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쨍그랑!
“어?”
갑작스럽게 들린 유리 깨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앞에만 신경을 집중하느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갔을 때 주언은 가장 먼저 코끝에 닿는 익숙한 냄새에 걸음을 멈칫했다.
음습하고, 비릿한 냄새.
‘피?’
피였다. 냄새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자 곧이어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렸다.
“호윤 씨?”
그리고 그곳에는 자신의 후임으로 들어와 같은 1팀에 있었지만, 유일하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호윤이 서 있었다.
“주언 씨. 살아있다고는 들었는데….”
진짜이지 않기를 바랐던 사실을 이제야 피부로 느꼈는지 이호윤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언뜻 흐느끼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오랜만이에요.”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다니. 제가 운이 참 나쁜 것 같아요.”
이호윤은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손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언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라 뒤늦게 이호윤의 손이 피에 젖어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유리 파편까지도.
시야가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지웅이 바닥에 쓰러져 벌레처럼 몸을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거친 호흡 사이로 여지웅이 무슨 말을 내뱉었으나 발음이 뭉개져 나왔다.
“경, 경찰에… 신고…윽….”
퍽.
이호윤이 귀찮다는 듯 여지웅의 배를 발로 찼다. 정황상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탔던 게 아닌가?
“…대체 무슨….”
여기서 이호윤을 만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차라리 유리 파편이 박혀서 빼냈다고 변명이라도 했다면 쉽게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호윤은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주언이 생각하던 여지웅은 여명훤도 그의 어머니도, 윤재도 휩쓸리게 한 거대한 파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그는 인적 드문 바닥에 누워서 죽어가는 노인일 뿐이었다. 대단한 존재라고 해서 죽음마저도 그러지 않을까 했던 막연한 생각들이 부서졌다. 대단한 존재의 허탈한 죽음. 이런 의외성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두 나약할 뿐이다.
“저쪽으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빠져요.”
“네?”
“거기에 여명훤 있어요.”
이호윤이 턱짓으로 앞 방향을 가리키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전과 다르게 야위고 신경질적인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때보다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움찔.
“내 말 못 믿겠어요? 아니면 내가 여기서 뭐 더 하는지 구경이라도 하게?”
“…아닙니다….”
“우리가 피차 이런 상황에서 멈춰 서서 인사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호윤은 이대로 같이 죽어버릴 셈이었다. 들켰으니 그 생각은 더욱 견고해졌다.
주언도 그 묘한 공기를 읽어내고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더 있어야 할까. 그를 데리고 살려야 할까. 자신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거라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주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 외면한다면. 명훤을 위해 자신의 정의를 한 번만 버리면….
“주언아…!”
뒤에서 쫓아왔는지 숨을 헐떡이는 윤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주언이 있는 곳에 도착한 윤재는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호윤과 여지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재는 많은 걸 묻지 않았다. 이호윤이 충동적인 감정에 일으킨 복수겠지만,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경… 경찰에….”
윤재는 주언이 하려던 말을 눈치채곤 그의 말허리를 끊어냈다. 그러곤 결심했다는 듯 주언의 어깨를 떠밀었다.
“너 먼저 가.”
“뭐?”
“너 여기까지 여명훤 보려고 온 거잖아.”
“너는?”
“나는 여기 있을게. 너 먼저 가.”
주언은 흘끗 이호윤 쪽을 바라보았다.
“너 혼자…? 같이 가자.”
“아니. 너 먼저 가.”
“윤재야.”
“명훤이한테 안 갈 거야?”
강윤재가 드물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언의 고민은 짧았다. 명훤이 이제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됐으니, 주언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
주언이 윤재의 귓가에 속삭이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호윤은 그런 우주언을 잠시 시선으로 좇다 곧 윤재를 바라보았다.
“왜 구금당했나 했는데… 이유 대충 짐작 가네요.”
챙.
이호윤은 쥐고 있던 유리 파편을 바닥에 집어 던지곤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둥에 등을 대고 고개를 젖인 이호윤은 홀가분해 보였다. 바르작거리던 여지웅의 움직임은 어느덧 멈춘 후였다.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여기 남아서 뭐 저 제압해서 포상금이라도 받으려고요?”
“…저 신고 안 할 겁니다.”
주언에게는 제압할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윤재는 이호윤을 고발할 생각이 없었다. 시답잖고, 시시한 죽음이었다. 이제껏 시달렸던 사람들이 허탈해질 정도로 손쉬운 죽음이었다. 더 고통받다가 죽는 편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이런 죽음이 여지웅이 가장 바라지 않는 죽음이겠지.’
