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정식으로 가이드 자격증을 재발급받은 후, 주언은 명훤과 함께 살기 위해 짐을 모두 예전 집으로 옮겼다.
주언은 발급받은 가이드 자격증에 기재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원래 자신은 새로운 신분인 우주원으로 살았어야 했으니까.
사길드 합법화가 된 후, 기관은 여명훤을 붙잡을 새도 없이 여러 곤욕을 치러야 했다.
[무연고자를 사망 처리해 비밀리에 생체 실험했던 기관의 민낯 [독점] 곽성관 기자]
여지웅도 실종된 와중에 비밀 임상 시험에 대한 뉴스가 터졌다. 자극적인 제목에 불기 시작한 바람은 손쓸 새 없이 순식간에 거세졌다.
기관은 시험 참가자들에게 임상 시험 후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던 말을 이행하지 않았다. 기관이 지원해주지 않아, 아무런 이력 없는 신분만 남은 임상 시험자들이 할 수 있는 노동은 손에 꼽았다. 전보다 나은 삶을 살 거라고 믿었던 생존자들은 기관에 항의했으나 묵살당했다. 당연한 수순처럼 임상 시험에 관한 기관의 비리에 대한 증언은 계속해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국민 청원이 일어나고,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이 시위에 나설 정도에 이르렀다.
여지웅이 없어서 대처가 더뎠고, 그 때문에 자극적인 기사가 손쓸 틈 없이 터져 나왔다. 결국 여론의 압박에 굴복한 기관은 잘못을 인정했고, 임상 시험 피해자들이 원래의 신분을 찾도록 도와주며, 금전적인 보상도 해주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먼저 시행된 것이 이름을 되돌려받는 것이었다. 우주언. 나는 다시 우주언이 되었다.
“주언아. 짐 다 챙겼어?”
“응.”
“내가 들게.”
그리고 그 기사의 시발점이 어디인지, 주언은 아주 잘 알았다.
‘나도 나섰으면 더 편했을 텐데.’
이 문제를 단독으로 취재한 곽성관 기자는 기사를 내보내는 동안 주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임상 시험에 참여한 당사자인 주언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는데도 인터뷰 한번 요청하지 않았다.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주언은 그가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은 건 아마도 누군가에게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명백히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개입은 아마….’
주언은 말갛게 웃는 명훤을 보며 곧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 생각할 필요 없었다. 여명훤은 자신을 과보호하고 있으니까,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아냐. 짐 별로 없어.”
짐을 정리하고 보니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짐 이게 다야?”
“응.”
집에 도착한 후, 짐을 풀기 시작했을 때 명훤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명훤은 주언에게 필요한 물건은 다 새로 사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주언은 무조건 자신의 짐을 가지고 온다고 했었기에 중요한 물건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더 가지고 올 짐 있는 거 아니고?”
“이게 다야.”
주언은 당황해서 재차 묻는 명훤에게 싱거운 대답을 한 후 짐을 풀기 시작했다. 명훤의 말대로 짐은 정말 적어 금방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주언은 들고 온 가방까지 신발장에 있는 서랍에 넣은 후, 소파에 앉았다. 처음 이 집에 명훤과 같이 들어왔을 때는 이 집이 상당히 크다고 느껴졌었는데, 새삼 다시 보니 집이 작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만 시간의 흐름을 빗겨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억 속 그대로였다.
짐을 보고 울컥 눈가가 뜨거워졌다. 주언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명훤이 주언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팔을 뻗어 주언의 뒷목과 머리 사이의 까슬한 부분을 매만지며 위로하듯 말했다.
“바뀐 게 너무 없지?”
명훤 홀로 몇 년 동안 살아왔음에도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내 슬펐다.
“앞으로 그러지 마.”
“응.”
“나 이제 짐 좀 정리할게.”
바쁘게 움직이며 잔재처럼 남은 감정을 떨쳐내고 싶었다. 주언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명훤이 팔목을 붙잡았다.
“주언아, 우리 이사 갈까.”
“…….”
“네가 돌아올까 봐 이사 못 했었는데… 이제는 아니니까.”
“여기 너무 오래 살긴 했지. 너 사는 동안 힘들었겠다.”
치안이나, 집 안 구조가 나쁜 건 아니나 문제는 여명훤의 입지가 너무 커진 데에 있었다. 조금 전 집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여러 명의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으니까.
“길드 건물 근처로 구할까?”
“이사 언제 갈 생각인데?”
주언은 길게 일 년까지도 보고 있었다. 어차피 바빠서 당분간 집에 자주 드나들 시간도 없을 테니까.
명훤이 주언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명훤이 주언에게 이럴 때는 무언가 바라는 게 있을 때였다. 그리고 대부분 주언이 바라지 않는 방향이다.
“내일?”
주언이 대답하기 전 명훤이 눈매를 휘며 해사하게 웃었다. 곧 명훤의 입술이 주언의 입술 위에 닿았다. 뜨거운 숨이 맞닿는다. 마치 신호가 된 것처럼 주언의 등에 차가운 소파 감촉이 느껴졌다. 주언의 위에 올라탄 명훤이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했다.
