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98화 (98/112)

#98

“의원님.”

보좌관의 말에 여지웅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말대꾸하지 말랬지.”

“그게 아니라… 피하십시오!”

덥석.

콰아앙-!

여지웅이 불과 몇 초 전까지 있던 곳이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드는 것과 동시에 쾅, 하는 소리가 연이어 이어지며 맞은편 건물 최상위층이 통째로 날아갔다.

“개새끼가 끝까지… 당장 그 새끼 데리고 오라 그래.”

자신이 이곳에 있을 거라는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여명훤은 진즉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공격을 가한 건 분명 여명훤일 것이다. 괘씸하기 짝이 없다. 여명훤이 이렇게 나온다면 그에게 가장 소중한 걸 담보로 고통을 줄 수밖에.

정확히 지칭하지 않았지만, 보좌관은 여지웅이 데리고 오라는 게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AGT 여한올이 납치하고 중간에 이쪽에서 가로챈 여명훤의 역린, 우주언.

곧장 연락을 취하던 보좌관의 안색이 곧 싸늘하게 식었다.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AGT 내부에 남겨뒀던 일원들 모두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아마….”

퍽.

이번에는 보좌관 얼굴 정면에 여지웅의 주먹이 처박혔다. 코가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코에서 왈칵 피가 터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여지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뒤에 일렬로 서 있는 보디가드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여지웅은 우주언을 AGT에게서 강탈하고, 여명훤에게 지시를 내린 후 이곳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기로 결정한 후 급하게 보디가드 인원을 보충했다. 이번에 보충된 몇몇은 AGT에 첩자로 들어가 있던 사람도 있었기에, 다들 괜히 저에게 불똥이 튈까 봐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지금 바로 대피는?”

“대피 경로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다만… 그쪽에도 폭발의 피해와 인파가 쏠려있어 다소 혼잡스러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쓸모없긴.”

뒷목에 열이 오를 정도로 들끓는 화에 여지웅은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러곤 이내 살았던 세월을 증명하듯 분노에 먹히지 않고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테러를 일으킨 걸 보면 아직 우주언이 다시 강탈당한 건 모르고 있겠군.’

여기서 도망치면 오히려 우주언이 제 수중에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다.

여지웅은 제 턱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여명훤이 있는 곳은?”

“여전히 단상 위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쪽으로 이동하지.”

도망 대신 적진 한가운데 가는 것을 선택했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미리 마련해 두었던 대피 경로가 다소 혼잡하다고 말했으나,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는 그곳밖에 남지 않았다.

고로 오히려 사람들이 따르는 방향에 맞춰 도망치다가 인파에 휘말려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가장 나은 건, 이 일을 일으킨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다. 저렇게 능력을 써댔으니 가이딩이 필요할 것이고, 현장에 가이드는 없을 테니 이 약을 억제제라고 속이고 주면 알아서 자멸하게 될 것이다. 즉효성이 있는 약은 아니니 여지웅이 피할 시간도, 주변에 건물이 파손되어 CCTV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테니 단독 사건으로 끝날 수 있었다.

여지웅은 주머니 안에 있는 약통을 굴리며 생각을 마쳤다.

‘처음부터 이상했지.’

여태껏 여명훤을 제 입맛대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해서, 경계를 조금 느슨하게 한 것이 패착이었다. 그 부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모든 게 완벽했다. 사람들은 제 뜻대로 움직였고, 자신이 가장 위에 군림하는 청사진은 위험요소를 없애며 서서히 완성시키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순간도 있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길을 터 두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아끼던 사냥개가 목줄을 푸는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며 계획이 어그러졌다.

‘우주언.’

떠오른 공통분모는 하나밖에 없었다. 여명훤, 강윤재가 범한 돌발 행동의 주된 이유. 이가 뿌득 갈렸다. 먼지 하나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는 사실이 썩 불쾌했다.

“죽이는 게 낫겠군.”

강윤재도.

두뇌는 명석하지만 감정에 휘말려 자신을 무는 개새끼는 필요 없다. 기껏 인질까지 공들여 만들어 냈더니만.

‘윤재는… 제가 집에 가만히 있을 테니까 윤재는 버리지 말아줘요.’

자신이 윤재의 약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강윤재의 누나 강영원은 여지웅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사정했다. 자신이 믿었던 관계가 모두 허상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강영원의 허망한 표정은 제법 볼만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여지웅이 별 볼 일 없는 여자의 애원을 들어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터벅. 터벅.

