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108화 (108/112)

#108

명훤의 속삭임에 주언이 살포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기억을 잃었을 때도 느꼈지만, 임상 시험을 받기 직전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연애 초반 때 느꼈던, 심장을 간질거리는 느낌에 귓등까지 열이 홧홧 타오르는 것 같았다.

“전이랑 많이 바뀌었네. 너.”

“내가?”

명훤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주언이 명훤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언제부터 이런 말 서슴지 않고 했어?”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명훤은 늘 바빴고, 날이 서 있었고, 여유가 없었다.

“싫으면 안 할게.”

“싫다는 게 아니라…!”

쪽.

“가자.”

뜨거운 입술이 주언의 입가를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주언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명훤을 바라보았다. 키스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짧은 입맞춤이었다. 소꿉장난 같은 뽀뽀였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먼저 몸을 튼 건 명훤이었다. 주언이 “어, 응.” 하며 얼떨결에 대답하고 명훤의 뒤를 따랐다. 주언의 시선에 명훤의 목이 붉어진 걸 보고 눈매를 휘었다.

우리 같이 돌아가는구나. 주언은 졸업 후에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 숙소를 떠난 후 전에 살던 곳엔 돌아갈 수 없었으니까.

모래사장을 밟고 걸어가는데, 명훤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왜?”

“오늘은 여행 온 거 아니라고 쳐.”

“어?”

“제대로 된 여행 계획 짜자.”

“너 한동안 많이 바쁜 거 아니야?”

“그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명훤은 여행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듯했다. 자신의 한마디를 내내 품고 있는 게 마치 한 번도 자신을 잊은 적 없다고, 헤어지자고 했던 때조차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노라는 고백처럼 들렸다. 자신이 실수했듯이, 여명훤도 그랬던 것뿐이었다. 그때의 헤어짐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비롯된 오만한 배려였다.

우리의 이기적인 배려의 결과는 서로 달랐지만, 서로를 위한다는 마음은 같았으니까. 우리는 다시 서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에 가자 급하게 내렸는지 엉망으로 주차된 차가 보였다.

달칵.

“차도 안 바꿨네.”

주언이 중얼거리며 조수석에 탔다.

**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한참을 말없이 달렸다. 자리 사이로 마주 잡은 손만 열기를 더했다.

그 손을 의식하느라 창밖이 어두워지고, 1지구에 도착했을 때쯤이 돼서야 우리만 생각하느라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실종됐다면서.”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누구를 얘기하는지는 명백했다. 국제법이 바뀐 일이 큰 이슈가 되어서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언급되는 실종 사건이었다.

“어.”

“내가 너한테 가기 전에 봤었어. 그땐 분명 칼에 맞은 채였어. 이호윤 씨가….”

“알아.”

“…안다고? 그럼 그 사람은….”

칼에 찔려서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그런데 경찰도 찾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자리를 피해 자취를 감췄다는 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었을 거야.”

마지막까지 숨이 붙어 있어서, 그대로 병원에 갔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런 죽음은 여지웅에게 너무 호사스러운 죽음이었다.

“어?”

“여한올이 데리고 갔어.”

“…그래?”

숨기지 말라고 해서 그런지 여명훤은 모든 대답을 해주었다. 여한올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여한올을 쫓아나갔던 명훤은 홀로 돌아왔다. 여명훤이 놓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분명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게 여지웅이 관련됐을 줄이야.’

현재 언론의 관심은 명훤에게 쏠려 있었고, 여지웅의 죽음에 관한 관심은 크지 않은 편이었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일련의 사건 끝에 여지웅이 자발적으로 잠적했다는 의혹이 더 커서 죽었다고 추측하는 사람은 적었으니까.

지이잉.

창문을 살짝 열자 도시 특유의 매캐한 공기가 틈새로 들어왔다. 주언은 앞을 응시하고 있는 명훤을 바라보았다.

남성미가 돋보이는 단단한 턱선, 곧은 코, 앞만을 응시하는 눈. 여명훤은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주언은 겉으로 괜찮아 보인다 한들 속마음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넌 괜찮아?”

한때는 아버지였고, 한때는 적이었다. 명훤에게 여지웅의 존재가 작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몇 년 동안 여명훤의 삶은 온통 여지웅뿐이었다. 주언이 사라진 이후, 여지웅을 짓밟기 위해 순서를 밟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훗날 자신이 돌아와만 준다면 그때는 지킬 수 있도록.

