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00화 (100/112)

#100

여명훤은 자신을, 제 주변을 희생해서 남의 안위만 지킬 정도로 선한 인간이 아니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은 주언과 같은 테두리 안에 있고 싶어서였기 때문일 뿐, 도덕의식은 남들보다 낮았다.

여명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가늠하듯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폭발을 일으키면 이 중에 한두 명 정도는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이었다. 여명훤도 자신의 힘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명훤이 포식자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여지웅의 가장 옆에 있는 보좌관, 여한올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서윤진의 몸이 일순간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주언이만 모르게….’

주언이의 눈만 가리면 세상은 여전히 전과 같을 것이다.

주언이 살아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렸던 때는 차라리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게 쉬웠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하지만 막상 주언이 돌아오니 감정이 오히려 들쑥날쑥해졌다. 방해하는 사람을 손쉽게 지울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치 달콤한 유혹 같았다.

드륵.

다행히 명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 전 밖에서 출구를 막고 있는 자재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 갇힌 사람들은 대부분 절망에 빠져 주저앉아 있었고, 남은 몇은 여명훤이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으나 여지웅이 대동한 보디가드들의 매서운 시선에 막혀 근처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구조인가 싶어 안에 갇힌 사람들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몰려갔다. 건물이 더 무너지는 소리가 아닌, 확실히 누군가 밖에서 이 안에 들어오려는 걸 확인한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피어났다.

“여기…! 구조대가 왔나 봅니다!”

“우리도 같이 치워요! 그러면 출구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드드득.

무너진 문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합심해서 문을 밀자 서서히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읏.”

건물 잔해를 옮기느라 피부가 긁혔음에도 움직임을 멈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발이 멈춘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드르륵.

곧 틈새가 사람 한 명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벌어졌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어…! 여명훤 에스퍼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후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은 구조대가 아닌 곽성관 기자였다. 곽성관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여명훤을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했다.

“뭐라고요? 아니, 왜 여기서 나와….”

그 뒤로 줄줄이 구영과 수희가 고개를 내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대치 상태인 다수와 여명훤을 보곤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 눈을 도로록 굴렸다.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에요? 야, 송구영. 저 앞에 있는 사람 기관 제일 위에 있는, 그… 정치인 아냐?”

수희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두 무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여지웅의 이름은 자세히 기억 안 나는지 구영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여지웅.”

“아! 맞아.”

“대한민국에 여씨가 흔하지 않은 거 알지 않아? 뉴스를 안 봐도 그 정도로 눈치 좀 채줘라.”

“…아!”

수희가 그제야 여지웅과 여명훤의 관계를 눈치채곤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곤 곧 살벌한 분위기에 두 사람은 나란히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도 없는데 살벌하네….”

던전에서 몬스터와 맞닥뜨렸을 때보다 더 살벌한 분위기에 수희와 구영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런 공기에 익숙하지 않은 곽성관 기자는 이미 다리에 힘이 반쯤 풀려 있었다.

세 사람은 구영의 지도하에 옆을 빙 돌아 여명훤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명훤이 얼마나 괴물 같은지 잘 알고 있지만, 일반인을 상대로 능력을 쓰는 건 불법이었다. 육체 능력 또한 일반인과 다르지만, 능력을 배제하고 보면 여명훤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상대도 만만찮게 싸움 잘해 보이는데.’

능력을 안 쓰고 싸워본 적도 없고, 사람들을 상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지능이 있는 몬스터를 상대해본 적 있다고 해도 사람과 견줄 수 없었다. 구영과 수희가 상대했던 지능이 있는 몬스터들은 습성만 알아내면 공략하기 쉬웠지만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테니까. 여명훤의 옆에 서서 공격 태세를 갖춘 구영이 아랫입술을 축인 후 명훤에게 물었다.

“주원 형은요?”

“아직.”

“아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일 알아야 되는 사람이 누군데….”

구영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슴을 따끔하게 찌르던 죄책감이 다시금 제 존재를 알려왔다. 여명훤이 자신보다 훨씬 더 나으니까, 믿음직스러우니까.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구영의 언성이 높아졌음에도 명훤은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너희는 왜 이곳에 있지?”

가장 애가 달은 건 여명훤 쪽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것만 믿고 참고 있었다. 명훤이 말을 아끼는 모습에 구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른 일반인들은 저희가 오면서 대피시켰어요. 밖에 구조대가 온 것 같긴 한데…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저희가 안까지 살펴보기로 하고 왔어요.”

