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재겸은 비장한 얼굴로 교문 앞에 섰다.
혹시라도 어제처럼 사서와 마주치는 불상사가 생길까, 오늘은 십 분 늦게 집에서 나왔던 재겸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목 언저리를 쓸어 보았다. 넥타이가 든든하게 목을 조이고 있었다. 이번엔 뒷덜미와 귓바퀴를 더듬었다. 싹둑 잘려 나간 머리카락 덕분에 만져지는 것은 살갗뿐이었다. 확인을 마친 재겸이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겸은 흡사 전장으로 향하는 장수처럼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멀리 본관 입구에 서 있는 학주가 보였다. 마침내 학주와 재겸이 시선을 마주쳤다.
“…….”
“…….”
철천지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듯 한차례 긴장감이 흘렀다. 학주는 재겸을 위아래로 훑으며 심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다행히 어제처럼 붙잡히는 일은 없었다.
당당히 본관에 입성한 재겸은 뿌듯한 얼굴을 했다. 본관 내부는 등교하는 아이들로 인해 계단이며 복도며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교무실이 위치해 있는 2층 계단을 지날 때였다.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던 재겸이 걸음을 멈췄다. 정면에서 사서 청년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서류 뭉치를 뒤적거리며 느리게 발을 내딛던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어….”
또다. 이래서야 집에서 10분 늦게 나온 보람이 없는 셈이다.
재겸은 입을 꾹 다문 채, 멀뚱멀뚱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청년이 한 칸씩 계단을 내려올수록 눈높이 역시 점점 내려왔다. 청년은 재겸보다 서너 칸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재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안녕.”
어제와 같은 미소였다. 재겸이 건성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또 어제처럼 귀찮게 말을 걸고 쓰잘데없는 질문이나 하겠지. 오늘은 왜 늦었어요? 오늘은 넥타이 안 빼먹었네, 뭐 이런 것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청년이 무슨 말을 건네고 어떤 행동을 할지 눈에 훤했다.
벌써부터 귀찮아지려고 했다. 재겸은 떨떠름한 낯으로 청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서너 칸 위에 멈추어 있던 청년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향기가 진해졌다. 역시나 어제와 같은 향기였다. 한 칸, 두 칸, 세 칸, 네 칸.
그리고 다섯 칸, 여섯 칸….
가만히 서 있는 재겸의 곁을, 청년은 그대로 지나쳤다.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청년을 돌아보았다. 마주칠 때마다 꼭 한두 마디는 붙이더니만 오늘은 간단한 인사가 끝이었다. 재겸을 지나친 청년은 그대로 교무실로 들어갔다. 기분 탓인진 몰라도 오늘따라 데면데면한 느낌이었다.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재겸은 이마를 긁적거렸다.
청년은 어제 친구가 되자는 둥,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고작 말 몇 마디 주고받는 것도 불편해 죽겠는데 친구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친구란 말이냐. 재겸이 단칼에 거절하자, 청년은 ‘그래요? 아쉽네.’ 하며 천연덕스럽게 받아쳤었다. 그랬는데,
“…….”
재겸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가 됐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
재겸이 교실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급식 메뉴 표를 노려보는 것이다. 요일마다 달라지는 반찬을 확인함으로써 진정한 하루가 시작된다. 이제는 제법 학생 티가 났다. 수업 중에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조영우와 함께 매점으로 날랐다. 점심시간이면 배식 줄에 섰다가 새치기하는 녀석을 발견하고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어느덧, ‘전학생’이 된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계단에서 마주친 이후로도 재겸과 청년은 곧잘 부딪쳤다. 식사를 끝내고 벤치에 앉아 있다가 교정을 산책하는 청년과 맞닥뜨리기도 했고, 체육 시간에 운동장을 뛰다가 도서실 창문 근처에 서 있는 청년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하지만 청년은 계단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겸에게 ‘안녕.’ 하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대로 제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어쩔 때는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도 인사 없이 그대로 무시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재겸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전처럼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아 편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매한가지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인간이었다.
어쨌든 순탄히 흘러가는 일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러했다. 며칠 전부터 인과를 알 수 없는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만 빼면.
보통 하루에 한 번 꼴로, 사건 대부분은 재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졌다. 이를테면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책상 위에 쓰레기가 올려져 있다거나, 가방 안에 물을 쏟았는지 책이 젖어 있다거나, 의자에 더러운 신발 자국이 남아 있다거나, 등등.
그때까지만 해도 재겸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 실수로 그랬겠거니 했다. 하지만 재겸은 어느 순간, 이 일련의 일들이 실수치고는 꽤나 악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달은 계기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을 때 생겼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난 뒤 제일 마지막 칸에 들어가서 휴지 몇 장을 뜯었다. 느릿느릿 손을 닦고 있는데, 위쪽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옆 칸에서 날아든 물건은 우유 팩이었다. 벽 쪽에 가까이 붙어 있던 게 천운이었다.
몸에 맞지는 않았으나 우유가 떨어지며 터지는 바람에 재겸의 신발이 더러워졌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와중이었다. 누군가 후다닥 도망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겸이 밖으로 나가 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화장실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저뿐이었다.
“…….”
