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오래전의 기억 속, 사내는 만개한 매화나무 아래서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겸아, 인연이란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그 광활한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시답잖은 대답이었을 것이다. 사내는 손가락으로 땅 위를 가리켰다. 사내가 가리킨 흙바닥 위에는, 마치 핏방울처럼, 매화나무에서 떨어진 붉은 꽃잎이 이리저리 수놓아져 있었다.
‘이걸 보렴. 언뜻 보면 아무렇게나 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정확하게 제자리를 찾아서 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연이란다. 꽃잎 한 장이 땅 위에 떨어지는 사소한 일조차도 인연이 빚어낸 결과지.’
날 때부터 외톨이로 살아온 소년은, 사내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다. 그는 왜 나를 거두었을까. 내가 강한 귀재라서? 왜 하필 나였을까. 똑똑하고 영민해서? 만약 내가 귀재도 아니고 똑똑하고 영민하지도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나를 곁에 두었을까.
‘꽃잎 한 장조차 정확하게 제자리를 찾아서 떨어진다.’
그런 소년에게, 사내의 말은 거대한 선물이자 위로나 다름없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내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제 어깨에 둘러 준 사람이었다. 옷에 묻어 있던 온기가 얼어붙은 몸을 감싸 오던 느낌. 그 감각을 떠올리던 소년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인연이란 따듯한 거구나.
스승이자 부모이며, 유일한 친구였던 사내는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인간과 귀신,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 소년은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었다. 어린 재겸은 떨어진 꽃잎을 구경하는 척,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흙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우리의 만남은 마치 꽃잎이 떨어지듯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구나. 마음이 울렁거려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랬었는데.
‘배신자.’
그땐 몰랐다. 인연이란 ‘악연’도 포함해서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사내는 재겸에게 저주를 걸었다.
***
홀로 남은 재겸은 작은 돌멩이, 꽃잎 한 장만 봐도 고통스러워했다. 미친 듯이 죽고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미친 듯이 살고 싶은 날도 있었다. 이제는 곁에 없는 그를 증오하기도 했고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도 했다. 방향을 잃은 분노와 증오는 긴 세월 동안 천천히 재겸을 갉아 먹었다.
그렇게 재겸은 무수한 계절을 흘려보냈다.
백일곱 번째 가을을 끝으로, 재겸은 지나온 계절을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꽃이 피어 있었고, 꽃이 지는가 싶으면 어느새 눈이 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생동하며 변하는데 오로지 재겸만이 소년과 청년 사이 그 어디쯤에 멈춰 있었다. 변함없이 아름답고 강한 소년은 매일같이 흘러가는 풍경을 무감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사이 숱한 존재들이 재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재겸은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 남아 만남과 이별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늙지도 못하는 이 저주받은 몸뚱이에 주어진 인연이 있다면 그것은 죄다 악연일지도 모른다. 처음이자, 한때 유일했던 인연이 그러했듯이. 재겸이 인간과 연을 맺는 것을 꺼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어느 순간부터 재겸은 더 이상 괴로워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얼핏 보면 마치 아무 일도 없던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재겸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싶어’하지 않았다. 기나긴 증오와 분노 끝에 찾아온 것은 거대한 무기력이었다.
무기력에 매몰된 소년은 마음의 문을 닫고, 오랜 세월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에 정주는 차마 내색 못 할 속앓이를 했다. 정주에게 있어 재겸은, 평생의 은인이자 소중한 벗이었다. 저렇게라도 살아 주는 게 고마웠지만 욕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과거의 언젠가처럼, 눈부신 하늘 아래서 눈부시게 웃고 있는 너의 모습은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재겸아.’
갑갑한 지붕 밑에서 게임기나 들여다보고 있는, 저런 모습 말고.
‘그렇게 재밌어?’
뿅. 뾰뵹. 뿅….
정주의 나지막한 물음은, 게임기에서 흘러나오는 요란한 사운드에 묻혀 버렸다. 재겸은 듣는 둥 마는 둥, 부서져라 게임기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정주는 게임에 열중한 뒤통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얌전하던 재겸이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아, 깰 수 있었는데!’
재겸은 살벌한 시선으로 정주를 노려보았다.
‘시발… 네가 말 걸어서 죽은 거잖아.’
죽기만 하면 내 탓이래…. 정주는 말없이 눈을 피하며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따질 힘도 없고, 티비나 볼 생각이었다. 티비 속에서는 신파로 똘똘 뭉친 일일 드라마가 한창 방영 중이었다. 누가 틀어 놓은 거야? 정주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채널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다시 자세를 바로 세우고 게임기를 고쳐 잡던 재겸이 정주를 곁눈질했다.
‘채널 돌리지 마.’
‘너 게임하느라 티비 안 보고 있잖아.’
‘보고 있는데?’
‘뻥 치시네. 지금 무슨 내용인데?’
