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강윤재가 싫었다. 가끔 그의 가슴에 총알을 박아넣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도 있었다. 자신에게서 주언을 숨긴 것도 모자라, 애인인 척 행세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강윤재가 아니었으면, 주언이 살 수 없었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너무 큰 실수를 저질렀고, 자신이 죗값을 물리지 않아도 충분히 괴로울 것도 알았다.
들끓는 짐승 같은 욕망을 억눌렀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였다.
“빨리 끝내고 와.”
주언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명훤의 뺨에 닿았다. 거친 피부 표면이 느껴졌다. 주언은 손을 내리며 작게 속삭였다.
주언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윤재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쏟아부은 수많은 시간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응.”
주언은 길들여진 맹수처럼 순순히 대답하는 명훤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작게 쿵쿵 뛴다. 이런 순간에서도 명훤을 보니까 좋았다.
“끝나고 할 말이 있어.”
목이 타서 괜히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나도.”
명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 햇살 같은 냄새가 났다. 좋아하던 명훤의 향기인데, 어째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주언 씨!”
서윤진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명훤이 사라지자 서윤진이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이쪽으로 온 듯했다.
“이쪽으로 와요.”
가까이서 본 윤진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옷이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윤진의 팔을 잡고 부축하자 힘이 완전히 풀린 듯,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나한테 토끼 같은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요.”
“웃으라고 한 소리예요.”
“짓궂은 농담 하지 마요.”
“울어요?”
“아니요!”
주언은 윤진이 대답도 하기 전 윤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이 뜨거웠다. 입술보다는 효율이 낮았지만, 오래 호흡을 맞췄던 경험이 있는 만큼 금방 윤진의 기운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우리 만날 때마다 제대로 대화할 분위기가 아니네.”
“나가면 대화 많이 하면 되죠.”
더럽고, 유리 파편이 있는 바닥 위였지만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듯 누운 윤진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여기서 죽으면 진짜 짜증 날 것 같아서 죽고 싶어도 못 죽죠.”
주언의 손을 잡은 윤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윤진의 힘 빠진 웃음소리에 주언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윤진의 피부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 있었다. 힘의 순환이 잘 되지 않는데 무리하게 운용해서 생기는 부작용이었다.
힘이 쑥 빠지는 기분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힘이 빠지는 주언과 다르게 서윤진의 안색은 빠르게 괜찮아지고 있었다.
“꺄아아악! 왜 저래!”
다시 명훤 쪽에 합류한 구영이 비명을 질렀다.
“저게… 뭐지?”
명훤이 억지로 약을 욱여넣은 에스퍼들이 이상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억제제를 삼키게 한 건 이미 쓰러져 있는 에스퍼들이었다. 팔이나 다리 하나가 부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에스퍼들이 켁, 켁 거리며 목을 붙잡더니 곧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흐아아악!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아직 싸우고 있는 다른 에스퍼들을 광분케 만들었는지 날뛰기 시작했다.
“이제 어떡해요?”
사람이라기보다는 몬스터에 더 가까워 보였다. 여명훤은 잠시 고민했으나, 곧 구영에게 말했다.
“일단 막아, 계속.”
구영은 팔이 한쪽으로 돌아갔으나 개의치 않고 제 쪽으로 달려오는 에스퍼를 쳐냈다.
퍼억!
“제 실력으로는 봐주면서 할 수 없어요. 일단 저 살고 볼게요.”
구영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명훤은 그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훤. 이 새끼야! 너 무슨 짓이야.”
멀리 떨어진 여한올이 비명을 질렀다. 누가 봐도 아까보다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우주언. X발! 대체 뭐를 먹인 건데. 내가 잘못한 거잖아… 이런 식으로 엿 먹여?”
여한올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 눈앞에 대치하는 상대만 아니면 주언 쪽으로 달려들 기세였다.
“대체 왜….”
“주언 씨, 저 약 주언 씨가 명훤 씨한테 준거죠?”
“…네.”
“어디서 났어요?”
서윤진의 물음에 쉽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여지웅의 밑에 있던, 아마도 저 폭주제를 만든 사람에게서 받아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속은 거냐며, 바보 같다는 힐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친구한테….”
흐릿한 목소리에 먼지 바람이 스쳤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언젠가는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는데.
주언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한층 더 아비규환이 된 광경을 멍청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또 속은 건가?
마지막으로 믿으려고 했던 자신의 실수로 일을 그르친 걸까. 혼란스러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어지러워서 토하고 싶었다.
“주언 씨?”
