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99화 (99/112)

#99

“당장 멈추지 못해? 나까지 죽일 셈이야? 패륜을 저지를 셈이냐고!”

여지웅은 지금껏 안중에도 없던 혈연까지 들먹이며 광분했다. 아무리 거대하다고 한들, 영원한 것은 없다. 그 진리를 비껴가는 것은 없다. 수많은 삶을 망가뜨린 여지웅조차도 비껴가지 못하는 것이다.

명훤은 이 순간을 아주 오래 기다려왔다. 여지웅이 추잡스럽게 바닥에 나뒹구는 꼴을. 그럼에도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눈앞에 드러난 여지웅의 실체가 조악하고 조잡한 노인네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러 명을 죽여놓고 제 삶은 너무도 소중해하는 역겨운 모습에 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여명훤은 끝까지 덤덤한 표정을 고수했다.

“여한올입니다.”

“…….”

“폭발 일으킨 사람.”

여명훤의 초연한 말투에 균열이 일어났던 여지웅의 가면이 완전히 깨졌다.

“갑자기 왜 그 이름이 나와? 분명….”

“우주언을 빼앗으면서 제압해뒀다는 보고를 들었겠죠.”

“…….”

여한올의 행방은 확실히 보고받았다. 분명 우주언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과정에서 여한올을 기절시켜 구속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얼굴을 보니 우주언은 그쪽에게 없는 모양이군.”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명훤이 단정 짓듯 말하며 그제야 단상에서 뛰어내렸다.

“뭐?”

“제압했다는 말을 들은 게 마지막일 거고.”

여지웅 밑에 있는 사람에게서 주언을 탈환한 후 연락이 끊겼다. 다시 빼앗겼다면 AGT 측보다는 여지웅 측이 다시 빼앗았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자신 측 사람이 여한올을 풀어줬다고 했으니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여지웅 측 연락이 원활하지 않다는 뜻이다.

퍼엉!

보좌관은 주변을 살폈다. 아직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다.

“…의원님. 대피하셔야 합니다.”

보좌관이 상황을 가장 먼저 파악했는지 여지웅의 어깨를 조심스레 부축하며 제 뒤로 이끌었다.

잠시 보좌관과 여명훤의 시선이 맞닿았다. 보좌관도 여지웅이 데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공격 1팀에 소속될 만큼 강력한 에스퍼였다.

두 사람이 마주하는 순간 보좌관은 깨달았다. 힘의 격차가 달랐다. 인간인 척했지만, 저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본체마저 파괴하려고 날뛰는 에너지를 품은 게 에스퍼다. 위험한 만큼 강력한 힘을 얻는다. 그 에너지를 감당하는 그릇이 클수록 등급이 높았다. 보좌관도 다른 S급을 숱하게 봐왔다. 여지웅을 따라 해외에서 내로라하는 에스퍼도 봐왔으니, 이 나라 안에서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해외에는 더한 괴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괴물들 위에 여명훤이 있었다.

‘뼈도 못 추리겠군.’

힘의 편린을 엿본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이제껏 눈치채지 못했던 건 여명훤이 제 힘을 의도적으로 감췄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수많은 에스퍼를 봐왔지만, 여명훤처럼 그릇의 깊이가 가늠조차 안 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끝없이 깊었다. 저런 에너지를 담고 다니는 걸 사람이라고 불러도 될까. 의도적으로 숨기다니. 그 누구에게 말해도 질색할 내용이지만 속에 능구렁이를 품고 있는 모습이 여지웅과 참 닮았다 싶었다.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보좌관이 돌렸던 고개를 틀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명훤과 시선이 마주쳤다.

퍼펑!

“아버지.”

스산한 목소리가 여지웅을 멈춰 세웠다. 건물 뒤편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여지웅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보디가드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여지웅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여한올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고, 표정은 지워져 있어 언뜻 보면 시체처럼 보였다.

“저를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으셨어요?”

“…….”

분노에 날뛰는 것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게 도리어 더 위험해 보였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혹은 폭풍의 눈이 고요한 것처럼.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감사 인사로 선물을 준비했어요.”

여한올은 마치 주머니에서 사탕이라도 꺼내듯 설레는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폭탄을 꺼냈다.

“제가 사실 폭탄을 설치해놓고 갔는데, 진짜 쓸 줄은 몰랐거든요.”

뒤에서 웅크리고 있던 일반인들이 여한올이 손에 쥔 폭탄을 확인하곤 경악에 빠졌다. 몇은 눈물을 왈칵 터트리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취약한 몇은 정신을 놓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제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이 사실을 관망하던 여명훤이 가볍게 으쓱이며 여지웅에게 말했다.

