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여한올은 실종, 그리고 이호윤은 해외로 영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호윤은 제의가 빨리 온 중국 쪽으로 바로 넘어갔다고 했다.
사길드 합법화라는 뜻은 다른 국가에 속한 길드에 가는 것도 합법화됐다는 뜻이었다.
국내에서 범죄를 일으키고 해외로 이적한 에스퍼나, 가이드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에 대한 법은 아직 정해진 것이 없었다. 고로 죗값을 받게 하려면 국제 재판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게다가 이호윤은 겉으로 드러난 범죄는 딱히 없기에 범죄를 입증하는 건 더 어려울 터였다. 이적과 동시에 귀화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만약 이호윤이 국적을 바꾼다면 붙잡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주언은 알았다. S급 헌터가 마음만 먹는다면 가이드인 이호윤을 추적하는 것도, 흔적도 없이 이호윤을 잡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잡는 게 더 까다로운 쪽은 여한올일 것이다.
‘정식으로 들어간 곳은 없어서 확실히 알지는 못해.’
하지만 추측하건대 모친의 모국인 러시아 쪽으로 간 것 같다고 했다. 폭주제를 먹고 입원 중이었던 몇 명도 함께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마 다시 우리 눈앞에 띄는 일은 없을 거야.’
명훤은 이렇게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듯했다. 마냥 나쁘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렇구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명훤이 주언이 바라는 대로 하고 싶은 것처럼, 주언도 마찬가지였다. 주언도 명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부분도 적잖이 있었다.
모두를 찾아내서 단죄하게 만들 시간에, 명훤과 있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정도면 중증이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굳이 고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바라는 대로 계속 같이 있을 수도 없는데, 더 시간을 빼앗기기는 싫었다.
“후우….”
건물 앞에 선 주언은 긴장감이 섞인 숨을 토해냈다. 얼마 전의 데자뷔가 느껴졌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때는 매칭률 확인하기 위해 가볍게 온 거였고, 지금은 첫 출근 날이었다.
건물 앞에서 심호흡하는 것도 잠시, 이번에는 경비원의 이상한 시선을 받기 싫어 재빨리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명훤은 같이 출근하고 싶어 했지만, 이틀 전 밤에 갑자기 던전이 발생해 아직도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른 새벽, 던전을 클리어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퇴근은 같이할 수 있겠지.’
퇴근하고 근처 부동산에 들러 이사할 집을 같이 보기로 한 날이었다.
던전으로 와 달라는 요청에 입사하자마자 던전에 가게 되었지만, 등급이 낮은 던전이라고 했으니 자신 쪽도 차질없이 저녁에는 퇴근이 가능할 것이다.
“후우….”
주언이 한숨을 내쉬며 거울 속 자신을 마주 보았다. 긴장한 게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괜히 제 뺨을 매만졌다. 첫 출근도 모자라, 바로 던전에 가니 부담이 안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배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출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됐던 며칠 전이 떠올랐다.
91% 우리의 매칭률이었다. 낮으면 어떡하냐는 질문에 내심 긴장하고 있던 주언이었다. 하지만 검사지를 확인하던 서윤진은 여과 없이 표정을 드러낼 정도로 놀라워했다.
‘상당히 높네요. 매칭률이.’
‘그런가요?’
은근히 9%가 신경 쓰였던 주언은 놀라워하는 서윤진의 목소리에 뒷목을 긁적였다.
‘70% 이상부터 상성이 좋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거든요.’
‘그래요?’
‘명훤 씨 고급 전력이니까, 데이터는 저장해두고 다 비교해보는데 50% 이상 나오는 건 주언 씨가 처음이에요.’
‘원래 다 그렇게 낮게 나와요?’
‘명훤 씨가 원체 까다롭기도 해요. 나는 상성 맞는 가이드 몇 명 나왔거든요.’
서윤진은 명훤이 까다로운 줄은 알았는데, 가이드마저 가릴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결국엔 명훤이 원하는 대로 주언은 곧장 던 길드에 입사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주언이 다른 에스퍼와도 상성이 나쁘지 않아, 명훤이 바랐던 대로 사무실 안에만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명훤은 주언이 곧장 투입된다는 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강노훈이 강하게 반발했다.
‘일할 수 있는 인력을 뽑아 놓고 안 쓰면 뒤에서 말이 더 나오거든?’
신입 우대 없이 경력자 취급한다던 노훈의 핏발 선 말에 그간 그의 노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명훤이 싫다는 태도에도 주언은 오늘 곧장 던전에 출동하게 되었다.
