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뭘 그렇게 보시는… 저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여지웅은 약통에서 약을 한 움큼 집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 중, 부상이 덜한 사람들의 입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아까 여지웅이 여명훤에게 쓰려던 폭주제였다. 즉효성이 아닌 약이지만 과다복용을 하면 말이 달라진다.
“정말 제정신 아닌 짓.”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을 자신이 직접 죽이느니 못한 처사였다. 폭주제는 강제로 원래 쓸 수 있는 힘을 배로 끌어낸다. 에스퍼가 약을 먹으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힘의 흐름에 먹혀 폭주하는 수밖에 없다. 짧게 요약하자면 길고 고통스럽게 이지를 잃고 날뛰다 죽는다.
“네?”
“피해.”
파앙!
이대로 여기서 쉽게 퇴장하는 건 글렀다. 순식간에 여한올의 몸이 날아와 바닥에 처박혔다.
쿨럭.
여한올의 몸이 바닥에 사정없이 내리쳐지고, 그 반동으로 그의 허리가 뒤로 꺾이며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스스슷-
구영과 수희가 상황 파악하기 전 이마에 핏줄이 곤두서고 실핏줄이 모두 터진 보좌관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눈이 붉게 변한 보좌관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였다.
“아악! 다른 사람들도 이상해. 다쳤는데 막 움직여.”
수희와 구영에게도 폭주제를 먹은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퍽.
침을 질질 흘리며 명훤의 뒤를 덮쳤던 사람들은, 그의 주먹에 맞고 벽에 처박혔다.
“으르르….”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팔이 기괴하게 꺾여있음에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츠츠츳.
명훤의 몸에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막느니 한 번에 처리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 이지를 잃은 상대를 어설프게 봐주다가는 시간만 잡아먹힐 테니까.
탓.
“그렇게 속았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어?”
막아선 건 여한올이었다.
“내가 미련 맞게 보이겠지만, 그래도 한 번이라도 대화는 해봐야지.”
명훤의 물음에 여한올이 쓰게 웃었다. 이러다가 다시 한번 뒤통수 맞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당장은 해명이라도 들어야 하니까, 여명훤의 손에서 죽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가 대장이었는데. 내가 너무 못 미더워서 배신한 거면… 내 잘못도 있는 거잖아.”
“미련 맞기는.”
노골적인 명훤의 비난에 여한올은 무슨 말을 더 하는 대신 뒤에서 달려오는 남자를 막아냈다.
“아, 아, 아니. 지금 여 의원이 아직 정식으로 출시된 약물이 아닌 불법 약물을 강제로 투여한 겁니까? 여 의원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
무서움과 동시에 특종을 잡았다는 흥분에 콧김을 내뿜는 곽성관이 녹음기에 대고 현재 상황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구영과 수희는 나란히 서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몬스터는 클리어하면 되지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듯 두 사람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기절시켜.”
여명훤은 구영과 수희를 상대하는 남자의 뒷목을 아주 강하게 내리쳤다.
푹.
깨어나면 힘들긴 하겠지만 목숨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아… 아니 자기 부하한테 이상한 거 먹여도 되는 거예요?”
“어?”
수희가 환멸 난다는 듯 이를 짓씹었다. 구영도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시야에 있어야 하는 한 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정말 쥐새끼같이 빠져나갔어.”
여명훤이 이를 부득 갈았다. 하지만 쫓아갈 새도 없이 폭주한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다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
여지웅은 모두가 폭주제에 휘말린 사람들에게 정신을 팔린 사이 자리를 떴다.
‘일단 돌아가기만 하면….’
그러면 자신의 승리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답지 않게 당황한 게 패착이었다.
“여명훤은 확실히 내 편으로 회유할 수 없으면 처분하는 게 맞겠어.”
다른 소모품과 달랐다. 그건 확실히 자신의 핏줄을 이어서 가치 있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도 여지웅의 마음속에서 여명훤의 가치가 올라갔다. 자신의 의중을 꿰뚫는 것도, 계략을 꾸미는 것도 나무랄 곳 없었다. 명훤이 들으면 질색했겠지만 젊은 날의 자신 같았다.
여지웅은 도망치면서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피가 끓었다. 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으나, 자신이 이렇게 궁지로 몰린 건 처음이었다. 모두 다 여명훤이 짠 판은 아니었을 테지만, 때로는 운이 가장 강력한 능력이 되기도 했다.
“하하… 언제부터지?”
여명훤이 자신의 아래에 들어온 건 순전히 자신의 수완이라고 생각했었다. 인질을 잃은 여명훤의 목줄을 채운 건 윤재가 맡아두었던 주언의 짐이었다.
‘그 짐. 저한테 넘겨주세요.’
고작 그런 쓸데없는 것에 미련을 갖는 건 못마땅했다.
‘고작 쓰레기 아니냐.’
