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6)화 (16/348)

#16

재겸은 페인트를 칠한 익숙한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잘 가꾼 넓은 마당을 지나 현관에 다다른 재겸은 발을 탈탈 털어 신발을 대충 벗어 던졌다. 반나절 만에 돌아온 집은 평소처럼 조용했다. 베이지색 컨버스가 신발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한쪽에는 손바닥에 들어올 만큼 앙증맞은 꼬까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메산아.”

재겸의 부름에도 집안에선 이렇다 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갔나? 재겸은 가방을 내려놓은 뒤, 현관문을 열어 마당을 내다보았다. 메산아. 재겸이 재차 부르자, 바깥에서 재겸의 허리쯤 오는 작은 아이가 부랴부랴 현관으로 뛰어들었다. 메산이는 재겸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짓더니, 한달음에 달려와 재겸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리-!”

“뭐야. 어디 있었어?”

“어어, 뒷마당에요! 나리, 잘 다녀오셨어요?”

메산이가 해맑은 얼굴로 재겸의 허리에 얼굴을 부볐다. 흙장난을 하다가 왔는지 얼굴이며 손이며 죄다 꼬질꼬질했다. 방긋 웃으며 저를 반갑게 맞이하는 메산이를 내려다보다가, 재겸이 대뜸 엄한 표정을 지었다.

“학교는 어떠셨….”

“너 또 맨발로 돌아다녔냐?

“아차! 그, 그게.”

“신발 신고 다니라고 몇 번을 얘기했냐.”

반가움도 잠시, 재겸이 나무라자 메산이가 시무룩한 낯을 했다.

“일백스물한 번이요….”

아니 그걸 셌냐. 메산이의 정직한 대답에 재겸은 어이가 없었다. 재겸이 장난스럽게 메산이의 코를 잡아당기자 메산이가 눈을 질끈 감으며 아야야, 소리를 냈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재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재겸은 메산이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잘 놀았어?”

재겸의 물음에 메산이는 금세 헤헤거렸다.

“네! 너구리가 놀러 왔었어요.”

“너구리? 걘 또 누군데?”

“며칠 전에 산 중턱에 놀러 갔을 때 만난 친구예요.”

“어이고. 넌 친구도 많다.”

재겸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욕실로 향했다. 메산이가 그 뒤를 졸졸 쫓았다. 재겸이 세면대에 물을 틀어 핸드 워시를 펌핑해 손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차갑게 쏟아지는 물이 기분 좋았다. 메산이는 그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서는 까치발을 하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재겸이 손을 씻다 말고 멈칫했다. 검지에 붙어 있던 노란색 반창고가 덜렁거렸다. 아, 맞다. 이거… 재겸은 도서실에서 봤던 새까만 자벌레를 떠올렸다. 부적을 써야 할 일이 앞으로도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겸이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수도꼭지를 잠갔다.

“메산아. 다락에 가서 자개함 좀 가지고 와.”

“네? 나리, 갑자기 자개함은 왜….”

“우선 가져와, 나중에 말해 줄게.”

메산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산이가 다락으로 올라간 사이, 재겸은 욕실에서 나와 집 안쪽 구석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잡동사니가 가득한 창고 안에는 문 하나가 더 있었다. 재겸이 손수 결계를 걸어 놓아, 재겸의 귀기가 아니면 좀처럼 열기 힘든 문이었다. 문손잡이엔 낡은 새끼줄이 칭칭 감겨 있었다. 재겸은 잠시 눈을 감고 손끝에 귀기를 집중했다. 그러자 단단하게 묶여 있던 새끼줄이 스르륵, 풀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끼줄이 완전히 풀린 뒤에야 문이 열렸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방은 휑하면서도 살풍경했다. 방 정중앙에 긴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녹슨 은장도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재겸은 바닥에 정좌를 하고 앉아 은장도의 칼집을 빼냈다. 잔뜩 녹슨 칼집 속에서 예리한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겸은 손을 들어 축축한 반창고를 떼어 냈다.

“나리, 자개함을 가져왔….”

자개함을 품에 안고 방에 들어서던 메산이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자개함은 이리 주고, 넌 잠깐 나가 있어.”

“나, 나리. 설마….”

재겸이 들고 있던 은장도를 미련 없이 손 한가운데로 박아 넣었다.

“부적을 좀 써 놓아야겠다.”

***

버스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재겸은 하마터면 내릴 곳을 지나칠 뻔했다. 졸리면 자고, 저절로 눈이 떠져야 일어나던 권태로운 일상에 규칙적인 시간표가 생겼다. 평소라면 한밤중이었을 시간에 재겸은 팔자에도 없는 교복을 입고 가방을 챙겼다. 적응하려면 며칠은 걸릴 터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 거리 위에는 학생 몇 명뿐이었다. 등교 시간치고 살짝 이른 시각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재겸은 잠이 덜 깬 상태였다. 재겸은 불퉁한 얼굴로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앞 편의점 앞을 지나칠 때였다. 딸랑, 영롱한 종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리며 차분하고 관능적인 머스크 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어? 안녕.”

인사를 건넨 이는 어제 봤던 사서 청년이었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던 모양이었다. 청년은 연한 하늘색 와이셔츠에 발목이 보이는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구두 대신 하얀 스니커즈를 신고 있어서 어제보다 한결 산뜻해 보였다.

내 얼굴을 기억하는 건가? 잠시 주춤하던 재겸이 고개만 까딱 숙여 보였다. 그러자 청년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렸다. 눈매가 휘어지면서 서늘하던 인상이 한순간에 사르르 허물어졌다.

