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06화 (106/112)

#106

“윤재야…?”

주언의 목소리는 윤재에게 닿기 전 아스라이 사라졌다.

**

여한올은 강윤재의 말을 듣는 순간 도망쳤다.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고 한 행동이 아니라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명훤이 그를 뒤쫓았다. 건물 내부라 쉽사리 공격하지 못해 그저 속도를 내서 간격을 좁힐 뿐이었다.

“쫓아오지 마.”

“그냥 지금 잡히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어.”

“너는 몰라.”

억울함이 가득 찬 목소리에 명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껏 여한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건, 가족애라든지 형제의 정 때문은 아니었다. 여한올이 입양됐을 당시 자신은 아직 어렸기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여지웅에게 혹사당하는 여한올의 상황을 알고도 방관한 거나 다름없다는 일말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네가 불행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입힌 건 사라지지 않아.”

명훤의 말에 한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처음부터 당연히 가진 걸 쉽게 버릴 수 있었던 너는 나를 절대 이해 못 해.”

실수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한올의 입장으로서는 억울하기도 했다. 세상이 저에게 불친절해서, 자신도 불친절하기로 정했을 뿐이다. 바란 건 오직 서로 버리지 않는 관계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해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여지웅에게 약점 잡혀서 어쩔 수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진심이 담기지 않더라도 그 말을 듣고 싶으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아집이라는 걸 알았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람 중 자신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여지웅은 제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암초였다. 아무리 거대한 배를 가지고 와도, 피하지 않으면 부서지는 건 배니까. 하지만 영원히 부서질 것 같지 않던 암초도 언젠간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아주 갑작스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올은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

“아….”

마치 박제된 사람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지척에 명훤이 다가왔다. 명훤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한올을 잡지 않고 아주 잠시 숨을 멈췄다. 시선 앞에는 초라하게 늘어져 있는 여지웅이 있었다.

“…하하….”

여한올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마치 오랜 시간 암초를 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힘을 쌓았으나 암초를 넘기 직전 다 잃은 것과 같았다.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지만 기적적으로 암초가 사라져서 그대로 지나가게 된 기분.

허탈함과 동시에 암초 옆에 다른 길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 같았다.

“으으….”

죽었다고 생각했던 여지웅이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움찔.

여한올이 여지웅의 근처로 다가갔다.

“내가 데리고 가도 되냐?”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에게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했던 두 사람은 알았다. 여지웅의 몸에 생긴 흉터는 우연히, 사고에 휘말려 생긴 상처가 아닌 누군가가 뚜렷한 살의를 가지고 그를 찔렀다는 사실을.

명훤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지웅의 죽음이 이슈가 되는 건 사절이었다. 그가 이대로 사라져서 이슈가 되지 않고 잊히는 편이 가장 나았다.

**

“이 사람 안 죽었어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서윤진이 재빨리 강윤재의 맥박을 짚어본 후, 주언을 안심시켜주었다.

“충격이 심해서 기절한 거예요. 이 정도로는 안 죽어요. 여기서 피를 더 많이 흘리면 장담할 수 없겠지만.”

윤진의 냉정한 대답에 주언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저기 사람들 발작하는 거 멈췄는데요?”

마지막까지 발작하던 사람들을 상대하던 구영이 먼지 섞인 땀을 닦으며 주언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윤재의 말대로였다. 억제제를 먹은 후 더 상태가 나빠진 듯 보였던 에스퍼들의 얼굴색이 서서히 전처럼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악!”

“내 팔이!”

정신을 잃고 있었던 몇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곤, 감각이 느껴지는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지옥도 같은 광경이었지만, 끝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쪽이에요!”

한동안 안 보였던 수희는 밖에 나갔었던 모양인지, 뒤에 구조대원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곧이어 부상자를 원활하게 이송하기 위한 헬리콥터도 큰 소리를 내며 주변을 맴돌았다.

“주언아.”

돌아온 명훤이 자신의 뺨을 쥐었다. 가슴에서 울컥, 하고 뜨거운 응어리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제 끝이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명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명훤은 주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는지 기대감 서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주언은 달콤한 말을 하려고 명훤을 찾아온 게 아니었다.