‘저 남자, 재산 물려받으려고 신분이랑 다 속이고 부잣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는데 여자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사람을 붙였어. 중요한 장면이니까 돌리지 마.’
속사포처럼 줄거리를 늘어놓던 재겸은 정주의 손에서 리모컨을 뺏어 들었다. 텔레비전의 볼륨을 서너 칸 키웠다. 재겸은 게임기를 주물럭거리는 동시에 일일 드라마까지 힐끔거리는,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
결국 정주가 처량하게 한숨을 쉬었다.
재겸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주변을 기웃거릴 땐, 오로지 반가운 마음이었다. 오랜 세월을 상심하여 누워만 지내던 녀석이 뭐라도 낙을 찾은 게 기쁘면서, 드디어 기운이 생겼나 싶어서 내심 안도했었다. 어쩌면 생동감 넘치는 일상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품었다. 그러나 정주의 기대가 무색하게, 상황은 영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주는 인간의 현대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관심이 많았던 만큼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이며, 전자레인지며, 처음엔 정주 자신이 사용하려고 들여온 것이었다. 그러나 정주가 연예계 데뷔를 준비하느라 서울에 따로 거처를 얻은 사이, 시골집에 있던 모든 물건은 자연스럽게 재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줄곧 소년인 상태로 멈춰 있어서 그런지, 재겸은 의외로 스펀지와 같은 흡수력을 가지고 있었다. 텔레비전, 라디오, 게임기, 냉장고… 아무리 낯선 물건이라도 작동법을 알려 주면 관심 없네, 어렵네, 귀찮네, 툴툴거리면서도 어느 순간 척척 다루고 있어서 정주를 놀라게 만들했다. 그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소년은 완벽한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활달한 성격의 정주는 그런 재겸을 가만히 두고 보질 못했다.
‘재겸아. 요새 바깥에선 카페가 유행이래. 카페 가 볼래?’
‘싫어. 귀찮아.’
‘재겸아, 너 전국노래자랑 좋아하잖아. 너도 한 번 나가 볼래?’
‘내가 왜? 미쳤냐?’
‘재겸아, 꽃집 차려 줄까? 메산이가 꽃 잘 알잖아.’
‘꽃 같은 소리하네.’
집돌이 김재겸을 밖으로 끌어내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다. 전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정주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 맞아. 다 거짓말이야.”
“당신… 어떻게….”
“널 사랑한다고 한 거, 다 거짓말이야. 이제 됐어?”
‘저런 새끼는 씨발 죽여야 돼. 저 여자는 무슨 죄냐?’
새 판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동안, 드라마를 보던 재겸은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할 거면 하나만 하지 않겠니? 티비 볼 거면 이리 앉아서 같이 봐.’
소파에 앉아 있던 정주가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으나 재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금세 게임에 몰입한 모양이었다. 재겸은 바르게 세운 허리를 소파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정주가 공수해 온 비싸고 좋은 소파를 놔두고, 재겸은 항상 딱딱한 바닥에 앉았다. 녀석은 새로운 것에 곧잘 적응하면서도 영 엉뚱한 데서 고집을 부리고 했다.
티비 화면 안에서는 남녀 한 쌍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정주는 지루한 눈으로 화질이 선명한 부부 싸움을 지켜보았다. 내용은 뻔하고 영 유치하기만 했다. 저게 도대체 뭐가 재밌다는 거지. 정주는 재겸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장면이 바뀌어 화면 안에서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등장했다. 오래전에 정지한 재겸의 나이와 비슷한 또래들이었다.
정주가 소파에 반쯤 드러누우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재겸아, 학교 다녀보는 건 어때? 너도 요즘 세상에 태어났으면 지금쯤 고등학교 다니고 있었을 거야. 네 나이대 평범한 인간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아?’
재겸은 평소처럼 고민 없이 싹둑 거절했다
‘그러지 말고 석 달만 다녀 봐. 소원 하나 들어줄게.’
정주는 별 기대 없이 조건을 하나 붙였다.
‘…….’
그런데 재겸은 웬일로 선뜻 거절하지 못했다. 정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레? 평소라면 진작에 싫다고 할 녀석이 웬일로 조용하네. 그저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조건 하나 붙였을 뿐인데 솔깃한 기색이었다. 정주는 재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뭐든 두 번 이상 묻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쩌면…
사냥감의 빈틈을 파악할 때처럼 여우로서의 직감이 번뜩였다.
‘그럼 석 달 말고 한 달로 해! 한 달만 다니자!’
에라 모르겠다, 정주는 재겸이 망설이는 틈을 타서 화끈하게 승부수를 걸었다. 재겸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였고, 마침내 거래가 성사되었다.
정주는 호들갑을 떨며 몇 번이고 진짜냐고 물어보았다. 재겸은 정주를 밀어 내며 무심한 낯으로 다시 게임기를 집어 들었다. 잠깐 사이에 떠오른 소원 하나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약속 꼭 지켜. 소원은 그때 가서 말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