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재겸은 조영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뭐야… 이 녀석 귀재였나?
대답을 기다리는 조영우의 눈동자엔 묘한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조영우를 가늠하던 재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재겸은 자신이 귀재임을 밝힐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든, 저와 같은 귀재든, 어느 쪽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귀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찌 되는지 재겸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재겸은 우선 떠보기로 했다.
“너 방금 전에….”
조영우가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웬 나비? 나비가 어딨는데.”
재겸은 조영우의 말을 싹둑 끊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재겸이 시치미를 떼자, 아니나 다를까 조영우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안심하는 것 같으면서도 살짝 실망한 눈치였다. 재겸은 조영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초점 바깥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의 움직임을 쫓았다.
“아, 아니. 아니야. 미안. 내가 잠깐 착각했나 봐.”
“착각?”
“응, 요새 들어서 자꾸 뭔가 헛것이 보여서… 기가 허해졌나? 하하,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해. 방금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조영우는 황급히 말을 얼버무리며 손을 내저었다. 나비는 어느새 조영우의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조영우는 나비의 기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조영우의 눈에는 나비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혹시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건가….
재겸은 긴가민가했다.
***
재겸은 소란스러운 급식실을 두리번거렸다.
어깨에 앉아 있던 나비는 어느 순간 알아서 사라진 뒤였다. 조영우는 익숙한 손길로 식판과 수저를 챙긴 뒤, 재겸에게 손짓을 했다.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재겸이 조영우를 따라서 눈치껏 식기를 집어 들었다. 조영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자 어느새 식판이 금세 묵직해졌다.
재겸은 식판에 담긴 음식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메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잡곡밥과 조갯살이 들어간 미역국, 달큰한 돼지 불고기,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잡채와 깍두기였다. 조영우와 마주 보고 앉은 재겸은 수저를 들어 반찬을 뒤적거렸다. 제일 먼저 국물부터 후루룩 떠 마셨다. 급식을 처음 맛본 재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륭 고등학교의 급식은 지역에서도 맛이 없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다들 맛없는 급식 때문에 전학을 가고 싶다고 하소연을 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그나마 제일 맛있는 반찬만 골라 먹고 나머지는 잔반통에 쏟아붓곤 했다. 덕분에 매점은 언제나 학생들로 인산인해였고, 선생들 중에서는 아예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재겸의 충격적인 표정을 확인한 조영우가 난감하게 웃어 보였다. 맛이 없어서 놀랐구나. 재겸의 입에도 급식이 영 아닌 모양이었다. 재겸은 밥을 한가득 퍼서 미역국에 풍덩 말았다.
“좀 그렇지?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건데….”
머쓱하게 중얼거리던 조영우가 말끝을 흐렸다. 음식을 버리기 쉽게 한곳에 모으려는 줄 알았는데, 재겸은 식판 옆에 팔 하나를 비장하게 올리고 열심히 숟갈질을 하기 시작했다. 조영우는 재겸이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젓가락으로 깍두기를 집던 재겸이 조영우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 엄청 맛있게 먹어서….”
“엄청 맛있으니까.”
재겸이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 그렇구나….”
재겸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성실하게 식사에 임했다. 조영우는 숟가락 위에 고기를 차곡차곡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영우는 자신의 식판에 있던 불고기 전부를 재겸의 식판으로 옮겼다. 난데없이 늘어난 고기반찬에 재겸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야?”
“고기 좋아해? 손 안 댄 거야.”
“왜?”
“난 고기 안 좋아하거든.”
재겸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는 눈빛으로 조영우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밥이 정말 맛있나 보네. 조영우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조영우가 얼른 먹어, 하며 손짓하자 재겸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 헛것이 보인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 때문에 계속 마음이 쓰이던 참이었다. 재겸이 혹시라도 자신을 이상하게 볼까 봐 내심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다행히 재겸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재겸이 밥 먹는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조영우가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재겸아. 혹시 운세 보는 거 좋아해?”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던 재겸이 눈을 들었다.
“혹시 운세 보는 거 좋아하면 내가 이따 봐 줄게.”
“네가 봐 준다고?”
“내 취미가 윷점 치는 거거든. 하하, 할아버지 같지? 아. 윷점이 뭐냐면 윷을 세 번 던져서 그날의 운세를 점치는 건데, 별거 아니지만 은근히 재밌더라구.”
조영우가 베시시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예전부터 심심풀이로 했는데 요즘은 꽤 잘 맞는 것 같아.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점괘가 나왔거든. 근데 오늘 재겸이 네가 전학을 왔잖아. 어때? 신기하지?”
무심하게 젓가락을 놀리던 재겸이 문득 손을 멈췄다.
“뭐 나왔는데.”
“응?”
“윷 세 번 던져서 뭐 나왔냐고.”
