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0)화 (10/348)

#10

“손에 상처가 났네요?”

아까 부적에 글씨를 쓰느라 일부러 만든 상처였다. 상처가 깊진 않았지만 아직도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책을 꺼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청년의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잠시 멈칫했던 재겸이 대충 둘러댔다.

“책 넘기다가 베였어요.”

“종이에 베였는데 이렇게 됐다고요?”

“네.”

“살이 좀 파인 것 같은데?”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재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적당히 넘어갈 것이지, 귀찮게 구는 것이 못마땅했다. 게다가 딱히 큰 상처도 아니었다. 재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잡힌 손을 슬쩍 뺐다. 그러자 청년도 별 말 없이 재겸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대로 등을 돌려 데스크로 돌아간 청년은 허리를 숙여 서랍을 열더니,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재겸은 그 틈을 타서 쥐고 있던 종이를 재빨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자, 손 이리 줘요.”

청년이 서랍에서 꺼내 온 것은 해바라기가 그려진 반창고였다. 청년은 반창고의 포장지를 벗겨 내더니, 재겸이 뭐라 하기도 전에 제멋대로 손을 가져갔다. 얼떨떨하게 서 있던 재겸이 움찔하며 손을 물리려고 했다. 그러자 청년이 슬쩍 눈을 들어 재겸을 바라보았다.

“아파요?”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시선을 내렸다.

“아니요.”

아프진 않았지만 왠지 기분이 묘했다. 청년은 반창고가 살갗에 잘 접착되도록 재겸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매만진 후에야 손을 뗐다. 둘은 잠시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다 됐어요.”

때마침 데스크 위에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청년은 데스크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으며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나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재겸이 꼼꼼히 달라붙은 반창고를 문지르며 청년을 곁눈질할 때였다.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밝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종치면 내려오라고 했었지….

서 선생의 말을 떠올린 재겸은 데스크 안쪽에서 가방을 챙겨 나왔다. 청년은 간혹 응, 근데, 와 같은 짧은 대답과 함께 수화기 너머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통화에 여념 없는 모습이어서, 재겸은 별다른 인사 없이 청년을 지나쳤다. 조용히 도서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친구, 이제 가요?”

고개를 돌리자 청년은 귓가에서 휴대폰을 멀리 떼어 낸 채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응시하던 청년이 어느 순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주 놀러 와요.”

청년은 전화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재겸을 향해 가볍게 흔들었다.

“…….”

재겸은 말없이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 도서실을 빠져나왔다. 어수선한 복도를 걸어 나가다가, 재겸은 불현듯 사서가 붙여 준 반창고에 시선을 던졌다.

쓸데없이 친절이 과한 인간이다.

재겸은 인간을 믿지 않았다. 귀신이 악의를 면면에 드러내는 존재라면, 인간은 악의를 호의로 위장하는 존재였다. 그간 당한 경험들을 미루어 보면 그랬다. 그래서 재겸은 인간의 호의가 언제나 불편했고 성가셨다.

학교에 가겠냐는 정주의 제안에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것만 이룬다면 더 이상, 인간이 바글거리는 학교 따위에 볼일은 없었다. 재겸은 검지에 붙은 반창고를 문질거렸다. 감촉이 까칠했지만 썩 싫진 않았다.

“친구….”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재겸은 계단을 내려갔다.

***

제구부 제1팀 수석 나자, 이영신의 손에는 열심히 깎다 만 나무토막이 들려 있었다.

벼락 맞은 단풍나무를 잘라 온 것이었다. 제구를 만들 적에는 영험한 재료가 필요했다. 이번에 손에 얻은 나무는 꽤 강한 목신(木神)이 깃들어 있던 탓에 벌목하는 데 애를 좀 먹었다. 나무나 바위와 같은 영험한 자연물에 손을 댈 적에는 신중을 기해야 했다. 잘못하면 신령이 노해 동티를 옮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티를 방지하기 위해선 제사를 올리거나 부적을 써야 했다. 제사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보통 부적부에서 부적을 발급받아서 쓰곤 했다. 이번에도 가장 무난한 3급 벌목부(큰 나무를 옮기거나 벌목할 때, 나무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는 부적)를 받아서 붙였는데, 이게 웬걸. 어림도 없었다. 벌목에 나선 제구부 선임 나자 두 명이 부정을 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혼이나 목숨엔 지장 없이, 팔 하나를 못 쓰게 된 정도로 끝났다는 것이었다. 그 둘은 정화부의 손을 빌려 자그마치 이틀 동안 씻김을 받고 나서야 팔을 원래대로 쓸 수 있었다.

