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9)화 (19/348)

#19

텅 빈 책꽂이 앞에 서서 서류를 뒤적거리던 윤태희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문간에서 느껴진 인기척 때문이었다. 상대를 예감한 윤태희의 입가에 조그만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문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윤태희는 다시 들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언제 웃었냐는 듯 입꼬리에 매달고 있던 웃음기를 싹 물렸다. 도서실 문이 열린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

문을 열고 도서실로 들어서던 재겸이 멈칫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사서 청년의 외양이 지금까지 봤던 모습과는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청년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청년은 책꽂이 앞에 서서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모습이었다. 재겸 자신이 왔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겸이 일부러 문을 강하게 닫았다.

쿵, 하는 소리에 청년의 시선이 재겸에게로 와 닿았다.

재겸을 발견한 청년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얇은 금속 테로 이루어진 동그란 안경 너머로,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테가 얇아서 그런지 청년의 인상은 훨씬 예민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책을 보거나 빽빽한 글씨를 읽을 적이면 항상 애용하는 안경이었다.

“왔어요? 어….”

청년이 쓰고 있던 안경을 슬쩍 내리더니, 맨눈으로 재겸을 응시했다.

“코피 났어요?”

재겸은 코를 킁킁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코피가 난 쪽을 휴지로 단단하게 틀어막았더니 숨을 쉬기가 답답했다. 청년은 들고 있던 서류를 빈 책꽂이 한쪽에 올려두고 재겸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왔다.

“무슨 일 있었어요?”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교실에 들어온 선생들은 재겸을 보고는 하나같이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는 사서 청년이 물어봤던 것처럼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 왔다. 그때마다 멀찍이 대각선 방향에 앉은 이주열은 적의 어린 눈으로 재겸을 노려보았다. 입조심해. 잠시 침묵하던 재겸은 선생들에게 했던 대로, 똑같은 대답을 내놓기로 했다.

“한눈팔다가 부딪쳤어요.”

“저런.”

청년이 안됐다는 어투로 심심한 유감을 표했다. 선생들 역시 아팠겠다, 조심 좀 하지, 라는 추임새를 덧붙이고는 바로 수업에 나섰었다.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더 캐묻지 않아 주는 것이 재겸 입장에서는 편했다. 하지만,

“부딪쳤다는 게 혹시 주먹인가요?”

청년이 비스듬히 팔짱을 끼며 물었다. 누군가와 싸운 것이냐고 돌려서 묻는 것이었다. 순간 어이가 없어진 재겸은 저도 모르게 피식했다.

“네.”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

따지고 보면 가만히 있었던 셈이긴 했다. 딱히 대응 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까. 상대가 먼저 덤빈다고 해서, 당장에 치기 어린 주먹다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노릇도 아니었다. 제아무리 눈이 뒤집혀 주먹을 휘두른다고 해도 어차피 이주열은 약한 범인이었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이 있으니까요.”

재겸이 평화로운 도서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건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청년이 짓궂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처럼 참을성 없는 사람한텐 너무 가혹한 속담이네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재겸이 눈을 들었다.

“그냥, 참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의미에서.”

청년은 장난스레 콧잔등을 한 번 찡긋거리고는,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추슬러 올리며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 그러고 보니 넥타이를 돌려주러 온 거였지. 청년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사이, 멀뚱멀뚱 서 있던 재겸은 넥타이 매듭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 맞다. 친구.”

넥타이를 풀기 직전, 조용하던 청년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나 좀 도와줄래요?”

“…도와 달라고요?”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오늘 서가 정리를 했어요. 몇 년 동안 대출 이력이 없는 책은 따로 한데 모아서 배치하려고 하는데. 리스트도 다 뽑아 놨고. 책도 다 추려 놔서 이제 순서대로 꽂기만 하면 되거든요. 근데 서류 보면서 책을 찾으려니 손이 많이 가서요. 친구가 도와주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도와줄래요?”

청년이 부드럽게 웃으며 들고 있던 서류를 펄럭거렸다. 재겸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서류에 적힌 내용을 살펴보았다. 청년의 말대로 서류에는 책 제목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재겸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힐끔, 청년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아, 매정하네. 내가 넥타이도 빌려줬는데.”

재겸의 마뜩잖은 기색을 눈치챘는지, 청년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러자 시큰둥하던 재겸의 낯에 희미한 금이 생겼다.

지가 먼저 빌려줘 놓고 생색은….

재겸은 도서실 한쪽에 놓인 커다란 트레이를 바라보았다. 트레이 안에는 낡고 오래된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청년이 말한 대로, 책장에 꽂기 위해 추려놓은 책인 듯했다. 확실히 좀 많아 보이긴 했다.

