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8)화 (18/348)

#18

오늘 자 대륭 고교의 점심 메뉴는 콩나물이 들어간 부대찌개와 달큼한 찜닭, 그리고 네모난 계란찜과 사과가 한 무더기 섞인 마카로니 샐러드였다. 매일 반찬이 달라지는 것도 모자라서 또 고기가 나오다니! 낯선 메뉴를 경계하듯 노려보던 것도 잠시, 재겸은 어제처럼 식판을 지키듯이 팔 한 짝을 척 올려놓고 전투적으로 식사를 마쳤다.

그사이, 조영우의 입은 그야말로 댐이 터진 듯했다. 친구와의 대화에 목말라 있던 조영우에게 재겸은 단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어제의 일로 묘한 유대감까지 생겼으니 말을 다 한 셈이었다. 재겸은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조영우가 썩 귀엽게 느껴졌다. 꼭 메산이 같다고나 할까….

혹시 어제의 일을 두고 필요 이상으로 파고들면 어쩌나 우려했는데, 다행히 조영우는 그에 관해선 별말이 없었다. 여러모로 순진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된 거 당분간은 조영우와 적당히 어울리며 지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길어야 한 달일 테니까.

식사를 마치고도 점심시간이 꽤 널널하게 남아 있던 덕분에, 조영우는 재겸에게 매점 나들이를 제안했다. 매점에 도착한 둘은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다. 매점 냉동고를 열자 살갗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왔다.

“재겸아, 골랐어?”

재겸이 머뭇거리는 사이, 조영우는 별 고민 없이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하나를 이미 골라 둔 상태였다. 매점 내부는 식후 디저트를 먹기 위한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학생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던 재겸은 냉동고에 손을 넣고 대충 잡힌 것을 꺼내 들었다.

“엇! 나도 그거랑 둘 중에 고민하다가 이거 골랐는데.”

헤헤, 통했다, 하며 조영우가 배시시 웃었다. 재겸은 조영우의 것을 한 번, 자신의 것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빠삐꼬와 소다 맛 뿡따. 어쩌다 보니 둘 다 쭈쭈바를 골랐다. 계산을 마친 뒤 매점 밖으로 나온 둘은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설익은 햇볕이 교정 구석구석까지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조영우와 재겸은 나무 그늘에 자리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조영우가 들고 있던 쭈쭈바를 허벅지에 냅다 내리꽂았다. 퍽! 순간 놀란 재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영우를 바라보았다. 충격에 의해 포장지 위쪽이 뜯겨 쭈쭈바 꼭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호라….

조영우를 곁눈질하던 재겸은 슬그머니 들고 있던 뿡따를 움켜쥐었다. 퍽! 그러자 조영우의 빠삐꼬와 똑같이 뿡따의 하늘색 꼭지가 튀어나왔다. 쭈쭈바를 처음 경험한 재겸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걸렸다. 조영우가 꼭지를 잡고 비틀었다. 재겸도 그대로 흉내를 냈다. 꽝꽝 언 꼭지가 깔끔하게 떨어져 나왔다.

“재겸아. 우리 꼭지 바꿔 먹을래?”

“그러든지.”

조영우가 헤실헤실 웃으며 꼭지를 건네려던 참이었다. 난데없이 날아든 축구공 하나가 재겸의 발치로 떼굴떼굴 굴러 들어왔다.

“야! 패스 어디로 하는데!”

교복 와이셔츠는 어디다가 벗어 던졌는지, 흰 반팔 티를 입은 한 소년이 투덜거리며 뛰어왔다. 어제 복도에서 부딪쳤던 이주열이었다. 이주열이 허리를 굽혀 축구공을 주워 들더니 이마에 가득한 땀을 닦아 냈다.

“오, 조영우. 전학생이랑 친구 먹었냐?”

조영우와 재겸을 번걸아 보던 이주열이 아는 척을 해왔다.

“아… 주, 주열아. 안녕.”

조영우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흰 티셔츠 자락을 펄럭거리며 더위를 쫓아내던 이주열의 시선이 어느 순간 조영우의 손에 들린 있던 쭈쭈바로 향했다. “오. 쭈쭈바 먹냐.” 이주열이 조영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나 한 입만.”

“어… 어?”

