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07화 (107/112)

#107

치기 어린, 뜨겁기만 했던 우리의 과거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명훤이 없는 사이에 나이를 먹고, 계속 타오르기만 한다면 결국에는 재밖에 남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된 나이까지 도달했을 뿐이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좋다 그러면… 명훤이가 싫어하려나.’

주언이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곧 자신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예전으로 돌아가겠지만, 이건 얘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명훤아. 나는 우리가 전처럼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예전의 우리가 싫은 건 아니었다. 명훤이 주언의 손목을 붙잡아, 등지고 있던 주언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읏.”

허리가 강한 힘으로 당겨지고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내가 이제 싫어?”

작아진 목소리가 주언의 마음을 관통했다. 틈 하나 없이 견고해 보이던 스크린 너머 여명훤은 어디 가고, 제 한마디에 흔들리는 여명훤만이 앞에 남아 있었다.

“그게 아니라….”

서로가 없던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고 싶었다. 떨어져 있던 우리의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하지만 주언이 설명도 하기 전 명훤이 주언의 손을 감싸 제 뺨을 쥐게 만들었다. 손바닥 안에 까슬해진 피부가 느껴졌다.

“생각할 시간 얼마든지 줄게.”

“뭐?”

“그런데 그 생각, 내 앞에서 해. 시간 얼마든지 줄게.”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어느덧 저 멀리 보이던 사람들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져, 낯선 곳에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해.”

안겨 있던 주언이 고개를 빼꼼 들어 명훤을 올려다보았다. 주언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설명하지 못했는데, 명훤의 못내 쿨한 반응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선택이 나를 선택하지 않는 거라면 말해줘.”

네가 내 옆에 있으면서 마무리 지은 생각 끝에 내가 없으면,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주언을 한 번 잃고 느낀 상실감은 두 번 이상 느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만약 주언이 자신을 버린다면, 그때는 일말의 희망조차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극단적인 생각이 명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주언의 눈가가 덤덤한 명훤의 목소리에 파르르 떨렸다. 그 덤덤함이 도리어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의 깊이가 다르다는 걸 실감케 했다. 주언은 두 사람의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있었지만, 명훤에게는 그런 여유조차 없었다.

여행에 와서 그냥 우리가 잘될 거라고만 막연히 생각났다. 전과 다르게 더욱 견고해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남겨지고, 잊혀 지냈다는 괴로움의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이건 명백한 주언의 실수였다.

또다시… 너를, 우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기적으로 굴고 말았다. 자괴감에 폐가 조여오는 것 같았다.

“내가 널 어떻게 선택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주언의 말에 명훤이 어리광 피우듯 주언의 몸을 끌어당겨 몸을 밀착시켰다. 주언이 그런 명훤의 등을 토닥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지도 못한 불쌍한 주언은 명훤의 걱정을 하기에 바빴다.

“너 잠 하나도 안 잤어?”

그리고 명훤은 그런 주언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주언이 거뭇한 눈 밑을 손가락으로 쓸자, 명훤이 그 위에 손을 겹쳐 힘을 주었다. 그러곤 곧 주언의 행동을 모두 수긍하겠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언제 그런 음험한 생각을 했었냐는 듯 한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일 처리하고 바로 왔으니까.”

“좀 쉬면서 하지 그랬어.”

주언의 염려 섞인 목소리에 명훤이 쓰게 웃었다.

“쉬면 생각할 틈이 생겨서 괴롭기만 하니까 일하는 게 나아.”

“그러다가 몸 상해.”

S급 에스퍼인 명훤의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은 주언밖에 없을 것이다. 차라리 서서히 죽고 싶었을 때도 죽지 않던 몸이었다.

명훤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던졌다.

“내가 잘할게.”

명훤의 애원조에 주언은 명훤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다. TV에서 보던, 여전히 근사한 모습이었으나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모습과 다르게 조금 야위어 보였다. 미묘한 거리감에 명훤이 미간을 좁혔다.

“네가 부족해서 싫다는 게 아니야.”

“그럼.”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전처럼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어렸던 그때에 멈춰 있었다. 우리 사이가 틈 하나 없이 완전무결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텐데.

“명훤아. 네가 고작 내 짐을 대가로 뭘 했는지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침착하게 얘기하고 싶었으나 격앙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너한테 알릴 생각 없었어.”

이 얘기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기에 명훤의 얼굴은 당황으로 얼룩졌다. 주언의 코끝이 빨개졌다.