덕분에 정화부에서 제구부에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고, 그에 열이 받은 이영신이 손수 출격하여 나무를 베어 왔던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나무토막이 그 전리품이었다. 원래 제구를 제작하는 일은 깎고 다듬는 내내 일정한 귀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다른 이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드는데, 이영신은 어깨에 휴대폰을 받쳐 놓고 통화를 하며 제구를 만들고 있었다. 물론 수석씩이나 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 상식적으로 우리 애들이 뭘 잘못했냐? 부적부에서 부적 잘못 줘서 그런 거 아냐, 애초에 1급 벌목부 줬으면 우리 애들이 부정 탔겠냐고. 내 말이 틀리냐? 근데 정화부에선 우리한테 눈치 주고, 이 시바알. 내가 가서 다 조져 놓으려다가 참았어.”

이영신은 휴대폰에 대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열심히 나무를 깎아 내던 이영신이 손을 멈췄다.

“야, 듣고 있어?”

- 친구, 이제 가요?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멀어졌다.

- 자주 놀러 와요.

이영신이 눈을 끔뻑거렸다.

“야. 윤 수석.”

- 너 말고. 잠깐 인사 좀 하느라.

“뭐야, 너 혼자 있는 거 아니었어? 누구랑 같이 있었나 보네?”

- 지금은 혼자 있어.

“어딘데?”

- 학교 도서실.

“도서실? 도서실은 왜?”

- 나 암행 나왔어. 사서로 잠입했거든.

이영신이 어깨로 받치고 있던 휴대폰을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반쯤 깎다 만 나무토막이 손에서 벗어나 책상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뭐? 뭐로 잠입해?

“......”

잠시 침묵하던 이영신은 콧구멍을 몇 번 벌렁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숨이 넘어갈 정도로 와학학, 폭소하기 시작했다.

***

이영신과 윤태희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영신은 윤태희보다 일찍 나례청에 입청해 먼저 선임 직급을 달았다. 윤태희는 이영신보다 1년 늦게 입청했는데, 입청하자마자 이영신을 앞지르더니 초고속 승진을 했다. 이영신이 윤태희를 시기하고 질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영신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윤태희를 졸졸 쫓아다녔다. 저보다 강한 또래는 처음 본다며 친구가 되자고 졸라 댔던 것이다. 물론, 이영신이 자신의 능력에 여유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영신은 서두르지 않아도 자신이 언젠가 수석을 달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영신아. 귀청 떨어지겠다, 좀 떨어져서 웃어.”

이영신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한참을 낄낄거렸다.

- 야, 너 같으면 웃음이 안 나오게 생겼냐? 뭔, 잠입을 해도, 푸학!

보통 초라니는 10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삼았다. 귀재는 저마다 총량의 귀기를 지니고 태어나는데, 귀기가 강한 정도에 따라서 귀신을 보고, 듣고, 육체적인 접촉까지 할 수 있었다. 귀기란 쉽게 말해 영적 에너지를 뜻한다고 볼 수 있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귀기가 가장 많이 잠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간혹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귀기를 다룰 줄 모르는 상태로 일정 나이가 지나면 귀기는 점점 둔해지고 무뎌졌다. 때문에 그 시기가 지나기 전에 훈련을 거쳐 귀기를 갈고 닦는 법을 체득해야 했다. 강한 귀기를 타고난 사람이 귀기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야말로 귀한 황금을 녹여 원하는 형태로 제련하는 격이었다.

강한 귀기를 지닌 나자는 똑같은 부적 및 제구를 사용하더라도 월등히 강한 효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나자에게 있어서 귀기란 재능의 총체라고 할 수 있었다. 암행부 나자들은 초라니 모집 시기가 되면 어린 귀재를 찾아 전국 각지의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보통은 교사로 신분을 위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선생으로 잠입하면 수업해야 되잖아. 난 가르치는 일엔 젬병이야.”

가끔 예외도 있긴 했다.