심상찮은 표정에 서윤진이 주언을 불렀다.
여기서 만약 폭주한 에스퍼들이 더 날뛴다면, 그래서 누군가 다친다면.
‘차라리 내가 다치는 게 나을 텐데.’
에스퍼에게 가이드는 필수불가결한 존재고, 가이드는 에스퍼 없이 살아갈 수 있어서 불공평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나, 가이드는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날것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켜야 한다.
“여한올!”
명훤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여한올을 불렀으나, 흥분한 여한올은 명훤의 외침에도 멈추지 않았다.
“당장! 멈추라고 해!”
여한올이 악을 지르며 자신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경악하는 명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서윤진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명훤 새끼한테 그만두라고 그러라고, X발! 대체 무슨 약을 먹인 거야!”
여한올은 주언을 다시 인질로 삼아 명훤을 막을 셈이었다.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야!”
한올은 전과 같은 안온한 방법을 쓸 생각은 없다는 듯, 들고 있는 단검을 들고 주언에게 달려들었다.
“주언 씨!”
서윤진이 팔을 뻗었으나, 여한올이 조금 더 빨랐다. 훅, 풍겨오는 짙은 피 냄새에 주언은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으로는 피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이런 상황에 익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푸욱.
배 쪽에 고통 대신 온기가 느껴졌다. 곧 윤재가 주언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댔다.
“윤재?”
윤재의 옆구리에서 치솟은 피가 옷을 적셔서 따뜻해졌었다는 걸 알아차린 주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왜.”
왜 여기에 왔어. 너는 나를 또다시 속였잖아. 그런데 왜. 누가 자신을 위한답시고 희생하는 건 바라지 않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네가 왜 나 대신 공격을 맞는 건데.
피는 금세 식어, 차게 젖은 옷이 피부 위에 달라붙었다.
“폭주가 너무 진행되어서 그러는 거지. 곧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생각해보니까 이 말을 안 해줬더라고.”
“고작 그거 말해주려고 지금 이런 꼴 당했어?”
주언의 신랄한 말에 윤재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윤재에게는 고작이 아니었다.
“솔직히 내가 준 약, 안 쓸 거라고 생각했어.”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든 자신이 속이지 않았을 거라는 가능성을 믿기엔 전적도 있고, 여명훤도 있으니까.
주언은 윤재의 말에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잘못됐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의심했다. 역시나 속았던 거 아닌가 하고.
“너 피 엄청 나.”
손이 덜덜 떨렸다. 주언은 윤재에게 더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을 윤재도 모르지 않을 텐데.
“생각보다 엄청 아프네.”
윤재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미끄러졌다.
여한올이 주언을 공격하기 직전, 윤재는 때마침 주언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올보다 윤재가 주언과 가까이에 있었고 바로 몸을 날려 공격을 막았다. 일반인이 에스퍼의 공격을 막는 건 기적에 가까웠지만, 여한올은 지쳐 있었고 공격 속도가 빠르지 않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너… 지금….”
바라지 않은 호의는 주언의 목숨을 구했으나, 주언은 이런 일을 바라지 않았다.
“왜 나 같은 새끼 때문에 울어.”
“…….”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눈물 한 방울에 윤재는 만족한다는 듯 웃었다. 혀끝이 썼다.
“내가 제대로 설명 안 해서, 공격당하려고 한 걸 막은 거뿐이야.”
끝까지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주언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냥 더 이상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지, 칼을 맞았어도 자신이 맞았어야 했는데.
한 차례 더 공격하려던 여한올은 강윤재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발작을 일으키던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여명훤이 여한올의 옷 뒤를 잡아 그대로 던졌다.
“빼지 마요.”
서윤진이 옆구리에 박힌 단검의 손잡이를 잡은 주언의 손을 잡았다.
“안 아프다고 하면 거짓말인데… 기분은 안 나빠.”
내가 보여준 모습이 완전히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주언이 믿어줬다는 뜻이니까.
자신의 행동은 주언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주언이 마음 무거워할 필요 없었다. 주언이 자신에게 품는 감정의 크기가 다르니까, 자신의 행동은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이다.
“끝까지 이기적이네, 나.”
“알면 그러지 말지 그랬어.”
그래서 주언의 원망에 윤재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그와 동시에 절감했다. 아무리 이 감정이 특별하고 소중해도 상대가 바라지 않으면 부담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아무리 속이고, 억지로 건네도 탈이 날 수밖에 없었음을. 애초에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절절하게 와닿았다.
무슨 말을 더하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윤재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