아무도 없이 외롭게,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시시하게 맞은 죽음.
여지웅의 곁에 있으며 몇 번 안면을 튼 사이긴 하지만 제대로 대화해본 적 없는 관계였다. 주언이 얽혀있어 처음에는 그렇게 좋게 볼 수는 없었으나, 같은 개 위치에 있는 만큼 동병상련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어울리는 비참한 죽음이기도 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언제든 다시 버리고 주울 수 있는 사람이었던 이호윤에게 죽임을 당했다니 통쾌하기도 했다. 비열한 대리만족이었다.
“그쪽 그래도 여지웅이 제법 뒤봐 준 걸로 아는데.”
“언제 버려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관계기도 하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적 많은 노친네였네.”
“…그러게요. 저야말로 이렇게까지 원한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있는 집안사람이잖아요.”
“있는 집안이라 자식들이 많아 나 하나 없어져도 눈 하나 깜박 안 할 사람들이라서.”
“아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어도 바로 이해가 갔다.
“그럼 왜 남아있겠다고 한 건데요?”
“그쪽이 자살할까 봐.”
이호윤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곧 눈매가 미세하게 휘었다.
**
이호윤이 말한 대로 가자 막힘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뒤로 넘어가는 통로가 막혀 멈칫하는 사이, 복도 옆에 난 틈새로 폭발 소리가 들렸다.
쾅!
지반이 흔들릴 정도의 폭발 소리가 무섭긴커녕 그리워서 눈물이 났다. 저 틈 너머에 명훤이가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명훤아….”
드디어 만난다는 생각에 벅차올랐다. 주언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우주언 씨!”
틈 안으로 들어와 기둥 뒤에 숨어있던 곽성관이 우주언을 가장 먼저 발견하곤 비명 지르듯 주언에게 달려갔다.
“어…?”
갑자기 자신에게 덤벼들 듯 다가온 곽성관을 본 주언의 걸음을 멈췄다. 곽성관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왜 기자님이 여기 계세요?”
“지금 저 안에서…! 여명훤 능력자가…!”
“네?”
횡설수설 말하던 곽성관이 곧 흡, 하고 숨을 멈추곤 숨을 길게 뱉어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에스퍼 여러 명이 폭주제를 강제로 섭취하게 돼서 폭주했는데 일대 다수 상황이라… 여명훤 능력자 상태가 안 좋습니다.”
“네?”
“일단 다른 두 명이 여명훤 능력자 쪽에 붙어서 도와주고 있긴 한데….”
말끝을 흐린다는 건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다는 뜻이다.
“제가 빨리 가볼게요.”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전투하는 상황에 예고 없이 들어가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곽성관에게 상황 설명을 들어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을 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주언은 잠시 명훤을 만난다는 즐거움을 억눌렀다. 모두를 가이딩 하기는 힘들었다. 폭주제를 맞은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그냥 폭주하는 것과 원리는 비슷할 것이다. 고로 가이딩을 평소보다 길게 하면 괜찮아질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이호윤 씨한테 같이 오자고 할 걸 그랬나.’
당장 급하니 방금 만난 이호윤의 손마저 아쉬웠다.
“아. 맞다. 저번에 잊고 간 물건이요!”
곽성관이 서둘러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약통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주언이 낚아채듯 곽성관이 건넨 약통을 건네받았다.
‘이거는 윤재가 줬던….’
윤재가 따로 챙겨줬던 억제제였다. 옷을 바꿔 입는 도중에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고마워요!”
억제제까지 있다면 자신 혼자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지 몰랐다. 주언은 지체하지 않고 틈 사이를 빠져나갔다.
**
틈 사이로 들어가자마자 느껴진 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열기였다.
콰쾅!
강한 파열음의 여파로 일어난 먼지바람에 주언은 한 팔로 눈을 가렸다. 주언은 약통을 세게 쥐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명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건물 잔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몇 명이 그 잔해를 이용해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퍼어억.
쿵.
한 명이 공격에 맞았는지 그대로 주언 바로 옆에 있는 벽에 사정없이 처박혔다. 벽에 박혔던 사람이 잔해를 헤치고 나오며 이를 갈았다.
“아니. 실력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데요!”
“구영이?”
“형?”
잔해를 헤치고 나온 구영이 바로 옆에 서 있는 주언을 보곤 멈칫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형은…! 지금 나 만나자마자 할 말이 그거야?”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타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