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9)화 (9/348)

#09

재겸은 닫힌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 위에 달려 있는 팻말을 한 번, 문고리를 한 번, 번갈아 가며 시선을 던지던 재겸이 이마를 긁적거렸다.

‘교무실’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하지만 사람 하나 없는 복도도 그렇고,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 역시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들어가도 되는 걸까? 어떻게 찾아오긴 했는데….

“얘, 너 수업 시간에 거기서 뭐 하니?”

복도 한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재겸이 고개를 돌렸다. 교복을 입고 있지 않은 걸 보니 선생인 듯했다. 선생은 재겸의 가슴팍에 매달린 명찰을 한 번 쳐다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재겸?”

선생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친근한 태도로 재겸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분명 초면인데도 엄청나게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선생은 다짜고짜 재겸을 데리고 교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재겸은 얼떨결에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로 그 뒤를 따랐다.

“2학년 3반 전학생 왔어요.”

선생이 재겸을 소개하자, 저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교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겸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 누구라고?”

“전학생이래요.”

“와, 고놈 잘생겼네.”

조용하던 교무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교사들에게 인사를 시킨 뒤, 서 선생은 재겸에게 손짓을 했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재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로 나오자 서 선생이 손끝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재겸아. 아직 수업 중이니까 우선 도서실에 가 있어. 도서관은 4층으로 올라가면 바로 있거든? 안에 사서 선생님 계실 거야. 책 좀 보다가 종 치면 바로 3반으로 내려와. 아, 참. 그리고 내일부턴 늦으면 안 된다? 등교 시간은 알고 있지?”

“네.”

그럼 이따가 보자, 서 선생은 웃으며 재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재겸은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계단으로 향했다. 서 선생 말대로 4층에 오자마자 곧바로 도서실이 보였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재겸이 천천히 문손잡이를 돌렸다.

도서실 내부는 넓고 쾌적했다. 그리고 조용했다. 재겸이 두리번거리며 문을 닫았다. 사서가 있을 거라는 말과는 달리 도서실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낮은 칸막이가 설치된 데스크에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사서는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재겸은 고개를 내밀어 데스크 안쪽을 구경했다. 컴퓨터 두 대와 가지런히 정돈된 필기구, 그리고 애매하게 비뚤어진 의자.

재겸은 비뚤어진 의자 위로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도서실이 워낙 조용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줄줄이 늘어선 커다란 책장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얇은 커튼이 매달린 창문에서 오전의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재겸은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건드리는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 꽂힌 책 위를 찬찬히 훑으며 도서실을 구경했다. 산책하듯 도서실을 배회할 때였다. 재겸이 어느 순간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어…?”

책장의 어두운 구석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재겸은 곧바로 방금 지나친 책장을 향해 뒷걸음질했다.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확실했다.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새까만 자벌레였다.

새끼손가락만 한 자벌레가 허리를 접었다 풀었다 꾸물거리며 재겸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재겸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뭐지? 까만 자벌레는 처음 보는데… 설마 나한테 오는 건가? 자벌레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재겸이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씨발, 뭐야!”

재겸이 단숨에 얼굴을 구기며 다리 한 짝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새까만 자벌레들이 우글거렸다. 재겸을 중심으로 둥글게 포위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족히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책장 위에 있던 녀석처럼, 새까만 자벌레들은 허리를 반씩 접으며 재겸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다리 하나를 피하지 않았으면 재겸이 신고 있는 운동화 위로 올라탔을 것이다.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그새 가까이 다가온 녀석이 반대쪽 발등 위로 올라타려고 했다. 재겸이 들고 있던 다리 한 짝으로 냅다 벌레를 밟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 느낌이 없었다. 이를테면 신발 아래로 뭔가 밟히는 감촉 같은.

재겸이 발을 들어 바닥을 확인했다.

“이건….”

신발 밑창 아래 보인 것은 벌레의 흉측한 잔해가 아니었다. 벌레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대신에 자벌레의 모양 그대로 불에 탄 듯 새까맣게 눌어붙은 자국만 남아 있었다. 마치 그림자가 스며든 것 같았다.

재겸은 깨달았다. 이건 진짜 벌레가 아니다. 아마도 귀재의 눈에만 보이는 벌레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재겸은 손을 뻗어 책장에 꽂혀 있던 책 가운데 아무거나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되는대로 펼쳐서 페이지 한 장을 찢었다. 지익, 찢긴 페이지를 확인한 재겸이 짜증스럽게 종이를 집어 던졌다. 최대한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재겸이 미련 없이 다음 페이지를 찢었다. 또다시 지익, 이번엔 그럭저럭 원하는 모양으로 찢어졌다.

재겸은 그대로 책을 덮었다. 글씨 쓰기 편하도록 찢은 종이 밑에 책을 받쳐 들고, 곧바로 오른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검지를 입 속에 넣고 손끝을 꽉 씹으니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엄습하는 통증에 재겸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아파 죽겠네.”

손가락에서 피가 충분히 떨어지는 걸 확인한 재겸은 찢은 종이 위에 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선혈로 글자를 휘갈겨 쓴 재겸이 재빨리 종이를 손에서 떨어트렸다. 급한 김에 간이로 만든 부적이었다. 자벌레가 우글거리는 바닥으로 피로 쓴 부적이 나풀나풀 추락했다.