이렇게 유치하고 의미 없는 장난질을 벌일 상대야 당연히 잡귀뿐이라고, 재겸은 생각했다. 그동안 재겸은 학교 이곳저곳에서 몇몇의 잡귀를 발견했었다. 뭘 하고 있나 살펴보면 분필을 들고 허공에 글씨를 쓰고 있거나, 커튼을 묶은 매듭을 묶었다가 풀며 놀고 있거나, 빈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흉내나 내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딱히 손을 쓰지 않은 이유는 인간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가벼운 장난으로 봐주기엔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재겸은 손을 들어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교복 재킷 안쪽으로 두툼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일전에 써 둔 부적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이제 쓸 일이 생겼다.
“이런 잡귀 씹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
분장실 거울 앞은 수십 가지가 넘는 메이크업 도구와 소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주 씨, 30분 뒤에 슛 들어갑니다! 분장팀, 마무리해 주세요!”
정주는 분장실 의자에 앉아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눈가며 광대며 여기저기를 톡톡 건드리는 부드러운 브러시의 질감이 느껴졌다. 스타일리스트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있던 정주가 한쪽 눈을 뜨고 문간에 선 스태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등교 첫날, 재겸을 학교로 데려다준 뒤로 벌써 열흘 가까이 지나 있었다. 시간은 갈기를 휘날리며 내달리는 준마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사이 재겸으로부터 단 한 통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정주였다. 바쁜 스케줄을 정신없이 소화하는 와중에도 재겸을 향한 걱정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을 만들자고 몇 번도 넘게 사정해 봤지만 재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정주는 더 강경하게 밀고 나가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물론 일찍이 시골집에 집 전화 한 대를 놔두었지만 집 전화는 있으나 마나였다. 재겸이 항상 전화선을 빼놓기 때문이었다. 혹시 몰라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역시나 연결음은 들리지도 않았다.
언젠가 서울에 있던 정주는 평소처럼 시골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재겸은 게임 속에서 보스 몬스터와 결투를 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난데없이 울린 전화벨 소리에 놀라 잠깐 손을 머뭇댄 사이에 재겸은 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재겸의 캐릭터가 죽었다. 재겸은 분노하며 정주에게 개쌍욕을 쏟아 냈고, 결국 집 전화의 플러그는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한 달이라도 꽂혀 있으면 다행인 셈이 되었다.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정주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스타일리스트가 손을 멈추고 ‘네?’ 하고 물었다.
“아. 아니에요.”
스타일리스트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마저 손을 놀렸다. 정주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학교에 연락을 해 볼까 했지만, ‘저희 애는 잘 지내나요?’ 하고 물었다간 괜히 유난 떠는 형국만 될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스케줄을 끝내고 직접 내려가는 편이 나았다. 큰 투자를 받아 진행하고 있는 영화 촬영도 어느덧 막바지였다.
그 와중에 한창 주가가 뛰고 있는 정주였다. 얼마 전엔 어느 신문사에서 주최한 ‘누리꾼이 꼽은 낫닝겐스러운 연예인’이라는 투표에서 1위까지 했다. 정주는 흐뭇한 심정으로 기사를 스크랩해 두었다. 처음엔 낫닝겐이라길래 정체를 들킨 줄로만 알고 입에 거품을 물 뻔했지만, 그 뜻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기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재겸이한테 자랑해야지. 이번 일정만 마무리되면 며칠 정도는 여유가 생길 터이니, 시간이 나는 대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선배님, 전화 왔습니다.”
그때,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정주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누구예요?”
“모르는 번호입니다.”
매니저가 휴대폰의 액정을 보여 주었다. 화면에 뜬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였다. 섭외나 일 연락이라면 매니저의 번호로 올 것이고, 이것은 정주의 개인 번호였다. 정주는 평소 모르는 번호는 절대 받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손을 저으며 무시하라고 말하려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재겸이가 아닐까? 다른 사람 전화를 빌려 연락을 했다거나….
“이리 주세요.”
정주는 매니저의 손에서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골똘히 액정을 내려다보다가 화면을 터치해 옆으로 밀었다. 곧바로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네, 여보세요?
혹시나 재겸인가 했던 기대감이 초라하게 흩어졌다.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정주의 얼굴 위로 실망감이 떠오르려던 순간이었다.
- 여기 대륭 고등학교인데요, 혹시 김재겸 학생… 삼촌 되시나요?
헉! 편하게 앉아 있던 정주가 상체를 벌떡 세웠다.
“네네! 맞습니다. 제가 재겸이 삼촌입니다.”
- 아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재겸이 담임을 맡고 있는 서미진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제가 진작에 찾아뵙고 직접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정주가 두 손으로 휴대폰을 받쳐 들고 허리를 굽신거렸다. 당황한 듯 묘하게 쩔쩔매는 태도에, 곁에 서 있던 스타일리스트와 매니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주와 서 선생은 적당히 인사치레를 주고받으며 간단하게 대화를 나눴다. 예의 바른 서두가 지나자 곧바로 본론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전화를 주신 이유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다. 정주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 네, 그게. 연락을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잠시 말을 흐리던 서 선생이 침중한 어투로 물꼬를 텄다.
- 삼촌분께서 잠시 학교로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예?”
- 재겸이가….
정주가 초조한 기색으로 서 선생의 말을 기다렸다.
- 재겸이가… 같은 반 아이랑 치고받고 싸움을 벌였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통 말을 안 하네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싸움이 붙은 아이의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오셔서… 서 선생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띄엄띄엄 들려 왔다. 정주의 입이 벌어졌다.
그간의 무소식이 비보가 되어 날아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