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구영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아. 그제야 마지막에 자신이 납치당하기 전 같이 있었던 구영이 떠올랐다. 아무 일도 없던 건 아니었고, 얼버무릴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설명하기엔 길어질 것 같아 할 수 있는 말은 사과밖에 없었다.
“미안.”
“형이 왜 사과를 해. 괜찮아? 어떻게 된 일인지 나중에 설명해줘.”
“응.”
주언은 지금까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구영의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말을 아꼈다. 곧이어 다른 한 명이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듯 넘어졌다.
“저기에 있는 사람 수희야?”
“응.”
“수희는 왜 또 여기에 있어.”
“여기 자원봉사 왔다가….”
주언의 시선은 쉼 없이 싸우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곧 어렵지 않게 시야에 명훤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서윤진과 명훤의 뒤를 지키는 사람이 보였다.
“여한올?”
여한올이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도착한 여한올은 여명훤과 대치하고 있지 않았다. 여한올이 뒤통수를 두 번 맞은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여명훤과 손을 잡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여한올은 명훤에게 강한 유감을 표했다. 자신을 납치할 정도로.
‘일단 같이 싸우고 있는 건가. 적의 적은 아군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여명훤은 비효율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명훤의 실력을 알고 있는 주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힘을 과하게 쓰곤 있지만, 일격필살로 상대를 죽이려고 하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폭주제를 먹은 사람들은 멀리서 육안으로 봐도 상태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팔이 부러졌는데도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고 덜렁거리는 팔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주언은 괜히 제 팔을 매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자의로 먹었든, 타의로 먹었든 폭주제가 개발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망가지는 몸의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능력에 먹혀, 기운이 잠식해 죽을 때까지 공격만 하게 되니까.
폭주제 없이 폭주한 에스퍼는 여럿 있었다.
“크르르.”
“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폭주제를 먹은 거야?”
그리고 폭주한 에스퍼가 살아남을 확률은 10%조차 되지 못했다. 불법적인 루트로 폭주를 촉진시키는 약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육 참고용으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 약마저도 며칠에 걸쳐 폭주가 진행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켜야 할 사람이 많다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 안에 있는 모두를 가이딩 해줄 수는 없었다.
가이딩 효율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탁, 탁.
퍽!
“윤진 씨, 저쪽 막아요!”
“성가셔 죽겠네요.”
퍽.
“절대 죽이지 말아요.”
“그렇게 무르게 굴다가 다 죽는 거 몰라요?”
서윤진이 신경질적으로 여한올에게 대꾸했으나, 그는 답하지 않고 공격을 막는 데 주력했다.
일단 공격해 오는 능력자들에 맞서서 얼떨결에 한 팀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서로를 도와줄 의리는 조금도 없는 관계였다.
‘무슨 생각인 거야, 명훤 씨는.’
하지만 여명훤이 잠자코 도와주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챙.
명훤의 총 앞부분이 거침없이 찌르는 창과 맞닿았다. 정확히 힘을 배분하여 조금도 밀리지 않은 채로 폭주한 에스퍼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든 명훤이 구영 쪽을 바라보다 주언을 발견하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촤촤촤촷-!
서윤진이 제 능력을 다리에 실어, 몇 배로 빠르게 움직여 명훤 쪽 앞에 섰다. 능력을 몸 일부에 걸면 그만큼 소모되는 힘이 컸다.
“어디에다가 정신 빼놓고 있는 거예요!”
명훤의 옆구리를 노리던 검을 튕겨낸 서윤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적했음에도 바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제야 서윤진의 시선도 따라가 주언에게 닿았다. 주언이 먼저 어색하게 고개를 한 번 꾸벅이자 서윤진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주언 씨! 무사하네요!”
탁.
“지금 인사할 때야? 조심 좀 해!”
여한올은 주언 쪽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소리쳤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반해, 여명훤과 서윤진이 도와주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들을 보호하듯 가장 선봉에 나서 있었다.
“읏….”
그래서 가장 먼저 한계가 온 것도 여한올이었다. 그가 낮게 신음을 토해냈다.
퉤.
한올이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기에 한계였다. 여한올의 주변 공기의 밀도가 높아졌다. 폭주의 전조였다. 밀도 높은 공기에 스스로의 숨마저도 먹히는 순간 폭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짓에 의미가 있나.”
팔이 부러져도 공격하기 위해 돌아오는 능력자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의 범주로 볼 수 없었다. 이성을 잃고, 파괴만을 원하는 건 몬스터나 다름없지 않나.