-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서실에 누가 오냐?

“영신아, 다 너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책 읽으러 오는 애들 많아.”

윤태희는 필사적으로 반박하는 이영신을 다독이며,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뒤적거렸다. 바지 주머니엔 옥으로 된 도장을 넣어 뒀었다. 이영신이 만들어준 도장이었다. 옥도장은 귀기를 탐색할 때 쓰는 특별한 제구로, 주로 귀재를 찾을 때 사용했다. 도장에 인주를 묻히고, 손에 귀기를 실은 상태에서 바닥의 각 모서리에 도장을 찍으면, 그 공간 안에는 벌레가 생겨났다.

귀기로 만들어 낸 특별한 자벌레는 귀기를 가진 사람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웬만한 귀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신묘한 녀석이었다. 귀감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열려 있는 사람만 벌레를 육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윤태희는 이 도서실 안에 도장을 찍어 놓았다. 만약 이곳에 귀재가 들어온다면 벌레가 솟아 나와 귀재의 몸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윤태희는 이제껏 두 명의 귀재를 만났다.

그러나 윤태희는 두 학생에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잠시 지켜볼 생각이었다. 귀기가 강한 정도에 따라 달라붙는 자벌레의 숫자가 달라지기 마련인데, 그 둘 모두 한 마리를 매달고 있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윤태희는 이왕이면 강한 귀재를 원했다. 어차피 두 달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차분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윤태희는 바지 뒷주머니에 얌전히 넣어 둔 옥도장을 꺼냈다. 영신과 통화를 하는 내내 옥도장을 만지작거리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손을 멈췄다.

- 본청 건너편에 새로 생긴 가게 가 봤냐? 거기 돈까스가…….

“영신아.”

- 엉?

“네가 나한테 준 옥도장 있잖아.”

- 어, 그거. 왜.

윤태희가 손바닥에 든 도장을 내려다보았다.

“깨졌어.”

이영신이 만들어 준 도장은 정중앙을 기준으로 금이 가 있었다.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정확하고도 깨끗하게 금이 쩍 가 있는 형상이었다. 놀란 이영신이 소리를 질렀다.

- 그게 왜 깨져?!

“모르겠어. 지금 보니까 깨졌네.”

- 야! 그거 내가 얼마나 개고생해서 만든 건데!

깨진 옥도장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벌레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고, 도서실에 도장을 찍어 둔 일도 전부 소용없는 셈이다.

“왜 깨졌을까…. 아침만 해도 멀쩡했는데.”

생각에 잠긴 윤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왜긴 왜야! 네가 떨어트렸으니까 그런 거지!

“떨어트린 적 없다니까.”

이영신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 떨어트리지도 않았는데 깨졌다고? 너 혹시 벌레 싹 다 죽였어? 벌레가 전부 죽으면 도장이 깨지긴 해.

“무슨 소리야, 벌레는 손도 안 댔어.”

- 그러니까! 그럼 뭐 떨어트려서 깨진 거겠지.

“도장은 내가 하루 종일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떨어트리긴 뭘 떨어….”

아. 윤태희가 도중에 말을 멈췄다. 고요하던 눈동자 위로 예리한 섬광이 스쳤다. 떨어트린 적 없는 도장이 저절로 깨져 있고, 벌레가 전부 죽으면 도장은 깨진다. 그리고 벌레는 귀감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아침엔 멀쩡하던 도장이 잠깐 사이에 깨졌다. 그렇다면….

- 너 옥 깎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한 시간만 깎아도 온몸에 귀기가 다 빠진다고! 그것도 내가 얼마나 어렵게 구한 옥인데, 내가 예전에 어느 귀신 들린 우물에 갔는데 거기서…

윤태희는 귓가에서 휴대폰을 멀찍이 떼어 냈다. 쉼 없이 조잘대는 이영신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윙윙거렸다. 윤태희는 깨진 옥도장을 빤히 내려다 보다가, 정돈된 데스크 위를 응시했다. 데스크엔 아까 올려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지(知)와 사랑.

설마…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봐도, 벌레 한 마리 매달려 있지 않아서 시시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딘지 쌀쌀맞던 소년을 떠올려 낸 윤태희가 턱을 괴었다. 긴 손가락이 마치 피아노를 치듯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섹시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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