‘…그래서 싫다는 소리십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갖고 싶다고 하는 물건이면, 적어도 여명훤에게는 가치가 크다는 뜻이었다. 고작 짐 몇 개로 명훤을 부려먹을 수 있다면 여지웅으로서는 이득이었다.
혹시 몰라 짐을 여명훤에게 인수하기 전에 다른 가치 있는 물건이라도 나올까 전문가를 통해 의뢰했으나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아무런 가치 없는, 그저 사용감이 있는 물건과 옷들뿐이었다.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때에는 네 마음대로 살려무나.’
죽은 사람이 되돌아올 리 만무하므로 명백한 조롱이었으나 지금은 그 조롱이 오히려 독이 된 꼴이었다.
“새끼라도 호랑이는 호랑이었던거지.”
어차피 사길드 합법화가 된다고 뭐라고 되는 양 구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결국 그럴듯하게 대외적으로 사길드만 합법화됐을 뿐이지 전과 다를 바 없을 터였다. 결국 윗선의 말 놀음일 뿐이었다.
“다시 인질만 잘 잡으면 어떻게든 목줄을 채울 수 있겠어.”
처분하기로 했지만 너무 아까웠다. 여명훤의 능력도, 운도, 모든 게 자신이 준 것이니 그를 이용하는 것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우주언이 와서 모든 게 틀어졌지만, 이제는 우주언을 이용해 모든 걸 바로잡으면 된다. 쓰레기들에게 맡겼던 게 문제였다. 만약 보좌관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에게 주언의 신상을 맡겨야겠다 싶었다.
탁.
여지웅의 걸음은 앞에 나타난 이호윤에 의해 멈춰졌다. 진작 대피한 줄 알았는데, 이호윤도 폭발에 휘말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듯했다.
“호윤아. 마침 잘됐구나.”
여지웅이 드물게 이호윤을 반겼다. 우주언이 돌아온 이상 이호윤은 쓸모없는 패가 되었지만, 이곳에서 나가는 데 유용하게 쓰일 터였다.
“의원님.”
이호윤이 걸음을 재촉해 여지웅을 부축했다.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괜찮으냐.”
아무런 관련 없는 힘없는 노인네인 척 힘없이 웃으며 이호윤의 부축을 받으려던 여지웅은 이호윤이 들고 있는 걸 보곤 멈칫했다. 이호윤이 자신을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버렸다가 주워도 아무 말 없어야 하는 쓰레기였다.
“쓰레기를 다시 줍는 게 아니었는데.”
곧 있을 미래를 짐작한 여지웅이 신랄하게 말했다. 이호윤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가끔 버린 쓰레기를 멋모르고 밟았을 때 더 아픈 법이거든요.”
푹.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유리 파편이 흉기가 되어 여지웅을 찔렀다.
“한 번 버리는 것도 쉬운데, 두 번 버리는 건 얼마나 더 쉬울까요.”
목소리에 짙은 물기가 묻어나왔다. 이호윤은 이제 지쳤다. 전전긍긍하는 삶도, 고작 여지웅의 뜻대로 안 됐다고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삶. 모든 게 환멸 났다. 어차피 이대로 집에 돌아간다고 한들 집안에서도 쓸모없는 인간 취급만 당할 것이다.
이호윤은 사실 여명훤과 여지웅이 대치할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있었던 덕분에 여명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우주언까지 되돌아왔다니. 멀리서 들었고, 아직 사실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우연찮게 들은 소식은 이호윤을 구석으로 몰아가기 충분했다.
홀로 건물 안에 남은 이호윤은 혼자서 죽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나가면 약혼은 정해진 수순처럼 파투날 테고, 또 버려지고, 집안에서 자신을 얼마나 버러지 취급할지. 생각만 해도 속이 쓰렸다.
그러다가 여지웅과 마주쳤다. 마치 이것이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호윤은 여지웅을 데리고 가기로 선택했다.
“…너… 크억….”
이런 보잘것없는 장소에서, 그가 그토록 무시하던 자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건 여지웅에게 있어 최악의 결말일 테니까.
뚝. 뚝.
여지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가 회색 콘크리트를 뜨겁게 적셨다.
**
덜컹.
“여기도 막혔네.”
문은 그대로 있어서 열릴 줄 알았는데, 위층이 무너져 문이 지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억지로 열면 더 위험해질 뿐이다.
폭발로 인해 길이 다 막혀, 안에 들어와 한참을 돌아다니며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찾느라 시간이 제법 걸렸다.
제대로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은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났다. 혼자 움직여서 효율이 나쁘기도 했지만, 피곤에 전 몸이 평소보다 기능을 하지 못해서 더욱 더딘 것도 있었다.
맞게 가고 있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으나 주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갈수록 피해 정도가 극심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는 도중 일반인을 만나지 않아 걸음이 묶이지 않은 것이다.
지지직.
“심각하네.”
위에 전등이 꺼졌다가 다시 켜지길 반복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