“내일 너무 힘들 수도 있으니까 내일모레도 괜찮고.”
목소리에 담긴 은근한 열기에 주언이 눈썹을 찡그렸다.
“…은근슬쩍 넘어가려 그러네.”
“그래서 싫어?”
“…그런 거 묻지 말랬지.”
주언이 아프지 않게 손으로 명훤의 가슴팍을 쳤다. 그러자 명훤이 주언의 손가락을 잡아 입 안에 넣었다. 뜨겁고 말캉한 느낌에 주언이 허리를 비틀었다.
“말 안 해도 대답은 들은 걸로 해도 되겠네.”
명훤이 짓궂은 얼굴로 주언의 아랫배를 쓸었다. 챙긴 짐을 다 풀기도 전에 이사가 결정되었다.
**
“안 가면 안 돼?”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돌아가면 되지.”
멈춰 선 차 안에서 생각지 못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주언은 바로 앞에 있는 병원 건물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명훤이 바쁜 걸 뻔히 알아서, 혼자 갈 수 있다고 했는데 기어코 데려다준다고 하더니만.
주언의 손가락 사이로 마디가 굵은 명훤이 손가락이 자리 잡았다. 깍지 낀 손 사이로 느껴지는 온기에 주언은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 봐야지. 너 여기까지 와서 다시 못 가게 하려고 따라온 거야?”
명훤은 대답 대신 그대로 손 아래위 방향을 뒤집은 후, 주언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쪽.
키가 190cm에 가까운 다 큰 성인 남성의 애교에 가슴이 사르르 녹는 자신 쪽도 문제다.
아주 잠깐, 그럼 가지 않겠다고 생각도 전에 본능이 말을 내뱉을 뻔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명훤이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손을 끌어당겨 뺨에 주언의 손을 얹었다.
“그래서 나 싫어?”
명훤은 변했다. 그는 언제 할 것 없이 확인받고 싶어 했다. 이 순간이 마치 일어날 리 없는 기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말 하지 말랬지.”
“다시 바빠질 테니까 불안한가 봐.”
일상의 바쁨은 때론 의도치 않게 소중한 것들을 간과하게 하곤 하니까. 소중하게 여긴다고 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너무도 잘 알았다.
주언이 명훤과 같이 있기로 한 건 안락함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여지웅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큰 사건이 끝난다고 소설처럼 완결이라고 마침표를 찍는 게 아니다. 그 이후의 삶도 있다.
우리는 또 다른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길드를 새로 설립한 명훤은 또다시 바쁜 삶을 영위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명훤을 선택한 건 우리는 다시 그러지 않을 거라는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도 바쁠 거야.”
명훤이 또다시 자신을 상처입힌다고 하더라도, 상처를 주는 그의 모습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길드에 들어와. 체력은 길드에 들어온 이후에 길러도 되는 거잖아.”
“싫어.”
길드를 설립하고 명훤은 당연하다는 듯이 주언에게 입사를 제안했다. 당연히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입사 제안을 거절했을 때 명훤의 충격에 굳었던 표정이 아직도 선연했다.
“이 몸으로 입사하는 거 자체로 낙하산인 거 뻔히 아는데….”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그리고 누가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 길드에서 내보내면 돼.”
“길드 마스터가 이러면 어떡해.”
“왜.”
명훤의 당당한 되물음에 주언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거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을 얘기하는 거야.”
“그래도 싫어.”
인공 장기를 달아서. 현장에 있을 때처럼 체력 관리를 하지 않아 체력이 떨어졌다. 그나마 최근 다시 가이드로서 살기 위해 열심히 단련해서 체력이 조금 늘긴 했지만, 한창때를 생각하면 한참 부족했다. 체력의 한계가 명확하지만, 명확한 만큼 그 안에서 가장 나은 상태로 들어가고 싶었다.
“지금 네 길드는 소수 정예인데 내가 당장 가봤자 방해만 안 하면 다행인 수준이잖아.”
그래서 거절했다. 낙하산이라도 방해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다른 곳을 거쳤다가 명훤에게 가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였다. 후자는 명훤이 뜯어말릴 것 같지만.
명훤이 주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덩치는 운전석을 꽉 채울 것처럼 크면서 올려다보는 시선은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매칭률 확인만 하자. 그럼.”
“언제쯤 도입되는데? 좀 시간 걸린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다음 주.”
“그렇게 빨리?”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주언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한민국의 독자적인 능력자 시스템을 벗어난 후, 여명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국제능력자 연합에 드는 것이었다.
여러 국가가 협력하에 만들어낸 시스템은 훨씬 더 체계적이었다. 개중 근래 가장 혁신적인 시스템은 매칭률 시스템이었다. 매칭률이 높을수록 에스퍼의 가이딩 흡수율이 높아져 던전에서의 귀환율이 유의미하게 높아졌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생존율을 높이는 것에 큰 공헌을 해 전 세계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시스템은 길드 사법화가 된 이후 한국에서 최초로 던 길드에서 도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