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주언이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윤재와 주언을 번갈아 보다가 심상찮은 공기를 읽곤 눈매를 휘며 평소보다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손님이 오면 말을 하지. 뭐라도 챙겨왔을 텐데.”
“연락 없이 온 거예요.”
“그래요? 지금이라도 음료수라도 뽑아 올까요?”
“아뇨. 정말 잠깐만 들른 거라….”
“잘 가.”
대화가 길어지기 전에 윤재가 누나의 말을 끊어냈다.
“그래. 그럼 갈게.”
주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짧았지만 내내 몸이 경직되어 있어서 그런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주언은 작은 아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음을 옮겼다.
“왜 더 있으셔도 되는데.”
아쉽다는 누나의 목소리에 윤재가 “먼저 가.” 하고 주언에게 말했다.
주언은 이 아이에 대한 얘기는 명훤에게 말하지 않았다. 주언의 태도를 윤재도 이해했는지 인사를 시키는 대신 주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전에도, 앞으로도 명훤이 이 아이와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주언이 떠난 후 적막해진 병실을 둘러보며 그녀가 씁쓸한 목소리로 윤재에게 물었다.
“내가 방해했니?”
윤재는 답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누나니까, 가족이니까 자신이 희생하는 게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누나 또한 자신의 희생을 부담스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여차하면 누나도 자신을 위해 거리낌이 없이 희생할 테니까. 쌍방 통행하는 감정이었다.
“하하….”
그제야 윤재는 깨달았다. 주언은 그 반대였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 앞세워 일방적으로 치른 희생은 부담밖에 되지 않는 사실을.
용서가 대가가 될 수 없는 무겁기만 한 일방적인 호의의 잔재가 윤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무의미한 가정을 했다. 이미 그 시간은 지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후회밖에 없었다.
**
주언은 1지구에서도 땅값이 높기로 유명한 번화가에 들어섰다. 걸음을 재촉하던 주언은 번화가 한가운데 우뚝 선 건물 앞에 멈춰 서서 간판을 바라봤다.
‘던(Dawn) 길드.’
단순하고 직설적이기 그지없는 길드 이름에 피식 웃었다. 대충 지은 것치고는 건물이 기죽을 정도로 높아서, 주언은 건물 앞에 잠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앞에 있던 경비원이 가만히 서 있는 주언을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볼 때쯤에야 주언은 주머니 속에 있는 사원증을 쥐고 건물 안에 들어섰다. 명훤이 임시라며 발급해준 사원증이었다.
“주언 씨. 어서 와.”
올라가자 서윤진이 기다렸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언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명훤 씨한테 부탁받아서 기다리고 있었어.”
“감사해요.”
“나야 일 땡땡이 칠 수 있어서 좋지 뭐. 그나저나 이제야 진짜 제대로 인사하네.”
“커피 사 왔는데….”
“나 바닐라 라떼 좋아하는 거 기억하네?”
“당연하죠.”
“고마워.”
서윤진은 테이블 위에 커피를 올려두고, 사무실을 간단하게 소개시켜줬다.
“주언 씨가 사 온 커피 입구 쪽에 놔뒀어요.”
“잘 마실게요.”
“네!”
다행히 커피를 많이 사 온 보람이 있게 퀭한 얼굴로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에 이채를 띤 채 커피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기관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사무실 안은 아직 사람이 다 채워지지 않아 비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어?”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네, 뭐.”
“입사하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는 얼굴도 있었다. 지나가던 이지우와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우리 신입들 주언 씨랑 아는 사이라며. 곧 임무 마치고 올 텐데 인사할래?”
“나중에 할게요.”
구영과 수희도 명훤의 눈에 좋게 들었는지 두 사람은 한 팀으로 묶여 같이 던 길드에 입사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입사 소식을 단체 메신저로 들어 곧 만나서 축하도 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지금 굳이 만날 필요 없지 않나.
“그래? 그럼 바로 올라갈까?”
매칭률을 검사하게 다른 층으로 이동하려는데 막 서류를 들고 들어오는 강노훈과 맞닥뜨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강노훈이 주언을 보곤 걸음을 우뚝 멈췄다.
“주언 씨?”
“팀장님! 잘 지내셨어요?”
“안에 들어가서 인사해요.”
서윤진이 눈치 좋게 두 사람을 이끌고 바로 근처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노훈이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주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설명은 대충 들었어. 잘 지냈어?”
주언이 없는 사이 명훤을 곁에서 보살펴줬던 사람이 그라는 걸 잘 알았다. 던전에 갇혔을 때, 명훤의 과거 편린 속에서 봤던 장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네… 명훤이가 얘기했다고 저한테 말했어요.”
“고생 많이 했겠네. 그래서 언제부터 들어와?”
“네?”
감성에 젖으려던 것도 잠시, 노훈의 저돌적인 말에 주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훈이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일 처리 잘해주던 주언 씨의 소중함을 이제야 알았어. 내가.”
“오늘은 일단 매칭률만 검사하러 왔어요.”
“…들어오긴 할 거지?”
불안해하는 강노훈의 말에 주언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입사할 생각이었다.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네.”
