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근데, 친구는 몇 살이에요?”
돌발적인 질문에 재겸의 낯이 굳어졌다.
“…….”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애쓰는데 번뜩, 정주의 말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정주가 해준 조언이 있었다. 정주가 말하길 현대의 사람들은 고정된 통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몇 살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학년을 얘기하면 그걸 나이로 알아들을 거라고 했었다.
재겸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요.”
청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응. 그래서 몇 살이냐고.”
학년 말고 나이 말이에요. 청년은 친절하게 덧붙이며 재겸이 건넨 책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묵직하던 손안이 한순간 허전해졌다. 재겸과 윤태희는 서로를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신경전을 벌이는 것처럼, 둘 사이로 묘하게 팽팽하면서도 날 선 기류가 흘렀다.
“…….”
학년을 얘기하면 된다던 정주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재겸이 잠시 침묵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겸의 표정이 언뜻 봐서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년은 뭐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항상 그보다 더 깊숙이 들어왔다. 어제도, 오늘도 그랬다.
찰나의 순간, 동요를 억누르던 재겸이 역으로 질문을 건넸다.
“고, 고등학교 2학년은 몇 살인데요?”
“음… 보통은 열여덟이겠죠.”
잠시 머리를 굴리던 재겸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 저도 그걸로 할게요.”
“…….”
재겸의 당당한 대꾸에 윤태희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흐트러진 웃음소리를 냈다. 저도 그걸로 할게요? 무슨 중국집에서 메뉴 고르는 것도 아니고….
“뭐예요, 그게.”
“보통은 열여덟이라매요?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봐요?”
“그야, 친구는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 같지가 않아서.”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재겸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한자가 무척 익숙한가 봐요.”
윤태희가 손에 든 책을 책꽂이에 꽂아 넣으며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한문? 갑자기 한문은 왜… 청년의 말을 곱씹던 재겸의 시선이 문득 책꽂이로 향했다. 冠村隨筆. 별다른 한글 표기 없이 큼직한 한자로만 이루어진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
아차. 아주 짧은 순간, 재겸의 눈동자 위로 낭패감이 섬광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요즘 사람들한테는 한자가 꽤 낯설 텐데, 친구는 척이랑 촌까지 알아들었잖아요. 알고 보니 엄청 옛날 사람이라거나,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거나,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어느새 빽빽해진 책꽂이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윤태희가 가벼운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뜨끔한 재겸은 책을 정리하는 세심한 손길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뭘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뭐가 됐든 일단은 시치미를 떼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재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이가… 많지 않아도 한자를 잘 알 수도 있는 건데요.”
“과연 그럴까요?”
“외국말 잘하는 사람은 다 외국 사람이겠네.”
재겸이 중얼거리자 윤태희가 훽, 고개를 돌려 시선을 부딪쳐 왔다.
“…….”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뭔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이 마주치자 윤태희가 눈썹 한쪽을 슥 들어 올렸다.
“그러는 그쪽, 선생, 님도… 요즘 사람이면서 한자 알아본 거 아니에요?”
재겸이 덧붙인 말에 윤태희는 가만히 재겸을 응시했다. 뭐, 따지고 보면 그렇긴 했다. 멀뚱멀뚱 시선을 받아 내던 재겸이 마침내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돌리자, 윤태희의 입가에 싱거운 미소가 매달렸다. 재겸의 지적을 흔쾌히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그렇네… .”
윤태희는 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는 데스크로 걸어가 어제 반창고를 꺼냈던 서랍을 열어젖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윤태희는 물티슈 여러 장을 뽑아 그중에서 몇 장은 재겸에게 건네주었다.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윤태희는 데스크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물티슈로 손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새하얗던 물티슈가 금세 지저분해졌다.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책에서 묻어 나온 먼지가 생각보다 많았다. 가만히 윤태희의 눈치를 살피던 재겸도 따라서 물티슈를 쪼물딱거렸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물티슈가 개운하면서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래 봤자 숫자놀음이지.”
“뭐… 그렇, 죠.”
“난 나이 상관 안 해요.”
“…….”
재겸은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서 청년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청년이 던지는 말들은 하필이면 재겸을 곤란하게 만드는 내용뿐이었다. 청년은 줄곧 재겸에게 관심을 보이고 호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 자와 가깝게 지내는 건 좋지 않다는, 근거는 없지만 강렬한 느낌이 솟아올랐다.
조영우야 같은 반에다가 바로 앞자리니까 그렇다고 쳐도. 청년은 필요 이상으로 친절했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거리감을 좁혀 왔다. 재겸은 그것이 영 부담스럽고 껄끄럽기만 했다. 게다가 넥타이는 지가 먼저 빌려줘 놓고 대뜸 도와 달라고 하지를 않나….
어쨌든 빚은 청산했으니 앞으로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트레이에 남은 책도 없고, 책꽂이 정리도 끝났으니 더 이상 도서실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도와 달라는 건 다 끝난 거죠?”
“네, 고생해 준 덕분에.”