이주열은 그대로 조영우의 손목을 자신이 입가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그에 조영우는 저도 모르게 붙잡힌 손에 미약한 힘을 주고 버텼다. 베어 먹는 하드도 아니고 쭈쭈바였다. 하물며 아직 입에도 대지 않은 건데. 그러자 이주열이 피식 웃으며 조영우의 어깨를 툭 쳤다.

“좀 줘라, 나 지금 목말라서 뒤질 것 같다고. 친구끼리 뭐 어때?”

이주열은 자신이 아쉬울 때만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굴었다. 이주열은 소위 논다는 애들의 중심에 있었다. 반 분위기를 주도했고 기분이 나쁘면 애먼 애들한테 화풀이를 했다. 이주열에게 시달린 경험은 비단 조영우뿐만이 아니라 반 아이들 대부분이 겪어 본 것이었다.

바스락거리는 포장지 너머로, 아이스크림의 차가운 냉기가 손바닥까지 옮아오고 있었다. 망설이던 조영우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래, 고작 천 원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심정이었다. 이주열이 조영우의 손에서 쭈쭈바를 뺏어 들려던 참이었다.

“야.”

옆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이주열이 고개를 돌렸다. 재겸은 입에 쭈쭈바를 물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정주가 사 준 고급스러운 가죽 지갑이었다. 재겸은 지갑 속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이주열에게 내밀었다.

“사 먹어. 이걸로.”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였다. 재겸은 지폐를 팔랑팔랑 흔들며 어서 받아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매점이 있는 방향을 향해 턱짓을 한 건 덤이었다. 뜻밖의 횡재에 이주열은 미련 없이 조영우의 손목을 떨쳐 버렸다.

“대박, 야. 전학생. 설마 이거 나 주는 거?”

“어.”

“빌려주는 거 아니고?”

“어. 아닌데. 다 가져.”

이주열은 상기된 얼굴로 옳다구나, 하며 재겸이 건넨 지폐를 훽 채 갔다. 기껏해야 쭈쭈바인데 만 원씩이나 줘 버리다니. 당황한 조영우가 재겸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소극적으로나마 말리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재겸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야이, 영우야! 이렇게 좋은 친구를 사귀었으면 어? 나한테 말을 해 줬어야지.”

“…….”

“전학생, 아니. 김재겸이라고 했나? 생긴 건 꼭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솔직히 좀 재수 없었거든? 역시 사람은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니까. 새끼, 통 크다?”

예상치 못한 수확에 신난 이주열이 싱글벙글 웃으며, 양손으로 지폐의 끄트머리를 잡고 세종대왕의 얼굴을 음미했다. 흡사 돈이 아니라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꽁돈 맞지?”

이주열은 호들갑을 떨며 재차 물었다. 재겸이 귀찮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꽁돈 맞다고.”

이주열이 지폐를 주머니 속에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너한테 적선한 거니까.”

재겸이 손에 든 쭈쭈바를 주물럭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실실거리던 이주열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조영우가 눈을 크게 뜨고 재겸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쭈쭈바만큼이나 분위기 역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재겸은 적당히 녹은 소다 맛 뿡따를 앙, 입에 물었다.

“…….”

“…….”

얼마간 싸한 침묵이 찾아왔다. 시간이 잠시 더디게 흘렀고,

“야,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이주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재겸의 멱살을 잡았다. 화들짝 놀란 조영우가 허겁지겁 이주열의 손을 붙잡았지만, 이주열은 그대로 재겸을 뒤로 밀쳤다. 덕분에 재겸은 중심을 잃고 벤치 뒤로 넘어가 화단 안쪽으로 나자빠졌다.

“방금 뭐라고 했냐고, 이 개새끼야!”

이주열이 공을 주워 오기를 기다리며, 운동장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던 아이들은 멀리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헐레벌떡 싸움에 난입했다. 이주열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써 댔다. 아이들은 다급하게 이주열을 뜯어말리기 시작했고, 씩씩거리며 재겸에게 달려들려던 이주열의 시도는 그렇게 불발에 그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윽!”

난데없이 날아든 축구공이 재겸의 안면을 강타했다. 아이들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등을 돌리는가 싶던 이주열이 기습적으로 재겸을 향해 축구공을 내던진 것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날아든 축구공은 정확히 얼굴에 명중했고, 쌍코피라는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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