“또 보네요.”

“네.”

“친구는 원래 이 시간에 와요?”

“네, 뭐….”

재겸이 짧게 대꾸했다.

“그래요? 근데 왜 오늘 처음 보지?”

재겸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전학 왔다고 하면 어디서 왔냐, 학교생활은 어떠냐, 귀찮은 화제가 따라붙을 것 같아서 대충 대답했건만. 아니나 다를까 청년은 말꼬리가 길었다.

“저 이 학교 어제 처음 왔는데요.”

재겸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 그럼 전학생이에요?”

“네.”

“그랬구나. 어쩐지, 못 보던 얼굴이다 싶었어요.”

놀란 표정을 짓던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근무한 지 얼마 안 돼서 전교생 얼굴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친구는 아무리 봐도….”

청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재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스쳐 지나가도 기억에 남을 얼굴이라서.”

뭔 소리야.

모호한 말에 재겸이 불퉁한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학교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멀뚱멀뚱 청년을 바라보던 재겸의 시선이 문득 아래로 향했다. 청년의 손에 종이 팩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금 막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였다. 겉면에 쓰인 상표명을 응시하던 재겸이 눈을 깜빡거렸다. 베리베리… 드링킹 요거트? 시선을 느낀 청년이 종이 팩을 흔들어 보였다.

“좋아해요?”

“뭐를요?”

“이거. 드링킹 요거트.”

“안 먹어 봤는데요.”

“그래요? 난 되게 좋아해요.”

어쩌라고….

재겸이 무심한 얼굴로 청년을 흘겨 보았다.

“키위, 딸기, 맛이 여러 종류인데 베리베리가 제일 맛있어요.”

청년은 계산할 때 챙겨 나온 빨대를 종이 팩에 꽂았다.

“줄까?”

재겸은 대답 대신 눈짓으로 거절했다. 청년은 두 번 권하지 않고 그대로 빨대를 물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자연스럽게 재겸의 옆에 섰다. 얼떨결에 청년과 동행하는 꼴이 되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 말 없이 걷다 보니 멀리서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 근데….”

청년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그러고 들어갈 거예요?”

“뭐가요?”

맥락을 알 수 없는 질문에 재겸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청년은 말없이 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가슴팍을 탁탁 두드렸다. 청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재겸이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요.”

“넥타이 안 해요? 이제 슬슬 해야 하지 않나.”

그제야 넥타이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재겸이 몸을 우뚝 세웠다.

“미착용 벌점 받을 텐데.”

재겸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숙였다.

“아… 넥타이….”

어쩐지 뭔가 허전하다 싶었다. 어제 원귀에게 넥타이를 넘겨 줬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재겸은 어제 원귀에게 귀기를 나누어 주었다. 원귀를 동정하거나 연민하여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절박함을 어렴풋이 이해했을 뿐이다. 원귀가 가진 원한이 무엇인진 알 수 없으나 저 역시 깊은 원한에 사로 잡혔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원귀의 사연에 엮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형태가 망가지고 이지를 완전히 상실하기까지 짧게나마 시간을 늦춰 줄 수는 있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원귀의 몫이겠지만. 몸에 지닌 물건을 전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건넸는데, 실수였다.

청년이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놓고 왔어요?”

놓고 온 건 아니고, 남한테 줘 버린 셈이긴 했지만 그거나 저거나. 황당해하는 재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청년은 좌우를 둘러보는가 싶더니 재빨리 넥타이를 풀었다.

“얼른요. 누가 본다.”

청년이 작게 속삭였다. 재겸은 당황한 얼굴로 청년이 건넨 넥타이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오늘 남색 넥타이라서 색깔이 똑같네요.”

공교롭게도 청년이 매고 있던 넥타이는 교복 넥타이와 동일한 색상이었다. 청년은 웃으면서 목 끝까지 채웠던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위에서 두 칸. 넥타이를 맸을 때는 단정하고 깔끔해 보였다면 지금은 보다 자연스러웠다.

“빨리 매요, 만약 누가 보고 일러바치면 어떡해요. 사서쌤이 넥타이 빌려줬다고.”

청년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 억지스러운 얘기였지만 청년이 그렇게 얘기하니 왠지 덜컥 동요가 일었다. 재겸이 약간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청년과 재겸을 힐끔거리며 곁을 지나쳤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등교하는 인파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재겸이 얼떨결에 넥타이를 받아 들었다.

“벌점 쌓이면 골치 아파요. 여기 학교 되게 빡세거든요.”

재겸이 머뭇거리자, 청년이 조그맣게 겁을 줬다. 그래 놓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남 일이오, 하는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빨대를 물었다. 청년에게서 받아 든 넥타이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재겸이 머뭇거리며 청년을 쳐다보았다.

“…….”

시종일관 시큰둥하고 까칠해 보이던 소년의 낯에 균열이 생겼다.

“저기, 저 구석 가서 매고 와요.”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기회에, 윤태희는 조금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그럼 난 먼저 가고 있을게요.”

윤태희가 재겸의 귓가에 낮게 속삭인 뒤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저기요.”

재겸이 저도 모르게 청년의 팔을 덥썩 잡았다. 셔츠 안으로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윤태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재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묘하게 관능적인 향수 냄새 역시 거리를 좁히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재겸은 막상 붙잡아 놓고도 용건을 말하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말없이 재겸을 내려다보던 윤태희가 물었다.

“왜?”

재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어떻게 매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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