“너….”

“…….”

두 사람의 묘한 시선이 맞닿았다.

“너도 알았지. 참.”

여한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만 바보가 됐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여지웅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아왔던 세력이 대부분 여지웅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모멸감이 들었다. 흘끗 여지웅의 뒤에 일렬로 서 있는, 한때 자신의 멤버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것으로 여지없이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명훤이 경고까지 했는데.’

조금 더 의심했다면 여기까지는 안 왔을까. 몸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하지만 여지웅은 테러를 일으킨 범인이 여명훤이 아닌 여한올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예기치 못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놀라움보다는 여한올 정도야 얼마든지 제 손안에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상대라는 것에 안도했다.

“네가 하는 소꿉장난 하나에 손 얹었다고 화내는 꼴이라니 한심하구나.”

여지웅이 한숨을 푹 내쉬며 여한올이 한심하다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쓸모를 위해 들여왔는데, 쓸모를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이 일에 여한올의 의지는 조금도 없었는데, 부채감은 그만이 떠안았다.

“…아버지는… 단 한 번이라도 저를… 자식이라고 생각한 적 있습니까?”

여명훤조차 부르지 않는 호칭이었다. 여한올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렇게까지 최악으로 치달았음에도 여한올은 마지막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여명훤은 그런 여한올을 보며 혀를 낮게 찼다. 입맛이 썼다.

항상 여한올은 참았다.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나오기 전에도, 후에도 모두 자신이 부족한 탓에 무시당했다고 스스로를 자학했다. 비싼 돈 들였는데 S급이 되지 못한 실패작. 자신이 성공만 했으면 모든 게 완벽했을 거라고 믿었다.

“너를 집안에 들여와서 본 손해를 네가 메꿀 거 같지 않아 내가 나선 것뿐이다.”

끝까지 자신은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했다. 힘없는 웃음이 바람 사이로 흩어졌다. 자신은 최선을 다한 것뿐인데.

바닥이 무너져 무저갱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숨 막혀 죽으면 좋을 텐데. 여한올은 챙겨온 폭탄 개수를 세어 보았다.

“내가 경고까지 해줬는데… 결국 이렇게까지 되다니 유감이야.”

“…….”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몰랐어.”

“너한테도 뒤통수 맞아서 아직 얼얼하거든?”

여한올이 비릿하게 웃었다. 마지막까지 그 어떤 것도 쥐지 못하니, 허무한 걸 넘어서서 후련하기까지 했다.

“내 일순위는 처음부터 하나였어.”

그러니까 뒤통수를 때렸다는 말은 명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여한올도 모르지 않았다. 일순위를 잃은 후 생긴 틈에 파고든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맞는 사실이 때로는 더 얄밉게 들리는 법이다.

“하….”

여한올의 턱이 도드라졌다. 그와 다르게 여명훤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바깥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어온 건 없지만, 여한올도 이곳에 있는 것으로 우주언이 두 사람의 손에서 무사히 벗어났음이 증명되었다.

‘차라리 안전한 곳에 숨어있는 편이 나아.’

만약 우주언이 이곳에 있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주언을 두 눈으로 직접 봐야 이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명훤이 바라던 건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누리는 일상이었다. 우주언과 같이 출근을 하고, 같이 퇴근하고, 주말에 단둘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있다가 같이 밥을 먹는 삶. 누가 들으면 비웃을 정도로 소박한 꿈이었다. 그런데 이게 여명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돌아오면 주언의 앞에 있는 걸 모든 걸 치워버리고 안온한 생활을 해주겠다고….’

그렇게 결심했고, 그걸 실행하기 위해 이제껏 법의 테두리 안에 있으며 노력해 왔다. 주언은 평범한 것을 좋아하니까. 존재 자체가 유별난 자신과 같이 있으니 다른 모든 건 주언의 기준에 맞춰주겠다고 결심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

명훤의 시선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제 주변에 있는 적이 마침 여기에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한 가지 생각이 명훤의 뇌리를 스쳤다.

‘다 죽여버릴까.’

그러면 테러를 일으키려는 여한올도, 자신에게 목줄을 매려는 여지웅도 모두 이곳에서 끝일 텐데.

여명훤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이곳을 통째로 폭발시켜버린다면 증거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끓어오르는 날것의 야만성이 명훤을 부추겼다.

화륵.

손에 불을 품은 씨앗이 발화했다. 이 힘을 더욱 응축시켜 순간 폭발력을 늘린 후 던지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죽으리라. 일반인들도 있었지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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