보디가드들이 여지웅의 주변을 둘러쌌다. 검은 정장 사이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조차 않았다. 방을 나오는 순간 건물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계단을 이용해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꺄아아악!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비명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박혔다.

문을 연 순간 본 것은 지옥도였다. 폭발 때문에 무너진 건물 일부, 타오르는 불, 사람들의 절규 소리. 늘 뒷선에서 지시를 내렸던 여지웅이었기에 직접적으로 이런 현장을 맞닥뜨린 것은 처음이었다. 여지웅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성이 날아가 짐승만도 못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듯 쳐다보았다.

그렇게 도망치려고 해도 죽을 사람은 죽을 것이다. 날 때부터 군림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듯이, 이런 사건 사고에 불운하게 죽을 사람도 정해져 있다.

“가지.”

여지웅은 인파 무리를 역행하기 시작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유유자적하게 걷는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이라 도망치느라 바쁜 사람들의 시선을 사기도 했다.

우회하는 대신 사람들을 뚫고 걸음을 재촉하자, 아직도 단상 위에 서 있는 여명훤에게 금세 도달할 수 있었다.

“여명훤.”

여지웅의 눈짓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옆으로 물러났다. 이미 그 안에 여지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명훤이 무감각한 시선으로 여지웅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볼일이 있으셔서 간 줄 알았는데요.”

조금도 놀라지 않는 얼굴이라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여지웅은 짐짓 자비로움을 베풀겠다는 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내가 했던 말을 조금 오해한 듯싶구나.”

“무슨 오해 말씀이십니까.”

“지금이라도 멈춰라. 내가 이렇게까지 큰일 벌이라는 뜻 아니라는 거 너도 알지 않느냐.”

“그렇죠. 정확히는 애들 소꿉장난 같은 테러를 가장해서 원하는 사람을 제거하고 제가 감옥에서 썩길 바라셨겠죠.”

담백한 어조였다.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순수히 진실을 말하는 듯한 뉘앙스가 짙게 풍겼다.

“내가 꺼내줬을 걸 너도 알지 않느냐.”

“미처 몰랐군요.”

“능력을 이렇게까지 과도하게 써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라는 말은 아니었다.”

“…….”

“일단 억제제를 먹고, 진정해라. 평소에 억제제 잘 안 챙겨 다니잖느냐.”

사소한 정보가 때로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지금처럼. 여명훤은 약을 잘 챙겨 다니지 않았다. 능력을 쓸 거라고 예상치 못한 장소에는 더더욱 가져오지 않았을 터였다. 명훤의 뒤에 있는 윤진이 앞으로 나서 입을 열려고 했으나 여명훤이 팔을 뻗어 서윤진을 제지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이 구절이 문득 생각나 여명훤이 차게 식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능력 하나 억누르지 못한다고 생각하셨다면, 제가 있는 곳까지 오지 않으셨을 텐데요.”

“…….”

“제가 테러범이고 이곳을 다 파괴한 범인이라도, 역설적으로 제가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하긴 하죠.”

테러를 일으킨 사람 곁에는 폭발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여지웅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여전히 오만함이 깃든 믿음은 있었다.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을 해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내주는 권력의 파편에 누구든 고개를 숙일 거라는 허황된 믿음.

‘가장 믿어서는 안 되는 걸 믿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너를 믿으니 다시 돌아온 거 아니냐.”

“…제가 정말 테러를 일으켰다면요.”

“말장난 하지 말고-!”

노기를 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여명훤도 더 이상의 말장난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제가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지금 이 아수라장 만든 사람. 제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콰, 콰, 콰앙!

쿠쿠쿠쿠쿵.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고 건물이 무너진 반동으로 먼지가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지반이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폭발 때문에 탈출구까지 막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고립되었다. 나가는 출구가 봉쇄된 것을 확인한 여지웅이 인상을 사정없이 구겼다.

“아직도 말장난할 셈이냐. 대체 네놈은…!”

“제가 한 거라고 여전히 믿고 계시나 보군요.”

여지웅은 스스로 패닉에 빠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믿었으나, 여명훤은 알았다. 처음 겪는 폭발은 여지웅을 동요시켰다. 원래 여지웅이라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여명훤이 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가 자제력을 잃지 않았다면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장소에 직접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테러를 지시했지 않느냐고 돌려 묻는 여명훤의 말에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을 게 자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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