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화 (3/348)

#03

귀재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귀재에게 있어 나자라는 선택지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곳에서는 숨길 필요도, 거짓말도 할 필요가 없다. 보이는 것을 안 보인다며 거짓말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부정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그래도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나례청 안에서는 모두가 평범해졌다. 이것이 무당의 딸이던 한주영이 나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나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식 나자가 되기 위해선 견습생 ‘초라니’로서 2년간의 수련 기간을 거쳐야 했다. 초라니는 잠재된 귀기(鬼氣)를 다루는 고된 훈련을 병행하며 온갖 잡일을 도맡아야 했다. 때문에 나자를 꿈꾸고 입청한 귀재들 중 절반 이상은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민간으로 돌아갔다.

한주영은 이를 악물고 지옥 같았던 그 시간을 견뎌 냈다. 여기도 지옥, 저기도 지옥이라면 사회에서 제대로 능력을 인정받으며 동료와 함께할 수 있는 지옥을 선택하리라. 그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축복이었다. 한주영은 어떻게 해서든 그 기회를 잡고 싶었다.

그렇게 최종 시험을 통과하여 정식 나자로 임명받은 날, 한주영은 나례청 로비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어찌나 꺼이꺼이 울었는지 선배 나자들이 놀라서 구경할 정도였다. 인내는 쓰디썼고, 결실은 혀가 녹을 정도로 달았다. 국가 기관 소속의 준공무원으로서 안정적인 수입을 얻게 된 것은 덤이었다.

한주영은 벌써 7년 차 나자였다. 툭하면 사고나 치던 평(平) 나자 시절도 있었다. 여기저기 사고 치고 또 수습하다 보니 어느새 주임이었고, 얼마 전에 선임으로 승진했다. 선임 나자가 되면서부터는 부서장의 직속 부하로 차출되는 행운도 얻었다. 한주영은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초라니, 평 나자, 주임 나자, 선임 나자, 마지막으로 수석 나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최고 직급인 수석까지 달면 좋기야 좋겠지만…. 언감생심이었다. 한주영은 자신의 그릇을 잘 알고 있었다. 수석은 노력으로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윤태희 지금 어딨어?”

윤태희는 축역부 제1팀의 수석 나자였다. 그는 20대 중반인 한주영과 비슷한 또래였으나, 한주영이 초라니였던 시절부터 이미 수석을 달고 있었던, 귀신보다 더 귀신 같은 인간이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한주영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제구부(祭具部)에서 제작한 손거울은 모든 나자가 지니고 다니는 호출 도구로, 휴대폰의 보안을 우려하여 그 대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주로 위치를 파악하거나 업무용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때 쓰였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거울 위에 표식을 휘갈기던 한주영의 얼굴이 굳었다.

“부장님… 오늘, 윤 수석님 휴무입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석주련이 머리를 짚었다. 한주영이 내민 거울 위에는 위치 확인 불가를 알리는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일단 위치는 됐고, 긴급으로 메시지 남겨. 사건 정황 전달하고 확인하는 대로 당장 출동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한주영의 손이 거울 위에서 빠르게 춤을 췄다. 윤태희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석주련은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현대의 나례청은 각 부서마다 중요 업무를 분담하는 시스템으로, 그중에서 석주련이 이끄는 축역부는 나례청의 핵심이었다. 귀신을 쫓는 나례(儺禮)라는 뜻을 문자 그대로 계승하는 부서이기 때문이다. 악귀를 비롯한 인외의 존재와 정면으로 격돌하는 부서인 만큼 나자 중에서도 강한 힘을 가진 나자들만이 모여 있었다.

석주련 역시 한때는 축역부 수석으로서 현장에 군림하던 인물이었다. 지금은 현장에서 물러나 부서 전체의 지휘를 맡고 있지만, 과거의 석주련은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지금도 그의 활약상이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였다. 신이 내린 명장(名將). 석주련에게 따라붙는 경외의 별칭이었다. 모두가 그를 어려워하고 동경했다. 곁에서 그를 모시는 한주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싫, 어요.”

“뭐?”

한주영의 뜬금없는 말에 석주련이 눈을 치켜떴다. 나쁘게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석주련은 잔뜩 짜증이 난 상태였다. 눈이 마주친 한주영은 움찔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라고 답이 왔, 습니다….”