잠시 고민하던 재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이 학교는 사실상 도서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가끔 청소하러 와 주는 친구들이 전부예요. 그래서 맨날 나 혼자 일하니까 쓸쓸했는데… 우리 친구밖에 없네요.”

청년은 도서실 한쪽에 놓여 있는 트레이를 빈 책꽂이 근처로 가져왔다. 청년은 자신이 책 제목을 서너 권씩 불러 주면 트레이에서 책을 찾아 순서대로 건네 달라고 했다.

청년은 안경을 추슬러 올리며 서류에 적힌 책 목록을 읊어 주었다.

“<바람의 전사>, <매일을 이루는 습관>, <시라쿠사의 봄>.”

재겸은 트레이 안을 꼼꼼히 훑으며 책을 건넸다. 청년은 재겸이 책을 찾아 주면 이어서 다음 차례의 제목을 불러 주었다. 그리고 재겸이 책을 찾는 동안, 청년은 재겸이 건네준 책에 붙어 있는 청구 기호를 살펴 순서대로 꽂아 넣었다.

처음엔 책을 찾는 속도가 느렸다. 시간이 좀 지체된다 싶으면 청년은 트레이로 다가와 함께 책을 찾아 주었고,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재겸의 눈과 손에도 슬슬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둘의 손발이 착착 맞아 떨어졌다. 청년이 미리 건네준 책을 정리하고 나면 타이밍 좋게 재겸이 곧바로 다음 책을 내밀었다.

“친구. 눈썰미가 좋은데요.”

윤태희는 틈틈이 소년에게 칭찬을 건넸다. 재겸은 그때마다 시선을 내리며 “네, 뭐….” 하고 말을 흐렸다. 소년의 낯은 일견 무심해 보였으나 칭찬을 받는 것이 영 쑥스러운 듯했다.

“<긴 여행과 고양이>, <모로코의 아침>, <관촌수필>.”

재겸은 곧바로 책을 찾아 건네주었다. 윤태희는 큼지막한 손으로 책 세 권을 한꺼번에 받아 들었다. 책 표지를 차례대로 살피며 하단에 붙어 있는 청구 기호를 꼼꼼히 확인하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손을 멈췄다.

冠村隨筆.

관촌수필. 낡고 오래된 책 표지와 책 등에, 적혀 있는 글자라곤 온통 한자뿐이었다.

“…….”

청년이 책 제목을 불러 주길 기다리며, 트레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재겸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청년은 말이 없었다. 재겸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청년이 천천히 눈을 마주쳐 왔다.

“왜요?”

청년이 재겸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떤 작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무언가를 감정하는 시선이었다. 청년의 묘한 시선에 재겸이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데요?”

안경 너머로 청년의 눈매가 휘어졌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청년은 들고 있던 서류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제껏 하던 대로 책 제목을 불러 주었다. 재겸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쏙쏙 책을 집었다. 건네면 받고, 찾으면 꽂고. 트레이에 담긴 책이 눈에 띄게 쑥쑥 줄어들었다.

어느덧, 트레이 안에는 남은 책은 열 권 남짓이었다.

“근데, 친구. 딴소린데.”

“네.”

재겸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생각보다, 친구 키가 꽤 크네요.”

“네.”

재겸은 얼마 남지 않은 책을 열심히 주섬거리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희는 아까와 달리 빼곡해진 서가에 책을 꽂아 넣으며, 여상하게 물었다.

“키 몇이에요? 한, 육 척(尺)(길이의 단위. 약 30cm에 해당.)은 넘나?”

“그쯤 될걸요.”

“그래요? 그럼 나랑은 이 촌(寸)(길이의 단위. 약 3cm에 해당.) 정도 차이 나려나.”

“뭐… 그렇겠죠.”

재겸이 싱겁게 대꾸하며 책을 건넸다. 그러자 윤태희가 조그맣게 고마워요, 하며 받아 들었다. 재겸은 트레이에 남은 책을 차곡차곡 쌓았다. 이제 이것만 꽂으면 마무리였다. 윤태희가 이제는 쓸모가 없는 서류를 꼬깃꼬깃 구겼다.

“근데, 친구.”

아 왜 자꾸 불러.

또다시 들려온 청년의 목소리에 재겸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치켜떴다. 가뜩이나 귀찮아 죽겠는데 자꾸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재겸은 마지막으로 남은 책을 포개어 청년에게 건네며, 대답 대신 빨리 용건이나 말하라는 까칠한 눈빛을 보냈다. 코앞에 내밀린 책을 내려다보던 청년은 쓰고 있던 안경을 비스듬히 내리고는, 고개를 들어 재겸을 응시했다.

“근데, 친구는 몇 살이에요?”

상냥한 목소리와 정반대인 날카로운 시선이 재겸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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