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1)화 (21/348)

#21

“영귀, 새로가 왔슴다. 태희 님.”

윤태희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서 와.”

윤태희가 미소를 띤 채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일어나도 좋다는 무언의 의미였다. 그러자 깍듯하게 머리를 조아리던 새로가 금세 실실 웃으며 몸을 편하게 세웠다. 방금 전까지 진지하던 기색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새로는 기지개를 켜며 도서실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와우, 태희님. 여기 책 열라 많슴다.”

“신기해?”

“완전 신기. 제 평생 봐 온 책들보다 여기 있는 책이 훨씬 많슴다.”

새로가 책장 구석구석을 기웃거리며 우와, 이야,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새로는 귀신이면서도 가끔 보면 인간보다 더 인간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호기심도 많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했다. 여러모로 영귀답지 않은 녀석이었다.

영귀는 인간처럼 사리를 분별할 줄 알며 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때문에 영귀들은 이지가 없는 잡귀나, 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썽이나 피우는 원귀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 걸 기분 나빠했다. 그럼 인간과 어울리느냐, 하면 막상 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명줄이 짧고 힘이 약하다 하여 인간을 낮잡아 보는 영귀가 대다수였다. 윤태희를 만나기 전, 패현이 그러했듯이.

인간을 괄시하는 영귀들은 저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지내며 유유자적 풍류를 즐겼다. 그러다 평화롭고 고고한 생활이 지겨워지면 기분 전환 겸 인간이 사는 곳으로 놀러 나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처음부터 인간에게 호의적인 소수의 영귀들도 있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사람들 틈에 섞여 인간의 생활 양식을 흉내 내며 살아가기도 했다. 본디 패현이 전자였다면 새로는 후자였다.

영귀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평범한 인간들 앞에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래도 귀신인지라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혹시라도 들킬 것을 우려하여 어둑어둑한 밤이나 새벽에 거리를 활보했다. 소수의 영귀들은 마치 저들이 인간이라도 된 양, 인간의 문화를 만끽하며 쇼핑을 하거나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

새로는 유독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윤태희가 새로를 불러들일 때마다 새로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은 꼭 변해 있었다. 지난번엔 빠글빠글한 아프간 헤어에 우비를 입고 다니더니, 이번엔 짧게 커트를 치고 알록달록한 카디건을 입고 나타났다. 아직 파마의 흔적이 남아 머리카락이 구불거렸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몰라도 새로의 패션 세계는 언제나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새로가 정신없이 도서실 내부를 구경하는 사이, 윤태희는 진한 노을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신선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부르셨슴까? 설마, 저 책 읽으라고?!”

새로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했다. 윤태희가 소리 없이 웃었다. 새로는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발랄했다. 진중하고 정적인 성격의 패현과는 정반대였다. 때문에 새로와 패현을 함께 붙여 놓으면 두 영귀는 서로 으르렁대기 바빴다. 패현은 새로에게 ‘정신없고 까불대는 천덕꾸러기’라며 손가락질을 했고, 새로는 패현에게 ‘농담이라곤 씨알도 먹히지 않는 시시한 샌님’이라며 깎아내리곤 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윤태희의 말에 새로가 반색을 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쇼.”

“궁금한 인간이 생겼어.”

새로는 창문에 팔을 걸치고 있는 윤태희의 등을 응시했다. 궁금한 인간이 생겼다고? 지금껏 새로가 봐온 윤태희는 웬만해선 남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인간이었다. 새로가 흥미롭다는 눈을 했다. 붉은 하늘을 거대한 장폭으로 삼아, 윤태희의 선이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그 아이에 관해서 좀 알아보고 싶은 게 있는데.”

윤태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물건은 얻어 두셨슴까?”

새로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운이 좋았지.”

윤태희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휴지통 앞에 쪼그려 앉았다. 졸졸 따라온 새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윤태희와 휴지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태희는 검지를 들어 휴지통 안쪽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서, 새로의 시선이 휴지통 속에 쌓여 있는 지저분한 쓰레기에 닿았다. 눈을 가늘게 뜨던 새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새로가 설마, 하는 얼굴로 윤태희를 쳐다봤다.

“태희 님, 말씀하신 물건이 혹시….”

“그래, 저거야.”

윤태희가 가리킨 것은 피가 묻은 휴지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재겸의 코를 막고 있던.

“이거… 혹시 콧구멍에 쑤셔 넣었다 뺀… 휴지 아님까?”

“응. 코피가 묻은 휴지야.”

“아, 진짜, 태희 님….”

새로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쪼그린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좌절하는 새로의 모습을 보고도 윤태희는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오히려 양손을 쥐고 여유롭게 새로를 응원했다.

“새로,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빈말이 아니었다. 윤태희는 새로의 힘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를 부른 것이었다. 영귀는 잡귀와 원귀에 비해 그 수가 현저히 적기 때문에 나자들 사이에선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많았다. 귀신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적대를 드러내는 편협한 그들이 알 리가 없다. 귀기의 강도에 따라 귀재의 능력이 달라지듯이, 영귀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새로는 피의 내력을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태희 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이 코 푼 휴지를 제가 어떻게 만짐까?”

