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내가 빨리 들여오자고 했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매칭 시스템을 들여오기 위해 한참 골머리를 썩었다는 걸 알았다.
“단순히 등급만 따지는 게 아니라 상성도 중요하다니 신기하네.”
명훤과 자신의 등급이 다른데, S급 가이드였던 이호윤보다도 효율이 나은 이유가 이제야 설명이 됐다.
“그러니까 매칭률 확인하고 빨리 입사해. 나 가이딩 해줄 사람 없어.”
“왜. 이지우 씨도 영입한 거 아니었어?”
공격 1팀에 있던 강노훈과 서윤진 그리고 이지우까지 기관에서 나와 여명훤을 따랐다. 같은 A급이지만 계속 현역에 있던 이지우와 지금의 자신의 실력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졌을 것이다.
“너랑 효율이 더 좋아.”
“그렇게 자부하다가 우리 매칭률이 낮게 나오면 어쩌려고.”
주언이 가벼운 목소리로 농담조로 말하자 명훤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낮게 안 나와. 객관적으로 나한테 너보다 나은 가이드 없었으니까.”
농담 삼아 던진 말에 돌아온 진지한 말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래. 일단 받고 얘기하자. 언제 받을 수 있는지 알려줘.”
“오늘.”
“오늘?”
명훤이 충동적으로 지금 결정했다는 게 여실히 티 났다. 말을 내뱉은 후 결심을 굳혔는지 명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냥 하는 말이라도 다른 곳에서 경험 쌓고 오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
“…….”
명훤이 이 말을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다. 어차피 주언이 항상 돌아갈 곳은 명훤의 곁이었으니까.
주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명훤이 고개를 돌려 주언의 목과 어깨 사이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마치 제 것이라는 낙인을 찍듯이.
“앗…!”
주언이 낮게 신음을 토해 내자 명훤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제야 머리를 뗐다.
“다른 새끼 가이딩 해주는 꼴 보고 싶지 않아.”
“…알았어.”
주언은 그냥 질투라고 치부했지만, 그 말은 진심의 편린이었다. 만약 자신의 앞에서 주언이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 해준다면… 상상만으로도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주언은 몰라야 했다. 명훤은 음습한 마음을 억누르고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주언아.”
“어?”
“나 안심시켜줘.”
주언이 깨문 것에 대해 화내기 전에 명훤이 먼저 선수 쳤다. 주언이 명훤이 닿았던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아랫입술을 축였다.
“방금 안 하겠다고 했잖아.”
“그래도 아직 불안해.”
노골적으로 자신을 꼬시는 표정인 걸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모습이다. 이상하게 그 사실에 묘한 우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확실히 전과는 달랐다.
주언이 명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부드러운 머릿결을 느끼며 주언이 속삭였다. 예전에는 이런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사소한 감정도 표현하며 소유욕을 드러냈다.
“응?”
명훤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처연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주언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가 뜨끈했다. 미모로 공격하는 건 정말이지 불공평했다.
“…안 가는 건 안 돼. 병원 앞까지 왔으니까 가봐야지. 나 때문에 다쳤잖아.”
“성의를 표현하고 싶은 거라면, 다른 사람 보내는 방법도 있어.”
“…….”
주언의 침묵에 명훤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걸 알아차린 명훤이 아쉬움을 뚝뚝 흘리며 물러났다.
“알았어. 그 대신 기다릴게.”
“너 바쁘잖아. 가서 일 봐.”
여기서 도화선에 불을 붙여도 될까, 하는 고민이 잠시 스쳤으나 그 시간은 짧았다.
주언은 양손으로 명훤의 뺨을 쥐었다. 차 안에 단둘밖에 없어, 시선이 가까이 맞닿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주언이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쪽.
뽀뽀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짧은 입맞춤이었다. 할 거 다 했으면서 먼저 입을 맞추는 게 새삼스럽게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모르겠다.
“괜히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탁.
주언이 도망치듯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창문이 내려지고 명훤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들어가면 안 돼?”
“조금 이따가 보자.”
“…….”
“너 오전에 일 있다며. 팀장님이 나한테 너 꼭 보내라고 하시더라.”
“…뭐?”
명훤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팀장님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말하지 않으면, 명훤이 자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팀장님한테 뭐라고 할 생각 말고. 나한테까지 연락한 팀장님 생각 좀 해줘.”
이 말을 끝으로 주언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며 재빨리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
병원 안에 들어서자 언제 얼굴을 붉혔었냐는 듯 뺨이 차게 식었다.
리셉션에서 병실 호수를 확인한 후 위로 올라갔다. 층을 올라갈수록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공기가 한층 더 차갑게 느껴졌다.
