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04화 (104/112)

#104

“…명훤아?”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주언은 자신을 감싼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공격을 막았지만, 가빠진 숨에서 사납게 일렁이는 공기가 느껴졌다. 주언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 노기를 띤 명훤의 목소리가 주언을 향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건데.”

“네가 여기에 있잖아.”

“도망쳤으면 안전한 곳에 가 있지, 왜 여기까지 오냐고!”

“난 도망치기만 해야 돼? 도움이 하나도 안 되니까?”

주언이 지지 않고 쏘아붙이자, 명훤이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어야 했다. 이제껏 만나지 못했던 시간만큼 보답받는 날이었다.

그 어떤 것 하나 제대로 된 건 없어서 화가 났다.

“아니… 하… 주언아.”

“나는 항상 네 이런 점이 싫었어.”

주언의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명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네 나름대로 배려한답시고 참고, 말하지 않는 것. 나중에 알았을 때의 자신의 심정이 어땠을지 명훤은 조금도 모를 것이다.

“네가 나 때문에 힘든 일 겪는 게 싫은 거야.”

“내가 너 희생해서 나 편하게 해달래?”

우리는 오래 사귀었지만, 어쩌면 서로에 대해 가장 모르는 사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어려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헤어지기 싫어서. 우리는 서로 참아왔다. 참으면 참을수록 우리 사이는 곪아가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성숙하지 못했다고 넘길 수 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떨어져 있었더라도 우리의 시간은 흘렀다. 예전 같은 관계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고여 있을 수도 없으니 우리는 나아가야만 했다. 우리가 서로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언아. 난 이걸 희생이라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테러에 휘말렸던 것도, 납치됐던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명훤은 주언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언은 평범한 걸 좋아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남들과 비슷하게 맞춰서, 무난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네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나 때문에 네가 원하는 걸 포기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왜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고서야 서로의 진심을 내보일 수 있는 걸까.

“그럼 나는?”

“…….”

“나는 네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아?”

“…….”

“보호받고, 보호해야 하는 관계 아니야. 우리.”

“…….”

“네가 나한테 숨기는 게 더 상처인 걸 왜 아직도 몰라. 명훤아.”

주언도 같이 참고 있었던 거였다. 박수도 두 손으로 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주언의 쓴 목소리에 명훤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언을 내려다보았다. 이 와중에도 긴장한 듯 꿀렁이는 목울대가 귀여워 입 맞추고 싶었다.

“명훤 씨!”

서윤진이 비명을 내지르듯 소리를 지른 후에야, 명훤은 지금 전투 중이라는 걸 떠올려냈다.

“갑니다. 주언아 우리 나중에… 읏….”

주언이 뒤를 돌려던 명훤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이끌었다. 순식간이었다. 열기에 메마른 입술 위로 주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명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

싸늘한 여지웅의 시체 옆 기둥에 등을 기댄 이호윤이 아직도 가지 않고, 맞은편에 서 있는 강윤재를 바라보았다.

나이대가 있는 남자가 주언에게 잊고 간 물건이라고 우렁차게 소리치는 것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아. 맞다. 저번에 잊고 간 물건이요!”

이 말을 끝으로 주언이 나가는 소리와 다른 누가 건물 안에 들어오는 소리, 그리고 곧 익숙한 주언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격앙된 소리가 건물 안에 메아리쳤다. 중간중간 폭발음 때문에 대화가 완전히 들리지 않았지만, 주언과 얘기하고 있는 상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 안은 조용해서 그런지 제법 멀리 있는데도 소리가 다 들리네요.”

이호윤은 메아리치는 말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추잡한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 여기에 있는 걸까. 비웃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들려온 대화 내용에 숨을 죽였다.

이호윤이 흘끗 강윤재를 바라보았다. 강윤재는 말없이 한때 거대한 산 같던 여지웅의 싸늘한 시신을 내려다보다가, 곧 우주언이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의 시선. 그 정도가 끝이었다. 이호윤은 강윤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나, 그는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는 순간이 기묘했다. 같은 배를 탔지만, 한 번도 제대로 얘기해보지 못했던 사이였다.

‘저 사람은 상관도 안 쓰고 있는 거 같지만.’

온통 신경이 주언이 있는 쪽에 향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거 기관에서 주는 약 아니잖아.”

“…….”

“이 약 어디서 났어?”