조영우가 골똘한 표정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아… 으음, 처음엔 도. 두 번째는 모. 마지막이 뭐더라… 아! 걸. 걸이었어.”
“도, 모, 걸….”
재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조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모걸. 해석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거든.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정확히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그런 뜻이었던 것 같아.”
“…….”
“아! 지금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면 되겠….”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재겸이 탁, 소리가 나도록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던 조영우가 멈칫하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밥 안 먹냐?”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냉랭해진 재겸의 태도에 조영우는 당황했다. 아, 나도 모르게 들떠서 말이 너무 많았나. 조영우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미, 미안….”
조영우가 조그맣게 사과하자, 재겸이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곳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까 헛것이나 보는 거야.”
“…….”
“정신 똑바로 차려.”
“…….”
조영우는 말문이 막혔다. 재겸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정곡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재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재겸은 조영우가 건네준 고기반찬을 전부 남겼다.
***
조영우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한 아이였다. 숱한 잔병치레에 시달리느라 툭하면 병원 신세를 졌고, 건강한 날은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많이 건강해진 편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아파서 병결하거나 조퇴하는 일이 잦았다.
자주 학교에 빠지다 보니 조영우는 친구를 깊게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였다. 조영우는 전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만큼은 꼭 놓치지 않고 그 애와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집도 같은 방향, 심지어 같은 버스를 타는 기막힌 우연까지 겹쳤다.
그리고 지금….
조영우는 홀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급식실에서 교실로 돌아오는 동안, 재겸과 조영우는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종례가 끝나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니 재겸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학교 끝나면 같이 집에 가자고 했었는데, 역시나 흐지부지된 모양이었다.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영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 가지고….”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헛것이 보인다는 둥 헛소리를 해 댄 걸로도 모자라서, 점괘가 잘 맞는다는 둥 한심한 이야기나 늘어놓았으니 재겸 입장에서는 당연히 싫었을 것이다.
조영우가 윷점을 치기 시작한 건 1년 전, 시시콜콜한 생활 정보를 알려 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간단하면서도 나름 체계가 있는 것 같아서,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 봤더니 왠지 얼추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영 애매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심심풀이로 몇 번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괘가 들어맞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조영우는 이것도 하면 할수록 느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조영우는 길을 걷다 무심코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귓가에서 웬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영우는 별생각 없이 나비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나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이한 느낌에 다시 쇼윈도를 쳐다봤더니, 유리에 비친 저의 곁에선 여전히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저기선 나비가 보이는데, 이곳엔 나비가 없다.
‘뭐, 뭐야….’
당황한 조영우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고, 이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일상이 흘러갔다. 그후 며칠이 지났고 그 일은 잊히는 듯했다. 그러나 정말 잊기 전, 조영우는 다시 나비를 발견했다. 이번엔 쇼윈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조영우는 그때 열감기를 앓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별반 대수롭지 않은 심정으로 아, 나비네, 하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위화감이 들었다. 나비의 몸체가 투명해서, 날개 뒤로 물건이 비쳤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조영우는 현재 계절이 겨울이라는 사실을 번뜩 떠올려 냈다.
‘…….’
조영우는 그날 결국 정신을 잃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조영우의 눈에 본격적으로 나비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도 있었지만, 나비는 어느 순간 불현듯 나타났다. 그리고 윷점을 치면 백이면 백, 그날 하루를 완벽하게 예견하는 점괘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나비와 윷점. 조영우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 곳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까 헛것이나 보는 거야.’
그런가. 정말, 그럴지도….
재겸이 차갑게 쏘아붙였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맴돌았다. 조영우가 착잡한 얼굴로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추슬렀다. 오늘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거기, 학생?”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땅만 보고 걷던 조영우가 고개를 들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낯선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뭐 떨어트렸어요.”
“저, 저요?”
“네.”
조영우가 자신의 발밑 여기저기를 살폈다. 서 있던 자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찾아봤지만, 보도블록 위에는 딱히 뭐가 없었다. 바람에 굴러다니는 너덜너덜한 빵 봉지 하나가 전부였다.
“아, 아무것도 없는데….”
“제가 방금 주웠거든요.”
“…네?”
조영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그냥 주면 되는 거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영우를 향해,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자는 일견 평범해 보였다. 조영우에게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턱 하니 손을 내밀어 보였다.
“자, 받아요.”
여자는 마치 계란을 쥐고 있는 것처럼 손을 오므리고 있었다. 물건이 깨지지 않게 조심조심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조영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자의 주먹 근처로 손바닥을 펼쳤다.
“어… 이, 이거….”
조영우가 눈을 크게 뜨자, 여자가 생글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학생 거, 맞죠?”
여자의 손안에서 투명한 나비가 나풀나풀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