“코 푼 게 아니라 코피.”

“아니, 하… 그게 그거지 말임다….”

“뭐 어때.”

“게다가! 이러면 꼭, 그… 스티커라도 된 것 같지 않슴까!”

“스티커가 아니고 스토커.”

윤태희가 차분하게 단어를 고쳐 주었다. 비록 말투는 헐렁했지만 새로의 얼굴은 심각했다. 새로는 선혈을 통해 그 대상의 일생을 전부 읽어 낼 수 있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핏속에는 각자의 역사가 담겨 있기 마련이었다.

“이거 말고 생피는 없슴까?”

새로가 울상을 하고는 사정하듯 덧붙였다. 흔히 작은 병이나 밀폐된 용기 안에 담긴 피를 건네받는 게 보통이었으나, 살다 살다 코피를 닦은 휴지를 물건으로 받기는 처음이었다.

“없으면 제가 직접 찾아가서, 칼질을 하든가 해서 얻어 오겠슴다.”

“글쎄. 그건 좀 그런데.”

“예?”

“흠집 생기면 보기 싫잖아.”

“…….”

윤태희의 태평한 대답에, 새로는 착잡한 심정이 되어 휴지통 안을 힐끔거렸다.

“헌데. 어째서 이 자의 내력이 궁금하심까?”

“비밀이 많아 보여서.”

“비밀이라니, 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슴까?”

쪼그려 앉아 있던 윤태희가 몸을 일으켰다. 윤태희는 벽 한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서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린 귀재야. 근데 한자를 아주 능숙하게 알아들었어. 아무리 한자를 잘 알더라도 요즘 시대에서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말을 알아듣긴 힘들지. 칠순, 팔순 먹은 노인이라면 모를까. 한자를 쓰는 게 일상이었던 조건 속에 있었다는 얘기야. 예를 들면, 나례청의 나자들은 젊은 나이임에도 부적을 다루고 경을 읊어야 하니 당연히 한자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지.”

“햐아, 고것 참 신통함다?”

새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직접 내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그 아이는 아마도 귀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확률이 높아. 나례청에서 몇 년간 수련을 거쳤다 해도 귀기를 마음대로 다루는 건 쉽지 않은데, 고작 열여덟밖에 되지 않은 어린 귀재가 귀기를 그렇게까지 다룬다?”

윤태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깨져버린 옥도장을 떠올렸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야. 아주 어릴 때부터 누군가를 사사(師事)(스승으로 섬김 또는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음)했거나, 아니면….”

“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왔거나.”

엥? 새로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가 싶더니, 실실거리며 손바닥을 퍼덕거렸다.

“에이, 태희 님도 참. 여전히 상상력이 풍부하심다. 어린 귀재라고 하지 않으셨슴까? 한낱 인간이 명줄보다 오래 살 리가 있겠슴까.”

“그럴까? 상상과 현실의 간격은 생각보다 멀지 않아. 새로, 너 같은 영귀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평범한 인간들은 상상조차 못 하고 있는 것처럼.”

윤태희가 목덜미를 매만지며 덧붙였다.

“그래서 널 부른 거야.”

“그치만, 태희님….”

무슨 말씀인진 알겠는데. 새로가 미묘한 표정으로 휴지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적어도 너무 적슴다. 무슨 병아리 눈물을 모아도 이것보단 많겠슴다. 이렇게 적은 양의 피로는 내력을 읽기가 쉽지 않슴다. 알고 계시지 않슴까? 일생을 전부 보려면 최소한 피 한 됫박은 있어야 함다.”

“꼭 일생 전부가 아니어도 괜찮아. 과거의 한 장면만이라도 좋으니, 힌트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상관없어.”

휘유우, 새로가 고개를 숙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둘 사이로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째깍거리는 벽시계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잠시 고민하던 새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단 시도는 해 보겠슴다. 근데… 솔직히 장담은 못 할 것 같슴다. 게다가 이건 양이 너무 적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슴다. 혹시나 실패해도 혼내시면 안 됨다?”

새로는 자신 없다는 눈을 했다. 축 처진 눈꼬리가 영 시무룩해 보였다.

“그래,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도 좋아.”

새로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지만, 윤태희는 정말로 개의치 않았다. 재촉하고 서두르는 것보다 느긋하되 완벽한 것이 좋았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선 차분히 공을 들이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했다.

‘왜냐뇨. 그야 친해지기 싫으니까.’

윤태희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물론, 순순히 알겠노라 대답할 리는 없겠거니 예상이야 했었지만. 설마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줄은 몰랐다. 직구는 통하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면 돌아가는 수밖에 없나… 윤태희는 아까보다 훨씬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기다리면 언젠가 물밑으로 가라앉은 찌가 움찔거리는 순간이 올 것이다.

돌이켜 보면 시간은 언제나 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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