건물은 ‘ㅁ’ 모양으로 세워져 있었고, 여명훤이 연설한 광장은 그 가운데 있었다. 네 면이 건물로 막혀있고, 다 반쯤 붕괴되어 있으니 부서진 건물 내부에 구영과 수희가 미처 찾지 못한 부상자까지 생각하면, 밖에서 중심부까지 오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터였다.

“잘했다.”

명훤이 가볍게 구영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주언과 연결된 구영의 존재가 점점 고여가던 명훤의 생각을 환기시켰다.

찰칵.

뜬금없는 셔터음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어. 하하… 플래시 소리가 유독 크네요. 카메라 바꿀까.”

대립하고 있는 여지웅과 여명훤의 구도를 보곤 심상찮음을 느낀 곽성관이 무작정 핸드폰 카메라를 눌렀던 모양이었다.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쏠린 후에야 위기감을 느꼈는지 어색하게 웃다가 여명훤 뒤로 쏙 숨었다.

“하나같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는 거냐.”

“내 쓸모는 여기서 당신을 죽이는 것으로 끝내는 거로 하죠.”

여지웅이 가지가지 한다며 혀를 쯧 찼다. 그는 이미 안심하고 있었다. 제깟 게 나를 어떻게 하겠냐는 무시가 표정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여한올은 그대로 대치하고 있는 여지웅과 여명훤 중간 지점에 섰다. 혈혈단신으로 중간에 선 여한올의 모습은 몇몇에게 강하게 각인되었다.

여명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여한올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 두 사람 사이에 어쭙잖은 우정 놀음을 하기엔 당장 눈앞이 상황이 급급했다.

쿠르릉, 짙은 색의 구름이 으르렁거리며 곧 한바탕 비가 쏟아지리라는 걸 예고했다.

“여명훤.”

“…왜.”

“네가 정말 살벌하게 나오면 무섭거든?”

“…….”

“내가 너한테 방해되는 한 명쯤은 없애줄 테니까. 그러니 그걸 나에게 충고를 한 값으로 치자.”

“그래. 먼저 가지.”

이상한 계산법이었다. 명훤은 대답하지 않았고, 여한올은 입으로 폭탄 안전핀을 제거하고 여지웅 뒤편으로 던졌다.

콰앙.

묵직한 폭발음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던 건물의 잔해의 파편이 무기처럼 사방에 튀었다.

털썩.

“윽.”

“막아!”

“의원님!”

뒤쪽에 서 있던 보디가드 몇이 심하게 다쳤는지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쿠당탕.

보좌관이 여지웅을 끌어안고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여한올은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품 안에 있던 단검을 꺼내 들어 쉴 새 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윽.

팟!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건 그 전에 설치해뒀던 폭탄이고, 지금 남은 건 자잘한 폭탄뿐이다. 사람을 제대로 죽이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가자.”

여명훤은 여지웅의 사람들과 대치 중인 여한올을 흘끗 본 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저희 안 도와줘도 돼요?”

구영이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나가떨어지는 잔인한 장면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실력이 비등해 보이지만 곧 어느 쪽이 우세해질지는 자명해 보였다.

“우리는 그냥 휘말린 거니까, 빨리 안전한 곳에 가야지.”

구영의 말에 대답한 건 명훤이 아닌 곽성관이었다. 곽성관이 민간인은 심장이 떨려서 죽을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저씨 떨리는 사람치고 몰래 폰으로 사진 잘 찍는데요?”

어느덧 곽성관의 뒤에 선 수희의 지적에, 곽성관은 안 찍었다는 발뺌은 안 통한다고 여겼는지 부정하는 대신 펄쩍 뛰었다.

“이렇게 개고생만 하고 사진 하나 못 건지는 경험은 다신 하고 싶지 않거든?”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꼴이네요.”

이곳으로 함께 오면서 조금 허물없어진 세 사람이 투닥투닥거렸다. 방금 일반인들이 빠져나갔던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 사람 카메라랑 폰 압수할까요?”

구영이 아무 말 하지 않는 명훤의 눈치를 보며 묻자 곽성관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에게 겨우 내주어진 빵 쪼가리를 소중하게 껴안듯 제 핸드폰과 카메라를 껴안은 곽성관이 언성을 높였다.

“어허-! 나는 여명훤 에스퍼에게 고용된 사람이야. 도와주고 싶으면 애송이 헌터 둘만 가. 나랑 여명훤 에스퍼는 갈 거야.”

“…진짜예요?”

그냥 기자인 줄 알았는데. 구영과 수희가 못 믿겠다는 듯 바라보자 곽성관이 희망찬 눈빛으로 명훤이 긍정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명훤의 시선은 뒤에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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