한주영이 공손하게 손거울을 내밀었다.

「시러요.」

세 글자. 모두가 경외하는 석주련이 내린 명령에 대한 답이었다.

거울을 응시하던 석주련이 한참 만에 뭐라 입을 열었다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한주영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상관이 당황하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처음으로 목격한 순간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석주련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꺼내든 것은 석주련의 개인 휴대폰이었다. 석주련은 차분하게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원하던 이름 석 자를 찾아낸 그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두세 번 반복되는가 싶더니 휴대폰 너머로 풍성한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 여보세….

“윤 수석. 내용 공유한 거 못 봤나?”

상관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 험악했다. 한주영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석주련이 통화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주영은 평소 윤태희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같은 축역부이긴 했지만 윤태희는 유달리 얼굴 보기가 힘든 인사였고, 한주영이 처음 입청했을 때부터 이미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오며 가며 멀리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였다. 건너 건너 전해 듣기로는 예의가 바르고, 상식적이며, 다정다감한 성격이라고 했다. 그때는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석주련의 비서가 된 입장에서 한주영이 직접 겪어본 바에 의하면,

- 업무 관련해서 전화하신 겁니까? 휴무일에 연락하는 직장 상사라니, 완전 꽝이다.

윤태희는 사람 심기를 건드리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농담 따먹기 할 상황 아니야. 당장 출동해.”

- 고작해야 윗분들 뒤치다꺼리에 참 정성이십니다. 그래 봐야 예산 나눠 주는 게 전부인데 뭘 신경 쓰세요. 나중에 정권 바뀌면 총리도 바뀔 거 아닙니까. 그냥 있는 애들이나 보내요.

석주련이 입술을 깨물며 잠시 화를 억눌렀다.

“그래, 그래서. 지원 끊기면? 총리 다시 바뀔 때까지 나자들 월급 네가 댈 거야?”

- 설마요. 만약 지원 끊기면 제가 책임지고 저주하겠습니다. 저 흉살 잘 날리니까.

“윤 수석!”

- 주임 두세 명만 보내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일에 무슨 수석씩이나 보내요. 수준 떨어지게.

“……”

석주련은 잠시 말을 잃은 듯했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던 한주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석주련은 알 만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보다 훨씬 지친 표정이었다.

“태희야.”

- 네, 석 부장님.

윤태희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석주련이 이마를 매만지며 말을 뱉었다.

“원하는 걸 말해.”

휴대폰 너머로 윤태희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아무거나?

“그래.”

- 그럼 저 휴가 주실래요?

“기간은.”

- 두 달.

“…….”

석주련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태희야.”

- 네, 석 부장님.

“말이 되는 소릴 해. 축역부 인력 부족한 거 알고 있잖아.”

- 어때서요, 그래 봐야 한 명 비는 건데.

“너 일부러 그래? 그 한 명이 그 한 명이 아니잖아. 수석 한 명 메꾸려면 선임 스무 명은 데려 와야 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아.”

- 그럼 이번 사건에도 저 말고 선임 나자 스무 명 보내면 되겠네요. 전 황금 같은 휴일을 즐겨야 해서 이만 끊을게요.

“야, 윤태희-!”

이 능구렁이 같은 새끼! 울컥한 석주련이 고함을 내질렀다. 한주영은 기묘한 표정으로 둘의 실랑이를 지켜보았다. 석주련에게 저렇게 격의 없이 구는 사람은 오직 윤태희뿐이었다.

-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지? 귀청 떨어지겠네.

“알겠다. 알겠다고!”

두 손, 두 발 다 든 석주련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석주련의 타들어 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너편에서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두 달씩이나 쉬겠다는 건 휴가가 아니라 휴직이다, 이 자식아.”

- 아, 그런가? 그럼 휴직계 써야겠네요.

태연한 대꾸에, 석주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두 달씩이나 쉬겠다는 이유가 뭔데?”

석주련은 습관처럼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체감상 한나절은 지난 것 같은데 입청한 지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저 녀석을 상대하고 있노라면 꼭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한마디로 늙는 기분이다.

- 누구 좀 찾을까 해서요.

“누구를 찾는데?”

- 제 껌딱지요.

“껌딱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한껏 지친 석주련의 귓가에, 윤태희가 짓궂게 속삭였다.

- 예쁘고, 깜찍하고, 저만 바라보는 후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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