주언이 대답을 했는데 들리지 않은 건지, 대답을 못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곧 다시 주언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이호윤은 잠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폭주제 당신이 만들었다며.”

“…네.”

“현장에 있는 그 정도 인원이면 S급인 나도 다 가이딩 못할 것 같던데.”

혼자 보내기 싫었던,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삐딱한 어조로 말이 나갔다.

“억제제 줬어요.”

폭주제를 만들며 그에 맞는 억제제도 만들었다.

“정말 억제제 맞아?”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우주언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였으면 박쥐 노릇 하던 당신을 믿느니 가이딩 하다가 죽을 거 같거든.”

“…….”

강윤재의 시선이 그제야 이호윤에게 닿았다. 날 섰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언이 억제제를 쓰게 된다면, 그 억제제를 쓰는 상대는 정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잠깐, 폭주제를 대신 건네줄까 하는 마음도 먹었었다.

여명훤만 없으면, 주언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어서.

“억제제 맞아요.”

윤재가 입 안쪽 여린 살을 짓씹었다. 주언이 자신을 믿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억제제 맞느냐는 추궁에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언젠가 마음 정리가 끝나면 친구로라도 남고 싶었다. 이 관계의 종말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걸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빼더라도 여전히 주언이 소중하니까.

‘전처럼 친구로 지내지도 못하겠네.’

하지만 주언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 이제야 피부로 와닿았다. 어느 관계에서든 필요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 버렸으니까.

속였던 값이다. 윤재는 주언에게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말의 무게가 이제야 실감이 났다.

“…가봐야겠어요.”

직접 가서 억제제 맞다고, 속인 게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이 말조차 믿지 않을 수 있지만.

주언이 만약 약을 버렸다면, 이호윤의 말대로 무리하게 가이딩을 한다면, 그걸 그저 이렇게 무기력하게 방관하는 스스로를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멈춰있던 윤재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걸음은 뜀박질이 되었다.

탁탁탁-!

이호윤은 달려가는 강윤재의 모습이 마치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서, 자신 혼자 죽은 망령에게 붙잡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정작 강윤재는 조금이라도 빨리 주언에게 가야 된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뿐이겠지만.

“기분 한 번 개같네.”

이호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여기에 머물러 있던 건 왜일까. 이곳을 떠나지 못했던 건 스스로 저지른 짓이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너무 큰 죄를 저질렀으니 누가 자신을 비난해주길 바랐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도 같아서.

“갈까….”

여전히 여지웅이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겠지. 이호윤은 여지웅을 찔렀던 유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그 유리를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이런 참혹한 현장에서 살인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 것이다. 사람들도 워낙 많았기도 했고. 이호윤은 잠시 CCTV 쪽을 바라보았다.

CCTV 관제실도 처음 일어난 폭발 테러 때문에 무너졌다. 강윤재는 신고하지 않겠다고 했고.

“우주언도 그럴 정신은 없겠지.”

이호윤은 그대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건물이 이곳저곳 무너져 빠져나갈 곳을 찾으려면 많이 헤매겠지만, 끊임없이 걷다 보면 끝끝내 밖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살짝 벌려진 입술 틈새로 말캉한 혀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주언과 맞닿는 부분의 신경이 환희에 차서 떨리고 있었다. 살살 굴려 흉포한 힘을 진정시켰다. 몸 안에 힘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흐읏….”

주언이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한 명에게만 가이딩을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급한 불을 끄는 정도면 됐지 싶어 입술을 떼려고 했다.

“흡?”

명훤이 주언의 뒷목을 붙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몸이 빈틈없이 맞물리며 숨이 차올랐다. 그의 기운이 자신의 안을 멋대로 휘젓는 기분이 들었다.

“흣….”

주언이 세게 명훤의 가슴팍을 친 후에야,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훔쳤다.

“너…!”

“미안.”

명훤이 몽롱해진 시선으로 주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에는 오롯이 주언만이 담겨 있었다.

“이 억제제, 지금 폭주한 사람들한테 강제로 투여할 수 있을까?”

“…이건.”

구영이 알 정도니, 명훤이 단박에 눈치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억제제는 기관에서 지급하는 것과 다른 종류의 억제제였다.

“효과 좋은 억제제래.”

명훤은 이 억제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손안에 건네진 약병을 조금 세게 쥐며 다짐하듯 말했을 뿐.

“네가 주는 거면 나는 다 믿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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