재겸은 대충 손을 닦고는 근처에 있던 휴지통으로 더러워진 물티슈를 집어넣었다. 이참에 코 한쪽을 막아 두었던 휴지도 빼서 버렸다. 마지막으로 어깨에 가방을 멘 뒤, 높은 데스크를 의자 삼아 걸터앉아 있던 윤태희의 앞으로 가 마주 보고 섰다.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재겸은 넥타이를 풀기 위해 목 언저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윤태희가 한발 빠르게 넥타이 자락을 잡아당겼다. 한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재겸은 갑작스럽게 당기는 힘에 주춤하며 끌려갔다. 향수 냄새가 훅 끼치며 손쓸 틈도 없이 거리가 가까워졌다. 재겸의 눈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친구가 되는 일에도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던데.”
데스크에 걸터앉은 탓에 시선이 낮아진 윤태희가 물끄러미 재겸을 응시했다.
“노인과 어린아이도 마음만 맞는다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어요.”
“네?”
“나이로 따지면 나는 친구한테 한참 형이지만.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고.”
“그래서요?”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우리 진짜로 친구할까?”
재겸의 낯이 기묘하게 굳어졌다.
“…왜요?”
“왜냐뇨. 친구 하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왜요?”
“그야 친해지고 싶으니까.”
“…….”
“나 이 학교에 아는 사람도 없고, 온 지 얼마 안 돼서, 되게 쓸쓸하거든.”
윤태희가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넥타이는 그의 손에 붙잡힌 채였다. 순간 말문이 막힌 재겸이 윤태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쩌다 보니 재겸은 데스크에 걸터앉은 윤태희의 양쪽 다리 사이에 서 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그만큼 거리가 가까웠다.
“싫은데요.”
재겸은 인상을 쓰며 넥타이를 쥔 윤태희의 손등을 냅다 후려쳤다. 윤태희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제 손등을 쳐다보았다. 재겸은 뒤로 물러서며 다시금 거리를 확보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넥타이를 풀었다. 넥타이는 원래 주인의 어깨 위에 성의 없이 훌러덩 걸쳤다.
“…왜요?”
방금 전에 재겸이 물었던 것처럼, 이번엔 윤태희가 물었다. 재겸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왜냐뇨. 그야 친해지기 싫으니까.”
***
재겸이 떠나고 난 뒤, 적막한 도서실 안에 혼자 남아 있던 윤태희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긴 다리를 꼬고 의자에 느슨하게 앉아 몸을 흔들거렸다. 그때마다 의자 역시 살랑살랑 가볍게 틀어졌다가 원래대로 되돌아오길 반복했다. 유리창 너머로 해 질 녘 노을이 도서실 내부를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한 윤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은 지난 지 오래였다. 윤태희는 도서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는, 출근한 뒤 데스크 구석에 올려 두었던 가방을 뒤적였다. 가방의 깊숙한 곳에는 고운 비단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윤태희는 곧바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주머니에 든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안에 든 것은 구슬 팔찌였다. 알알이 매달린 구슬은 오십 원짜리 동전만 한 크기로, 무척이나 진귀하고 값비싼 보석으로 정평이 나 있는 흑진주였다.
흑진주는 칠흑같이 새까만 와중에도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흑진주의 빛깔은 시시각각 기묘한 색을 띠었다. 붉은빛이 감돌았다가, 노란빛이 감돌았다가, 어느 순간엔 그저 하얗게 빛나기도 했다.
윤태희는 흑진주가 얼마나 값비싼 보석인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흑진주가 아니라, 이 흑진주 안에 깃든 것이었다. 그게 바로 윤태희의 보물이었다. 윤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바닥 정중앙쯤에 팔찌를 걸친 뒤 눈을 감았다. 손안에 감각을 집중하고, 마치 염주를 굴리듯 흑진주 한 알 한 알을 차분히 헤아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도서실 내부로 부드러운 미풍이 흘러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윤태희의 머리칼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창문이며 문이며 바깥과 통하는 모든 입구는 틀어 막혀 있었다. 가르마를 따라 자연스럽게 옆으로 흘러내린 앞머리가 파스스,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윤태희가 손놀림을 멈추고 눈을 매섭게 떴다.
“찾았다.”
날카롭던 눈매가 사르르 허물어졌다. 팔찌에 매달려 있는 흑진주 중 한 알에서 원하던 기운을 찾았다. 겉으로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이지만, 안에 깃든 것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꽤 집중력이 필요했다. 윤태희는 방금 전, 손끝에 닿았던 흑진주에 입을 맞췄다.
“새로.”
윤태희는 흑진주에 입술을 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도서실 내부에 차올랐던 바람이 일시에 멎었다. 기류 역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잠시 멍하게 있던 윤태희가 입술을 떼고 측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누군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윤태희는 기척도 소리도 없이 도서실에 나타난 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새로’라 불린 자의 외양은 꽤 독특했다. 파마를 한 것처럼 짧은 머리칼은 온통 굴곡져 있었고, 너덜너덜한 티셔츠 위에 걸쳐 입은 카디건은 난해한 패턴이 어지럽게 수놓아진 데다가 심지어 무지개색이었다.
여전하네. 윤태희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새로, 안녕.”
“언제쯤 불러 주실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슴다.”
커다란 창문에서 노을빛이 물감처럼 쏟아졌다. 삐딱한 자세로 서서 새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윤태희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윤태희를 올려다보고 있는 새로를, 진한 노을빛이 천천히 집어삼켰다. 어느덧, 노을빛에 의해 바닥으로 길쭉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림자는 단 하나뿐이었다.
“영귀, 새로가 왔슴다. 태희 님.”
윤태희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