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1)화 (11/348)

#11

“으에. 그래서, 시적 화자는 지금, 으잉. 임금을 향한 충정을, 엥. 노래하고 있다.”

말투가 느리기로 소문난 문쌤은 안경을 추켜세웠다. 문쌤은 성이 문 씨가 아니라 김 씨였는데도 아이들 사이에서 문쌤이라고 불렸다. 문쌤은 자신에게 붙은 이 호칭이 문학 선생님의 줄임말에서 기원했다고 믿었다. 물론,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문쌤은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리고… 정수리가 홀라당 벗겨진 대머리였다. 문어 선생님. 이것이 안타까운 진실이었다.

수업을 듣고 있는 반 아이들은 전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한참 지루하고 허기진 3교시였다. 문쌤은 실없이 당구대를 까딱거리며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말투가 느린 만큼 시간을 꽉꽉 채워서 수업하는 열정적인 문쌤 덕분에, 아이들은 몸을 배배 꼬며 스피커를 힐끔거렸다. 아이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순간, 마침내 수업 종도 쳤다.

“피자 빵!”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던 이주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 저. 으잉? 임마, 선생님 아직 책도 안 덮었다.”

문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적했지만, 이주열 패거리는 이미 교실을 뛰쳐나간 뒤였다. 조용하던 복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매점을 향해 선두로 달려 나가던 이주열은 뒤따라오는 녀석들을 보며 낄낄거렸다.

“조빱들아! 1등은 형이 먹는, 윽!”

뒤를 보고 달리던 이주열은 불시에 부딪친 한쪽 어깨를 감싸 쥐었다.

“씨발, 야! 눈깔 제대로 안 뜨고 다니냐?”

이주열은 자신과 충돌한 방해물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방해물은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였다. 앞을 보지 않고 달린 자신의 잘못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열은 눈앞에 넘어져 있는 녀석을 짜증스럽게 쏘아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아! 복도에서 뛰지 말랬지!”

때마침, 계단을 올라오던 서 선생이 엄한 어조로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러자 이주열을 비롯해 신나게 달려오던 아이들이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이들은 발을 늦추는 척하며 부랴부랴 복도를 빠져나갔다.

아이들을 불러 세울까 고민하던 서 선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때였다.

“저런 철딱서니 없는 자식들… 어머, 재겸아!”

복도에 주저앉아 있던 재겸을 발견한 서 선생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괜찮니?”

걱정스러운 물음에, 봉변을 당한 재겸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서 선생은 화난 표정으로 아이들이 뛰어간 방향을 노려보았다. 안 되겠다. 종례 시간에 따끔하게 혼을 내야지. 안 그래도 이주열은 반에서 가장 골치를 썩이는 녀석이었다.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키던 재겸은 저도 모르게 속엣말을 뱉었다.

“아, 저 개새….”

“응? 뭐라고?”

“아. 아뇨.”

서 선생이 귀를 바짝 붙이며 되묻자, 재겸은 황급히 말을 흐렸다. 서 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재겸의 팔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3반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겸은 앞장선 서 선생의 뒤를 졸졸 따라 교실로 들어섰다.

“자, 잠깐 주목! 다들 자리에 앉아.”

서 선생은 칠판을 탕탕 두들기며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난데없는 담임의 등장에, 쉬는 시간을 만끽하며 교실을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의아한 얼굴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서 선생의 곁에서 가방을 메고 선 재겸을 향해 시선이 모여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늘 전학생 올 거라고 했었지? 얜 재겸이야. 김재겸.”

잠시 조용해졌나 싶던 교실이 금세 수선스러워졌다. 서 선생이 생긋 웃으며 재겸의 팔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교탁 정중앙에 선 재겸이 멀뚱멀뚱 서 있으니, 서 선생은 재겸에게 눈짓을 했다. 인사하라는 건가? 재겸이 정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모두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재겸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 안녀어엉.”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다.

“어, 만나서… 반갑다.”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재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뭘 더 말해야 되나? 재겸이 손가락에 붙은 반창고를 만지작거렸다. 재겸의 낯은 일견 무심해 보였지만, 사실은 맹렬히 머리를 쥐어짜 내는 중이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낯설었던 것이다.

재겸이 말을 골랐다.

“어… 엄마 아빠 말씀 잘 듣고, 물가엔 가지 말고, 길가에 떨어진 물건은 함부로 줍지 말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니까… 차분한 마음으로 덕 쌓으면서 살아라.”

“…….”

“…….”

“…….”

“…….”