“나 때문에 그러지 말았어야지. 돌아왔을 때 내가… 내가 어떤 얼굴로 너 보라고 그런 짓을 해.”

고작 짐일 뿐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 임상 시험이 오래 걸릴 줄 알았더라면 태반은 버렸을 물건들뿐이었다.

명훤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네가 없는 집이 너무 숨 막혀서 그랬어. 너 이런 얼굴 보려고 그런 거 아니야.”

누군가에겐 고작이, 혼자였던 명훤에게는 전부였단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을 때, 처음 명훤과 재회한 날 느껴졌던 생활감은 모두 자신의 것이었다. 여전히 명훤은 자신이 사라졌을 때의 시간에 멈춰 있었다.

“그러지 마. 명훤아. 응? 내가 뭐라고 너 그렇게까지 해.”

“몰랐어. 당연히 내 곁에 있어서, 당연한 줄 알았어.”

“…….”

“그런데 아니더라. 네가 내 전부더라. 그렇게 사라져버리니까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 주언아. 나도 이런 내가 병신 같고 구차한 거 알아. 그런데.”

명훤이 마른 얼굴을 쓸며 중얼거렸다. 신경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초조해 보이는 얼굴에 주언은 있는 힘껏 명훤의 등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명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명훤의 심장이 빠르고 강한 속도로 뛰었다.

“앞으로 안 그럴게.”

처음부터 완벽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관계는 없다. 부딪쳐서 안 맞는 부분을 서로 마모시켜 맞물리게 해야 했다.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서 그때는 나 혼자만 배려하는 게 진짜 사랑인 줄 알았다. 우리는 서로를 연민하며,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서로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며 상처입혔을 뿐인데.

“응.”

언제까지고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서로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 언제든 유통기한이 지날 것이다. 그 전에 우리는 그 틈을 넓일 필요가 있다.

“우리 이제 서른이야. 감정만 믿고 질주하기엔 우리 앞에 있을 날이 너무 많잖아.”

위태롭고 뜨겁기만 한 관계는 결국 지쳐버리고 말 테니까.

“네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말 안 해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게 쌓이니까 무서워서. 그냥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응.”

“시간 갖자는 건 너랑 있으면 네 생각밖에 안 나서 그런거고.”

명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제야 안도감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떠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명훤은 안의 분노가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차를 몰고 주언이 있는 쪽으로 오는 내내 못 해줬던 일만 생각났다. 주언이 구영에게 여행 장소를 말해준 건 자신이 알아도 상관없다는 뜻이라고 믿으며, 그를 찾아 나섰다.

떠나면 어떡하지.

보통 사람이라면 위험에 빠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고, 주언도 자신이 없는 사이 평화로운 생활이 뭔지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했던 일만으로도 자신을 떠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떠났다면. 명훤은 뒷생각을 삼켰다. 어떤 행동을 했을지는 스스로조차 생각하기 싫었다. 잔학하고 자기 파괴적인 일이었을 테니까.

“다시는… 떠나지는 마. 부탁 좀 할게.”

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너를 멀리 뒀을 때, 그때 네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하던 때라는 걸 알았을 때. 그때 느꼈던 땅끝이 꺼지는 기분을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명훤은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은연중에 멀리하는 게 익숙해져서, 그 거리감이 당연하다고 느꼈던 때도 있었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실수였고, 자신의 오만이었다. 명훤이 여린 입 안을 세게 깨물었다.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쓸고 지나갔다. 주언의 볼 사이로 눈물이 한 방울 툭 흘렀다. 이제야 안도감이 퍼졌다. 우리의 감정은 다른 속도라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 싶어서.

명훤이 자신 앞에서만 내비치는 약한 모습에 드디어 예전 잃었던 관계를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게 피부로 느껴져서,

“응.”

주언의 대답에 명훤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떠난다고 했어도 놔줄 생각은 없었다. 이기적인 새끼라고 욕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주언의 눈가에 닿았다 떨어졌다.

“야!”

주언도 알았다. 아직 주변 상황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기분을 굳이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주언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고 마지막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너도 나 몰래 나 위한답시고 괜한 일 벌이지 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거 아니니까.”

“왜 내가 할 소리를 네가 해.”

“나도 안 그럴게.”

명훤이 고해성사하듯 주언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다시 시간 갖자고 하지 마.”

“…응.”

“그냥 항상 네 시간 끝에는 나와 함께하겠다고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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