내내 고민했다. 우리의 관계는 어디쯤 머물러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다른 건 알았다. 어디에 머물러 있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같은 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됐다. 우리는 나아가야 했다.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는 밧줄을 끊어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우리 시간 좀 갖자.”

주언이 내뱉은 말은 싸늘한 통보였다. 예상치 못한 말에 명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그렇게 겨우 명훤의 품 안에 들어왔던 주언은, 이번에는 제 의지로 도망쳤다.

**

“총각. 원래 1인분만은 안 받는데 총각이 참해서 받아 주는 거야.”

“고맙습니다.”

음식을 탁 내려놓은 이모님은 이렇게 추운데 손님이 없다며 한참 투덜거린 후에야 주언을 홀로 내버려 두었다.

식당 안이지만, 창문을 열어둔 탓에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이 시렸다. 바닷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주언은 앞에 놓인 국을 들이켰다.

“이제야 여행을 오네.”

그렇게 함께 오고 싶었던 여행이었는데, 막상 이렇게 혼자 오니 홀로 여행을 즐기는 나름의 맛이 있었다.

평소보다 도는 식욕에 밥을 싹싹 긁어먹은 주언은 통통해진 배를 두드렸다.

문제가 있다면 혼자 온 여행은 나쁘지 않았으나, 진짜 혼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디에 들어가든 여명훤의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서윤진은 명훤이 이 순간을 위해 오래 고생해 왔다고 연락했다. 모든 건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덧붙이는 말과 함께.

주언은 주인아주머니 어깨 너머로 보이는 TV 화면을 말없이 응시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명훤은 누가 봐도 근사해 보였다.

“오늘부로 사길드 합법화가 실행될 예정입니다….”

여지웅은 실종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명훤의 여지웅의 뒤를 이어 기관을 운영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약혼할 만큼 L 기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니 그쪽에서 만드는 새로운 사길드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있었다.

어린 나이이긴 했으나, 타고난 능력은 나이에 관한 우려를 충분히 잠재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약혼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공식적으로 돌지 않아 여명훤이 대기업 계열사 길드로 들어갈 것이라는 여론과 기관에 남을 거라는 여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명훤은 파격적인 선언으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여명훤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기로 정했다.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온전한 제 영역을 만들 것이라 선포한 여명훤의 시선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

명훤의 시선이 화면 너머로 주언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는 새로운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에스퍼 활동을 지속할 예정입니다.”

주언은 어째선지 도망치는 듯한 느낌으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어디를 가도 여명훤에 대한 얘기였다. 결국 도착한 곳은 모래사장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짠기가 느껴지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서 있었다.

혼자 여행을 온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세상은 언제 큰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하게 굴러갔다. 여행 온 이곳은 더욱더 평화로웠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무척 적었다. 방금 주언을 지나쳤던 커플이 점처럼 보일 정도로 멀어질 때까지 새로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지이잉.

핸드폰 진동에 서둘러 화면을 켜 보았다. 구영이었다.

-안 돌아와?

구영도 수희도 몇 주 사이에 공로를 인정받아 헌터 라이센스를 다른 동기들보다 빨리 발급받고, 현재는 명훤의 밑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주언은 잠시 답장할까 고민했으나, 곧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기대했던 연락이 아니었다.

‘기대 안 한다고 해놓고….’

사실은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간을 갖자고 한 건 주언이지만, 주언은 명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존심을 세우느라 시간을 갖자고 한 건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예전부터 늘 같이 있었으니, 당연히 각자의 미래에도 서로가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서는 안 됐다.

차가운 바람에 뺨이 붉게 물들었을 무렵, 뒤에 조용히 타인의 온기가 닿았다. 등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주언아. 계속 여기에 있을 생각이야?”

“…….”

명훤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할 때마다 닿는 숨소리의 온기에 솜털이 곤두섰다.

“돌아가자. 우리.”

파도치는 바다 앞바람은 매서웠으나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열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올랐다.

마치 내내 공기 속에서 숨 못 쉬던 물고기가 물에 돌아간 것처럼, 이제야 제대로 몸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주언은 한때 명훤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더 잘 보이고 싶어서,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애썼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그렇게 노력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도, 명훤도 지칠 거라고 생각 못 했으니까.

아마 주언이 바란다면 명훤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주언을 받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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