소란스러운 복도와 비교될 정도로 싸한 정적이 교실에 내려앉았다. 반 아이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뭐? 왜?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린데. 재겸이 스르륵 눈을 굴려 서 선생을 곁눈질했다. 서 선생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도 말했으면 되지 않았나? 멀뚱멀뚱 시선을 받아 내던 재겸이 반창고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행복한 여생 보내라.”

무덤덤한 덕담을 끝으로 재겸은 교탁에서 내려왔다. 그때, 교실 뒷문이 열리며 입에 빵을 물고 있던 이주열 패거리가 들이닥쳤다. 피자 빵을 우물거리던 이주열은 교탁 앞에 서 있는 재겸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 초상난 분위기는….”

이주열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 선생이 어색하게 외쳤다.

“자… 그, 그럼… 박, 박수!”

짝짝짝… 짝… 짝….

축 처진 박수는 경쾌한 수업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

점심시간이 되자 반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에서 뛰어나갔다. 창가 옆 구석 자리에 앉은 재겸은 잉크 냄새가 펄펄 나는 새 교과서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코사인이 뭘 어쨌다는 거야? 수업을 듣긴 했는데 뭔 소린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저기, 재겸이라고 했지?”

재겸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선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이름은 조영우라고 해. 반가워.”

조영우가 말갛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조영우는 재겸의 앞자리였다. 수업 시간 내내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던 걸 봐선 성실한 성격인 듯했다.

“응. 그래.”

재겸이 다시 교과서로 시선을 내렸다.

“점심시간인데, 밥 안 먹어?”

아. 밥때였구나. 반 아이들은 재겸을 힐끔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다들 어딜 가는지는 모르지만 바빠 보여서 적당히 교과서나 뒤적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급식실 어딘지 모르지? 내가 알려 줄게. 밥 같이 먹을래?”

조영우가 말갛게 웃어 보였다. 다들 한두 명씩 모여 다니는데 조영우만은 재겸처럼 혼자였다. 재겸은 조영우를 빤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낯선 사람과 겸상하는 게 썩 내키진 않았지만, 조영우는 드물게 맑고 순수한 기운을 가진 녀석이었다. 잠깐 정도야 어울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겸은 조영우를 뒤따라 교실을 나섰다. 나란히 복도를 걷는 둘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재겸이 넌 어디 살아?”

눈치를 보던 조영우가 먼저 용기를 냈다.

“나 집 멀어. 저기 산 근처야.”

“그렇구나. 그럼 버스 타고 다니겠네?”

“어? 어… 17번.”

“정말? 나도 17번 타는데!”

조영우가 눈에 띄게 반색하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진짜 반갑다. 이따 마치면 집에 같이 갈래?”

“뭐… 그러든가….”

재겸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영우는 같이 집에 갈 친구가 생겼다는 게 몹시도 반가운 모양이었다. 강아지로 따지면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따 버스 타기 전에 와플집 들렀다 가자. 우리 학교 명물인데….”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 본관을 빠져나왔다. 급식실로 향하는 동안 조영우는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저기가 강당이고, 저기는 체육관이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에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할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나비 한 마리가 재겸의 시야로 들어왔다.

조영우의 말을 듣고 있던 재겸이 스르륵 눈동자를 굴려 나비를 곁눈질했다. 아무 색깔도 없이 투명한 나비였다. 기이한 나비에게선 은은한 향기가 났다. 팔랑팔랑 날갯짓하던 나비는 재겸을 지나치더니 조영우의 주변에서 맴돌았다. 조영우는 나비가 가까이 다가와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조영우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재겸은 조영우에게 한 번 시선을 던졌다가, 슬쩍 손을 들어서 나비를 쫓아냈다. 근처에서 얼쩡거리니 성가셨다.

“응? 왜 그래?”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는 재겸의 모습에, 조영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좀 날아다녀서.”

재겸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조영우는 더 물어보지 않고 하던 얘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급식실이 딸린 강당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잠시 사라졌던 나비가 어느 순간 또다시 조영우의 곁에서 팔랑거렸다. 재겸은 다시 손을 들어서 나비를 부드럽게 밀쳐 냈다.

“재겸아. 너 방금 뭐 한 거야?”

그런데, 조영우가 이번에는 걸음을 멈췄다.

“날파리 때문에….”

재겸은 대충 궁색한 핑계를 댔다. 그러자 조영우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뭐지? 본인 얘기에 집중하지 않아서 화라도 났나…. 재겸은 저도 모르게 조영우의 눈치를 살폈다. 조영우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또렷한 시선으로 재겸과 눈을 마주쳐 왔다.

“저기, 재겸아. 너 혹시 나비 봤어?”

조영우가 재겸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며 조심스레 물었다.

“…….”

재겸은 흠칫하며 조영우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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