아주 혹시 여한올 쪽에 주언이 다시 잡힐 가능성을 염려해서 잠자코 원하는 대로 해줬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쟤들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서, 나도 진심이 아니었던 건 아니니까.”
“…….”
여한올의 목소리가 썼다. 미련이고, 아집이었다. 알았다. 이대로 그들을 말살시키고 한 명만 살려두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나 염치없는 거 아는데… 나한테는 이 사람들밖에 없었어.”
그래서 변명이라도, 사과라도 듣고 싶었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우주언이 위험해진다고 판단되면 내 마음대로 하겠어.”
“그래.”
여기서 더 바랄 수는 없었다. 여명훤의 선택지의 가장 우선권은 항상 우주언의 차지였으므로.
세 사람이 다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실력의 차이는 명백했지만, 몸이 망가져도 상관없는 능력자를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려고 여지웅 밑에 들어갔냐?”
퍽.
여한올의 공격에 폭주한 능력자가 무기를 떨어트리고 바닥에 처박혔다. 강하게 공격당했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능력자는 다시 몸을 일으켜 주먹을 뻗었다.
“으으….”
이성을 잃어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한데, 여한올은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했다.
‘그냥 내가 서 있을 자리 만들려고 했던 게 잘못인가.’
여한올은 항상 선택받지 못했다. 모친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여지웅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여명훤에게서 선택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 자신이 완전하다고 여겼던 팀에게마저 선택받지 못했다.
항상 밀려나는 삶. 해파리처럼 파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물결에 맞춰 살아갔더라면 눈앞의 상황보다 나은 상황을 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허무함에 불태우는 마지막 불꽃이라는 게 느껴졌다. 이 불이 다 꺼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사길드를 만들 수 있으니, 테러 조직에 들어올 사람도 적으려나.’
새로운 사람을 들이고, 또다시 여지웅에게 대항하고, 능력자들에게 선택권이 있는 자유를 주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멈칫했다. AGT를 만든 목적은 자신처럼 억압되는 능력자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을 향해 계속 일직선인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니 굽이 굽이진 길을 걷고 있었다.
치직… 지직….
몸 안의 흐르는 힘이 제어가 되지 않으며,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무거워진 공기가 목을 조여왔다.
촤악.
방심한 아주 찰나의 순간 묵직한 공격이 한올의 목을 향했다. 재빨리 막아 목은 보호했으나, 공격을 막은 팔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읏….”
피부가 종잇장처럼 찢기고 그 사이로 붉은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가장 가까이 있던 수희가 비틀거리는 한올을 밀치고 공격을 막아냈다.
그런 전투 장면을 지켜보던 주언이 명훤 쪽을 향해 발을 내딛자, 옆에 있던 구영이 주언의 팔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왜 그래?”
“안으로 들어가.”
구영이 억지로 건물 안에 주언을 밀어 넣었다.
“구영아.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뭐가.”
“주언 씨?”
곽성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으나, 곧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에 그대로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형이 나가서 뭐 하려고.”
“지금 다들 능력 무리하게 쓰고 있잖아.”
“그런데?”
“나한테 억제제 있어. 그러니까 이걸로 어떻게든 상황 무마하려고 해봐야지.”
“형이 저기에 끼어들면 방해만 돼.”
상처입히려고 한 말이 아니라, 이 상황에 가장 필요한 건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구영이 약통을 흘끗 내려다본 후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이거 기관에서 주는 약 아니잖아.”
“…….”
“이 약 어디서 났어?”
“…….”
아마 지금 이 폭주제를 개발한 사람한테, 라고는 말할 수 없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정말 억제제 맞아?”
“…….”
단박에 그렇노라고 말해야 하지만, 입술이 곧장 떼어지지 않았다.
“저 폭주제 여지웅이 강제로 먹인 거야.”
“…….”
“내가 뉴스에서 형 애인 상 탈 때, 여지웅도 같이 나오는 거 봤었거든.”
“…….”
“아니지?”
얼굴에 혈관이 다 터져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턱 사이로 줄줄 흐르는 침, 몸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속도. 구영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언도 내심 저 폭주제를 만든 게 윤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주언이 생각할 시간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으읏….”
어서 가이딩을 해줘야 했고, 이 약을 먹여야 했다. 명훤 쪽으로 다가가려는 찰나, 폭주한 에스퍼의 시선에 주언이 담겼다.
“명훤아-!”
주언이 부른 순간 에스퍼가 공격하려는 궤도를 틀어 주언 쪽을 향했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주언의 시야가 그림자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