주언은 사방이 흰 이 복도도, 은은하게 풍기는 약품 냄새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유독 병원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많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폭발에 휘말리고, 자신 대신 공격에 맞아 사경을 헤맸던 애인을 두고 떠났었다.
‘일생에 한 번 겪기 힘든 일을 겹쳐 겪었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마지막 기억이 나쁘지 않길 바랐다. 주언은 긴장한 얼굴로 문 앞에 섰다.
“후우….”
주언이 한숨을 내쉬며 경직된 어깨를 억지로 느슨히 만들었다.
마지막만 아니었다면 사실은 다시 만날 생각은 없었다. 감정에 대답해줄 수도 없으면서 괜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될까 봐. 괜한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주언 나름의 배려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온 것은, 그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윤재는 아니라고 했지만, 자신이 아니었다면 윤재는 다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죄책감이 다시 찰박이며 마음속에 차올랐다.
똑똑.
잠깐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나 지금 좀 쉬고 싶어.”
피곤에 전 목소리 끝이 길게 늘어졌다.
“…….”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힘없고,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순간 병실을 잘못 찾은 줄 알았다.
“필요한 거 없으니까 혼자 있게 해주라.”
하지만 몇 년을 함께 지낸 만큼 말투만 다를 뿐, 목소리는 윤재의 것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병실로 들어오려는 자신을 누나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차 안에서 윤재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얘기가 떠올라 잠시 멈칫했으나 곧 주언이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중에 다시 올까?”
“우주언?”
“응.”
우당탕. 안에서 급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미안. 누나인 줄 알고. 아니, 여긴 어떻게… 왜 왔어?”
“바쁘면 나중에 올게. 내가 타이밍 못 맞췄나 보다.”
주언이 어색한 목소리로 나중을 기약하자, 문이 다급히 열렸다.
드르륵.
“아니야. 들어와.”
흐트러진 머리, 그 아래 초췌해진 얼굴을 차마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대수롭지 않은 안부 인사를 할 사이도 아니게 됐다는 생각에 주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급소는 빗겨나가서 며칠만 더 입원하면 된대.”
“다행이다.”
이미 들었던 사실이지만 윤재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병원비는 내가 낼게.”
멈칫.
창밖을 보던 윤재의 시선이 주언에게 닿았다. 희미하게 섞인 원망에 주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그 얘기하려고 여기 왔어? 괜찮아.”
두 사람 사이에 공기가 바짝 곤두섰다. 윤재는 더 이상 얘기하기 싫어하는 듯 보였으나, 주언은 재차 말했다.
“내가 내게 해줘.”
우리 사이에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강경한 주언의 말에 침대 시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할 말이 많아 보였으나 모두 삼켜지고, 내뱉어진 말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이거밖에 없구나.”
윤재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건조한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주언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러 번 생각했고, 이 결론이 감정에서 나오지 않은 거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오래 생각했다.
“나 다시 안 올 거야.”
친구라도 되자는 허울 좋은 말을 했으면 자신의 마음이 더 편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안 됐다.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용서할 자신도 없으면서 그러는 건 기만일 뿐이고, 윤재에게 있어 자신은 후회의 집약체일 뿐이니까.
“…아….”
“그냥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하자.”
주언이 애써 웃었다. 특별하지 않아도, 모르는 사이도 할 수 있는 인사만이 우리에게 남았다. 주언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이 표정을 명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주언은 윤재에게 큰 빚을 졌지만, 명훤은 아니니까. 명훤은 자신이 윤재를 보는 시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윤재를 마음에 담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함께 보낸 시간이 있었다. 명훤이 자신을 잃고 홀로 아파했던 그 시간에 우리는 함께했다. 명훤이 모르는 시간을 담은 우리를 보고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 인사 정도는 하자….”
윤재에게 자신과 명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윤재와 거리를 두는 것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내가 널 용서하고, 네가 나를 잊고, 우리의 시간을 관망하듯 볼 수 있을 때가 온다면, 윤재를 편하게 볼 수 있겠지. 그 시간이 언제쯤 올지는 모르지만.
드르륵.
“윤재야. 링거만 맞지 말고 이제는 식사도… 어머. 손님이 있었네.”
문을 열고 들어오며 얘기하던 여자가 주언을 보곤 멈칫했다. 윤재의 누나구나. 조금 더 선이 얇고,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만 윤재와 상당히 닮았다.
‘아. 저 사람이….’
그리고 그 뒤에 그녀의 치맛자락을 쥐고 있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조금 올라간 눈꼬리가 자신이 아는 사람을 연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