무너트려야 할 산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허무하게 스러진 것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어느덧 두 사람은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누구도 먼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핸들을 쥔 명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언은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핏줄에 대한 정이 남달랐으니까.

“솔직히 죽었다는 소리 들었을 때 안도했어.”

“…….”

“아. 이제 네가 위험한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

“그냥 그게 더 컸어.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이해한다고 말하면 그건 기만일 것 같아서 주언은 그냥 고개를 주억였을 뿐이다.

“그렇구나.”

핏줄이지만, 피가 섞였다고 다 가족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다. 명훤이 이제껏 쌓아온 분노를 여지웅에게 모두 쏟아내기 전에 그가 죽어버려서 허탈해하는 것보다 나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핏줄보다도 자신을 더 생각해줘서 그게 기분 좋았다.

‘이건 말 못하겠다.’

가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명훤에게 말하지도 않고 그의 어머니를 돌봤던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은 아니었다. 물어보면 대답하겠지만. 먼저 나서서 말할 생각을 고이 접었다.

“내 말이 부담스러워?”

“아니? 그냥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어서.”

집에 돌아오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짐을 보니 새삼 다시 울컥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의 의미를 명훤이 눈치챘는지 뒤에서 주언을 껴안으며 말했다.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과거에 더 집착하게 됐는데, 이젠 안 그래.”

“앞으로 그러지 마.”

“응.”

한 번 얘기해서 그런지 감상에 빠지는 시간은 짧았다. 북받쳤던 감정을 다 추슬러갈 때쯤, 명훤의 손이 주언의 옷 속에 닿아 있었다.

응?

주언이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자, 명훤의 손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손이 날개뼈에 닿았다. 맨살에 닿은 명훤의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우리 솔직해지기로 했잖아.”

주언이 훈훈한 분위기 속 다시 운을 뗐다.

“응.”

명훤이 주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다른 한쪽 손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노골적인 뜻을 띤 손가락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피부가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나인 거 못 알아보고 데리고 왔잖아. 그런 적 전에도 있었어?”

계속 신경 쓰였던 부분이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신경 쓰였다. 전에도 잠깐 스치듯 물어봤지만, 명훤의 대답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명훤이 움직이던 손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여기서?”

명훤이 이런 분위기에 확 식는 질문을 던진 주언을 원망하듯 바라보았다. 주언이 멋쩍게 웃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니. 궁금해서….”

이전에는 둘만 있어도 담백한 시간을 보냈었다. 서로 싫은 건 아니었으나 일과 병행하기엔 힘들 정도로 명훤과의 시간이 벅찼었다.

그래서 가끔 명훤이 주언 몰래 혼자 해결할 때도 있었다.

“그런 적 없어.”

“진짜?”

“응.”

대화가 길어질 거라고 여겼는지 명훤이 소파에 앉았다. 명훤은 제 무릎을 두드리며 주언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이지.”

주언이 명훤 쪽으로 가자, 명훤이 익숙하게 제 허벅지 위에 주언을 앉혔다.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 그날 누가 이 집에 온 거 처음이었어.”

“…….”

“진짜야.”

“…….”

“반응도 없었어.”

“…응?”

명훤의 담백한 고백과 달리, 노골적인 말에 주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명훤이 주언을 바짝 껴안았다. 말과는 달리 옷 너머로도 선명히 느껴질 정도의 열기에 주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괜찮아졌나 보네. 발칙하네. 우주언.”

놀리지 말라고 해야 되는데,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주언은 명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나 유치하지.”

“응.”

주언의 말에 명훤이 단박에 대답하자 주언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사실 내가 할 말 없다는 건 아는데, 그냥 여기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었다면 싫을 거 같아서.”

“이기적으로 굴어도 돼.”

“응.”

훈훈한 분위기가 다시 형성되나 싶었는데, 뒤이어 나온 명훤의 말에 주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나도 조금 이기적으로 굴게.”

“어?”

주언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 명훤이 재빨리 주언의 몸을 덥석 안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들린 주언이 반사적으로 중심을 잡기 위해 명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 맞닿고, 명훤이 곧 짙은 미소를 지으며 주언의 귀 언저리에 속삭였다.

“내가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건지 모르는 건 아니지?”

뜨거운 숨결에 주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쪽.

이번에는 주언이 먼저 명훤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대답 대신 돌아온 뽀뽀에 명훤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잘 아나 보네.”

쾅.

침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다시 열린 건 다음 날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