재겸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껍데기라면 깨질 것이고, 허상이라면 사라질 것이며, 삿된 것이라면 물러날 것이다.”

재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떨어진 부적이 저절로 타올랐다. 그와 동시에 새까만 자벌레들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졌다. 마침내 부적이 전부 타들어 가는 순간이었다. 우글거리던 자벌레들이 기화하며, 부적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씨, 깜짝 놀랐네.”

깨끗해진 바닥을 확인한 재겸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장에 있던 녀석도 사라졌다. 책을 쥐고 있던 손에서 그제서야 힘이 빠졌다. 뭐지? 이제껏 보지 못한 종류였는데. 저런 게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시꺼먼 색이라 기분 나쁘긴 했지만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이렇게 햇볕이 가득 들어오는 곳에 있었으니 부정한 존재가 아닐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숲이나 산이면 몰라도,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왜, 나를 향해 오고 있었지?

생각에 잠긴 재겸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

도서실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고, 소매를 팔까지 걷어 올린 청년은 손에 머그컵을 들고 있었다. 머그컵을 홀짝이며 도서실로 들어오던 청년은 책을 읽고 있던 재겸을 발견하고 어, 하는 외마디 소리를 냈다.

재겸과 눈이 마주치자, 청년은 씩 웃어 보였다. 웃으니 무척 잘생긴 얼굴이었다.

“안녕.”

재겸은 멀뚱멀뚱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사서인가? 그럼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건가? 선생님치고는 젊은 것 같은데….

고민하던 재겸이 애매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인사를 하는 건 생각보다 어색한 일이었다.

“지금 수업 시간 아닌가? 친구 왜 여기 있어요?”

데스크로 향하던 청년의 시선이 의자 위로 향했다. 의자 위엔 재겸의 가방이 있었다.

“설마, 땡땡이인가요.”

청년이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재겸의 가방을 집어 들고서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단순히 구경하려는 모양이었는지, 청년은 이내 가방을 데스크 한쪽에 얌전히 올려 두었다.

“선생님이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해서. 요.”

습관적으로 반말이 튀어나왔다. 재겸은 아차 싶어 재빨리 말끝을 이어붙였다. 다행히 이상함을 느끼진 못했는지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편하게 있어요.”

사서 청년은 자리를 잡고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침 사서가 자리를 비워서 다행이었다. 사서와 같이 있을 때 그 벌레와 마주쳤다면 꽤나 곤란했을 것이다.

책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재겸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흠칫했다.

아까 바닥에 버려둔, 잘못 찢은 책 페이지를 깜빡 잊고 있었다. 재겸이 저도 모르게 사서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사서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책을 구경하는 척하며 종이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일 때였다.

“저기, 친구.”

대뜸 사서가 재겸을 불렀다. 재겸은 순간 뜨끔했지만, 구겨진 종이를 주먹 속에 말아쥐며 “네.”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거기, 그 앞에 문학 서가에서 책 한 권만 가져다줄 수 있어요? 아마 세 번째 칸 중간쯤에 보면 있을 거예요. 제목은 지(知)와 사랑.”

아, 깜짝이야. 재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학 서가로 갔다. 설마 들켰나 싶던 찰나에 알고 보니 부탁을 해 와서, 얼떨결에 사서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되었다. 재겸은 종이를 손에 쥐고 책장을 빠르게 훑었다. 지와 사랑. 지와 사랑. 지와 사랑…. 사서 청년이 말해 준 위치를 열심히 찾아 보았으나 지와 사랑이라는 책 제목은 보이질 않았다.

“안 보여요?”

“잠, 잠시만요.”

재겸은 이게 뭐라고 약간 쫓기는 기분이 되었다. 지와 사랑. 지와 사랑. 재겸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책을 찾는 데 집중했다. 세 번째 칸의 중간쯤에…. 재겸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때, 세 번째 칸이 아니라 가장 위 칸에 꽂혀 있는 책을 발견했다.

재겸은 종이를 쥐고 있지 않은 빈손을 뻗었다. 책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큼지막한 손 하나가 튀어나와 재겸보다 한발 빠르게 책을 가져갔다. 늦어지니 본인이 찾으려고 왔던 모양이었다. 바로 뒤에 사서 청년이 가깝게 붙어 서 있었다. 청년은 재겸보다 키가 살짝 컸는데, 어깨가 넓어서 그런지 마치 뒤에 벽이 있는 느낌이었다.

“아, 위치를 헷갈렸어요.”

헛수고를 하게 된 재겸이 눈을 흘기자, 사서가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네.”

재겸은 괜찮다고 하는 대신에 당당하게 사과를 받았다. 그에 사서 청년은 픽 웃으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손으로 내려갔다. 재겸은 내심 당황했다. 행여 찢어진 종이가 보일세라 쥐고 있던 주먹을 꽉 말아 쥘 때였다. 사서 청년이 난데없이 재겸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청년이 잡은 손은 반대쪽,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다.

청년이 들어 올린 재겸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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