“조금 빨리 들어오면 안 될까?”
강노훈의 안색이 잠시 밝아졌다. 하지만 곧 주언의 물음에 순식간에 시든 식물처럼 축 처졌다.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요. 아, 참. 이제 이사님으로 불러드려야 되나요?”
“마음대로 불러!”
“길드 설립된 지 얼마 안 돼서 많이 바쁘시죠?”
주언이 위로차 건넨 말에 강노훈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냅다 불평을 와르르 토해냈다.
“아니. 나한테만 이력서를 왜 받나 했더니… 일을 이렇게 시키려고 그랬던 거더라고. 명훤 씨 그렇게 무서운 사람일 줄이야.”
노훈과 주언이 대화하는 사이에 밖으로 나갔던 윤진이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윤진이 커피를 건네주자 노훈이 말을 멈추고 커피를 쭉 빨았다. 서윤진이 익숙하다는 듯 강노훈을 띄워주었다.
“해외에서도 무시 안 당하려면 팀장님 같은 사람이 있어야죠.”
혀에 기름칠한 듯 자연스럽게 나온 칭찬에 강노훈이 곧 그런가? 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서윤진이 자연스럽게 강노훈을 사무실로 돌려보냈다.
무사히 엘리베이터에 탄 서윤진은 엘리베이터에 보안 카드를 찍었다.
“아직 매칭률 확인은 소수에게만 진행하고 있어요.”
“그래요?”
“매칭률까지 다 확인하고 팀원 새로 꾸리기엔 요즘 전체적으로 많이 바빠요. 갓 길드 설립했고, 요즘 가장 주목받는 길드니까 아무래도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럼 매칭은 나중에 팀 개편하면서 하겠네요.”
“네. 매칭된 팀원끼리 합동 훈련을 하면 던전 클리어 할 확률도 높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신입은 에스퍼끼리 팀으로 활동한 경력 있는 사람을 뽑으셨나 보군요.”
구영과 수희처럼.
기관에서 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하자 서윤진이 묘한 눈으로 주언을 바라보았다. 명훤에게 듣기로는 주언이 가이드로서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서, 입사를 미루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주언은 가이드로서만이 아니라 다른 능력으로 들어와도 충분히 한 명 이상의 몫을 해낼 인재였다.
“맞아요.”
“저도 도울 일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저도 일단 팀이었으니까. 지우 씨 혼자 던전 커버하기에는 많이 벅차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그게 아니더라도 입사 빨리해요, 그럼.”
“네?”
주언은 가이드가 아니라도 빨리 입사하라는 서윤진의 말에 멈칫했다.
“사무직 쪽으로도 주언 씨 능력 있으니까. 우리 그때 인원 부족해서 잡다한 일 많이 해서 더 멀티태스킹 가능하잖아요.”
가이딩이 아니라 사무직 업무 쪽으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봐서 얼떨떨했다. 기관에서 일할 때도 그냥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했을 뿐이었다.
“오래되기도 했고, 그거만 가지고 입사는 어렵지 않을까요?”
“예전에 업무 먼저 끝내서 제 업무 도와준 적도 있었잖아요. 그 정도면 능력 차고 넘치지.”
일말의 고민도 없어 말하는 서윤진의 기세에 주언이 한 수 물러났다.
“생각해 볼게요.”
“그런데 주언 씨.”
“네?”
“명훤 씨 그 연설한 거 주언 씨한테 보여 주려고 엄청 열심히 했어요.”
“네?”
“길드 새로 설립한다는 연설 말이에요. 멋있는 척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주언 씨한테 말 안 했죠?”
“안 하긴 했는데… 대표로 설립하는 거고, 그전에 방송에 나온 적 있어서 방송한 거 아니에요?”
주언이 아는 명훤은 미디어 매체에 나오는 건 싫어할 것 같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바뀌는 것도 있기 마련이라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런 걸 좋아할 성격이겠어요?”
“네? 그럼….”
서윤진의 말에 주언이 아랫입술을 축였다. 새삼 기억을 더듬으니 평소 명훤과 다르게 목소리가 조금 딱딱했던 것도 같았다.
“원래 미디어 매체에 나오는 것도 싫어하는데. 인지도가 있으면 말 한마디의 여파가 다르잖아요.”
“…대체 언제부터 생각한 거예요?”
“주언 씨 사라지고 나서 얼마 안 지났을 때일 거예요.”
“…….”
“주언 씨 살아있는 거 확신도 못 하면서 혹시 모르니까, 이러면서 준비했어요. 결론적으로는 저희한테도 좋은 일이라 동참했고.”
서윤진은 여명훤의 노력이 퇴색되지 않도록 자신에게 전달해주었다. 명훤의 업적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새삼스럽게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신이 돌아오면 어떤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 그 흔적이 이제야 보여서 가슴이 벅찼다.
얘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검사실이라는 팻말이 붙인 방 앞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좁은 내부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기계 한 대가 있었다.
“자, 들어가요.”
매칭 시스템은 등급을 책정하는 기계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주언이 기계 안으로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