당한 일을 참았어야 했는지. 착잡한 마음이 무겁게 가슴 위를 짓눌렀다.
“…전혀 몰랐어.”
“말하지 않았으니까.”
“왜 말 안 했어? 진작 말했더라면 어떻게든…!”
“뭐. 나도 안주하고 있었던 거겠지. 여지웅이 주는 환경에 길들여졌던 걸지도 모르고.”
“…….”
그와 동시에 여지웅의 질 나쁜 농락이 경멸스러웠다. 그 감정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윤재가 뒤이어 말했다.
“너 걱정하라고 한 말 아니고. 그냥 너 말대로 좋아서 있는 거 아니라고… 누구한테는 말하고 싶었나 봐. 미안하다.”
“윤재야.”
용서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 용서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고, 그건 윤재를 기만하는 말일 테니.
하지만 목적이 어떻게 됐던, 자신의 안위가 그의 희생으로 인해서 지켜졌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거대한 리스크를 짊어 안고. 윤재의 방법은 틀렸지만, 그 감정조차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 구하러 와줘서 고마워. 윤재야.”
어느덧 차가 멈췄다. 말하지 않았어도 주언이 바라던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여명훤이 있는 곳.
중요한 회의가 있는 만큼 내부에 있는 주차장을 일부 통제하고 있어 차로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윤재가 눈을 크게 뜨고 주언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소리를 처음 들은 사람처럼 윤재의 얼굴에는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윤재는 말을 고르고 골랐다. 예상치 못한 주언의 인사에 속수무책으로 가슴이 허물어진다. 자존심을 세우려야 세울 수조차 없게 만드는 주언의 말에 윤재가 입술을 달싹였다.
“주언아. 우리….”
구차하지만 친구라도 되고 싶었다. 네가 없어서 죽을 것 같았다. 내가 너를 보살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혼자 사는 게 이토록 괴롭게 느껴지는 건 왜인지 나도 모르겠다.
무수한 말이 닫힌 입 안 혀끝을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어?”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이게 무슨 소리지?”
하지만 윤재의 바람과 다르게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으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누가 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 부상자가… 너무 많아… 우욱….
차 안까지 들릴 정도로 저 너머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모든 신경이 동시에 바깥으로 쏠렸다.
사람들이 소 떼처럼 쏠려 나오고 있었다. 주언은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공통된 표정을 읽었다. 처음이 아니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을 때, 다른 사람들이 짓던 표정이다.
이곳에 던전이 생긴 건가?
주언은 오래 추측할 수 없었다.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차에서 보이는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유리가 깨지자 불길이 순식간에 거세져 하늘 위로 치솟았다. 불꽃에서 검은 연기가 무섭게 피어올라 하늘을 가렸다. 그러곤 곧 건물 파편이 바닥에 추락하기 시작했다.
쿵. 쿠웅.
바닥에 탄 건물 자재가 떨어질 때마다 달려 나오는 사람들이 절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 갈게.”
“잠깐….”
탁.
윤재가 멈춰 세우려 했지만, 순식간에 차에서 뛰쳐나간 주언은 아비규환이 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차 문이 닫히며 외부에 있던 찬 공기가 차 안에 밀려왔다. 윤재는 찬 공기가 다시 미지근해질 때까지 주언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잡았던 감각이 남은 손끝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
그 시각 여지웅은 대피하지 않고 건물 가장 최상위층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직접 볼만한 광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근래 들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던 놈들의 행태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놈이 어떤 말로를 맞이하게 되는지 볼 수 있으니,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야 옳았다.
“그냥 알아서 잘하라고 두면 개답게 알아서 잘할 것이지.”
사냥이 끝나면 개는 먹힌다. 오늘은 사냥을 하는 날이고, 자신의 혈통이 섞인 개가 잡아먹히는 날이기도 했다.
“쯧.”
여지웅이 낮게 혀를 차며 뒷짐을 졌다. 조금 뒤 여지웅의 뒤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보좌관은 뜻밖의 연락에 인상을 굳혔다. 오랜만에 여지웅의 기분이 좋아 보여 망설였지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라 보좌관은 어렵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의원님. 방금 자택에 있던 강윤재가 무단이탈을 했다고 합니다.”
넓은 유리 통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여지웅의 시선이 뒤에 있는 보좌관에게 닿았다. 뱀처럼 음습한 시선에 보좌관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뭐? 감시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 방심한 사이에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하… 일하는 꼬락서니하고는. 내가 너희들 놀라고 돈 주는 줄 알지.”
짝.
보좌관의 뺨이 매섭게 올려붙여지고,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끼고 있던 반지에 긁혔는지 보좌관의 뺨에 길게 상처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