주언은 사무실 문을 열기 전 심호흡을 했다. 예전 경력까지 쳐줘서 팀장으로 들어온 만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직책만큼 잘하지 않으면 길드에 누가 될 거라는 부담감이 가장 컸다.
지이잉.
자동문이 열렸다. 주언은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 어?”
하지만 인사가 채 끝나기 전 주언은 긴장이 탁 풀릴 수밖에 없었다.
“왜 아무도 없지?”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
“형!”
“오빠!”
구영과 수희가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한껏 행복한 얼굴로 가장 먼저 주언 쪽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 뒤로 명훤과 윤진이 나란히 주언 쪽으로 다가왔다. 윤진은 마른 얼굴을 쓸며 주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순간 신종 사내 따돌림 당하는 줄 알았어요.”
주언이 장난식으로 말하자 명훤의 몸이 티 나게 굳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수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분명 길드장님이 바로 게이트가 있는 쪽으로 가라고 전달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이 어떻게 딱, 주언 씨한테만 누락됐던 모양이더라고요.”
서윤진의 뼈 있는 말에 주언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명훤이 오늘 게이트로 가려던 다른 인원들에게 길드로 출근하지 말고 곧장 던전으로 출동하라고 말하고, 주언에게만 그 소식을 전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길드장님?”
주언의 웃는 얼굴에 명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주언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벽부터 끌려나간 사람들은 길드장이 털리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커피나 마시러 가자며 우르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명훤의 사무실 안에 들어가 문까지 잠근 후 주언이 낮아진 목소리로 명훤을 불렀다.
“여명훤.”
“첫날인데 바로 던전에 가는 거 싫었어.”
먼저 맞는 매가 낫다고 명훤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C급 던전이었어.”
“…….”
“입사하라고 해놓고 출동시키지 않은 건 무슨 경우야?”
“미안.”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
“알아, 아는데… 근데 불안해.”
명훤이 주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풀죽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명훤의 연약한 모습에 주언이 이마를 짚었다.
“위험한 일에 일부러 안 나선다고 했잖아.”
“응.”
“잘못했지?”
“응.”
주언이 테이블 끝에 걸터앉은 명훤의 품 안에 얼굴을 기댔다. 쿵. 쿵.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나 아직 원하는 만큼 활동은 못 하지만, 사무직만 할 정도로 무능력하진 않아.”
“응.”
“그러니까 다음부터 이런 식으로 하지 마. 팀원들한테도 민폐잖아.”
“응.”
명훤은 그 어떤 말에도 알겠다고 대답할 것처럼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부동산에 가기 전 같이 저녁을 먹으며, 근사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이제껏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나도 너와 나란히 서기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5년 전에도, 지금도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다소 멋없지만 어째선지 지금이 적기처럼 느껴졌다.
명훤은 제 품 안에 얌전히 갇힌 주언의 정수리에 입을 짧게 맞춘 후 뺨을 대었다.
“이사 갈 집도 내가 골라도 돼?”
“응.”
“내 개인 방도 만들고 싶어.”
“응.”
우리는 이제 우리가 바라던 삶의 궤도를 되찾았다.
여전히 부족하고, 이기적으로 굴어서 서로를 상처입히고, 서로 후회하는 일이 일어날 테지만 전처럼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언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제 슬슬 너랑 각인도 할까 하는데.”
“응. 어?”
얌전히 대답하던 명훤이 고장 난 것처럼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곤 벙찐 표정으로 주언을 내려다보았다.
주언이 명훤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았다.
“장난으로 말한 거 아니야.”
가벼운 척 말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몸을 떨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타이밍을 재느라 명훤이 미처 먼저 말하지 못하고 있던 말이었다. 선수를 빼앗긴 게 자못 분하다는 듯 명훤이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주언이 돌아온 이후에도 명훤은 여전히 불안감에 시달렸다.
자신이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전과 다르게 주언이 자신을 덜 사랑할까 봐, 언젠가 다시 떠날까 봐. 끊이지 않는 갈증같이 괴로웠다.
여지웅은 늘 완전무결한 자신만을 바랐고, 주변에서도 그런 자신을 당연하게 여겼으니까. 그래서 섣불리 먼저 고백할 수 없었다.
“나 네가 생각한 만큼 대단한 사람 아니야.”
“너 대단해서 좋아했던 거면 진작 헤어졌을걸.”
“너무하네.”
주언의 고백에 명훤이 지닌 주언을 잃을 거라는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우리의 감정이 같은 속도로 가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래서 대답은?”
주언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명훤에게 선택지가 여럿 있다는 사람처럼. 주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얼빠져 있던 명훤이 곧 주언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기꺼이.”
명훤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애초에 대답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물음이었다.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