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4)화 (24/348)

#24

계속되는 장난질을 귀신의 소행이라 결론 내린 재겸은, 이런 일을 벌인 잡귀를 색출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계획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바로 어제였다.

하루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조영우와 함께 본관 건물에서 나와 교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영우는 교문 앞에 모처럼 와플 트럭이 왔으니, 와플을 먹고 가자는 제안을 했다. 조영우가 일전에 학교의 명물이라고 얘기한 바가 있던 그 와플이었다. 재겸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학교 화단 구석에 잡귀 서넛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잡귀 무리를 발견한 재겸은 해맑게 와플 찬양을 늘어놓고 있던 조영우에게 먼저 가서 와플을 주문해 놓으라고 했다. 조영우는 의아한 얼굴로 왜 그러냐고 물었고, 재겸은 교실에 놓고 온 물건이 있다고 둘러댔다.

조영우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재겸은 잡귀 무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잡귀 서넛은 재겸이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그저 시시덕거리기 바빴다. 가까이서 잡귀들의 외양을 확인한 재겸이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잡귀 하나는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털장갑을 끼고 콧물을 줄줄 흘리며 추위에 떨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팔과 다리가 바뀌어 붙어 있어 손이 아니라 발을 쓰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간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그건 천이 아니라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잡귀들은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돌멩이로 탑을 쌓고 있었는데, 각자 손에 조그만 돌멩이를 들고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멩이로 만든 탑은 두 뼘 정도 되는 높이였다. 잡귀 하나가 꼭대기에 무사히 돌을 안착시키면, 나머지 둘은 좋다고 웃어 대는 것이었다. 재겸은 짝다리를 짚은 채 무심한 얼굴로 그 광경을 관람했다.

추위에 떠는 잡귀가 떨리는 손으로 돌을 올렸다.

“잘했다! 높아졌다!”

“잘했지. 높아졌지.”

“잘했나? 높아졌나?”

다행히 탑을 무너뜨리지 않고 돌멩이를 쌓는 데 성공했다. 잡귀 셋이 기분 좋게 몸을 흔들거리며 손뼉을 쳐 댔다. 잠시 서 있던 재겸도 손을 들어 무성의하게 박수를 쳤다.

“잘했네. 높아졌네.”

재겸은 동그랗게 모여 앉은 잡귀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잡귀들이 앉은 대로 똑같이 쪼그려 앉았다. 잡귀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재겸을 쳐다보았다.

“으응…?”

“으응….”

“으응…!”

“그럼 이제 내 차례냐?”

재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적당히 쓸 만한 돌이 보였다. 재겸은 쪼그려 앉은 채로 오리걸음을 했다. 마침내 돌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 재겸이 사악하게 웃었다. 재겸이 가져온 것은 작은 돌멩이가 아니라 거의 바위 수준이었다.

“으랴차.”

와르르….

“…….”

“…….”

“…….”

잡귀들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돌탑을 허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잘은 돌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탑은 육중한 크기의 돌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폭삭 내려앉았다.

“망했어?”

“망했어.”

“망했어!”

눈 뜨고 코 베인 격이다, 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몇 시간 동안 쌓아 올린 탑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던 잡귀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재겸을 노려 보았다. 재겸은 손바닥을 탁탁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봐, 이 잡놈의 새끼들아.”

재겸이 험악한 표정으로 발치로 굴러 든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리고는 교복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미리 만들어 둔 부적은 축퇴부(縮退符)였다. 이 축퇴부가 있으면 웬만한 하급 잡귀, 요물 정도는 쉽게 쫓아내고 없앨 수 있었다. 일전에 자벌레를 상대할 적에 급하게 썼던 부적과 비슷했다. 재겸은 축퇴부를 한 장씩 돌돌 말아 정결한 명주실로 질끈 동여맨 뒤, 종이봉투에 넣어 다녔다.

재겸은 봉투 안에서 말아 둔 부적 하나를 꺼내 들었다.

“셋 중 누구냐? 아니면 셋 다냐?”

재겸이 손가락 사이로 귀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부적을 동여매고 있던 명주실이 귀기와 반응하며 재가 되어 흩어졌다.

명주실이 사라지자 비로소 가려져 있던 부적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잡귀들은 재겸이 꺼내 든 것이 부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잡귀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턱을 덜덜 떨었다. 잡귀들은 이지가 불분명한 존재인 만큼 피부로 와 닿는 즉물적인 공포감에 취약했다.

“너네지? 며칠 전부터 내 자리에 지랄한 거?”

재겸이 협박하듯 물었다.

“나 아니야!”

“나도 아니야.”

잡귀 둘은 벌벌 떠는 와중에도 억울해했다. 재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부적으로 잔뜩 겁을 줘가며 물었건만 잡귀들은 한사코 부정했다. 잡귀는 사고 회로가 단순하기 때문에 치밀하게 머리를 굴리지 못한다.

“너구나?”

재겸은 말이 없는 잡귀를 향해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나는….”

재겸은 잡귀에게서 허술한 변명이라도 이끌어 낼 생각이었다. 추위에 떨던 잡귀의 어깨가 펄쩍 뛰었다. 옳거니. 재겸이 부적을 팔랑거리며 잡귀를 노려보았다. 잡귀는 주먹을 쥐고 제 가슴팍을 퍽퍽 내리쳤다. 무섭고 당황스러운 와중에 무언가 답답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구, 구, 구경만 했단 말이야!”

“뭐?”

“진짜 구경만 했어….”

“뭘 구경했는데?”

콧물을 찔찔 흘리며 추위에 떨던 잡귀가 이상한 말을 했다. 그리고는 손에 뾰족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더니 화단 울타리를 넘어 운동장으로 껑충껑충 뛰어갔다. 잡귀는 멀뚱멀뚱 서 있는 재겸에게 손짓을 했다. 잡귀가 재겸의 눈치를 보며, 나뭇가지를 붓처럼 쥐고 흙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뭐 하냐?”

재겸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물었다. 나머지 잡귀 둘도 그 뒤를 쭈뼛쭈뼛 따라왔다. 그러나 추위에 떠는 잡귀는 창작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툭하면 허공에 붓질을 하고 있더라니. 잡귀의 그림 실력은 굉장했다. 나뭇가지 하나로 흙 위에 음각을 새기듯 형체를 그려 나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손놀림 몇 번에 책상이 생겨났고, 의자가 생겨났고, 칠판도, 그리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어?”

무심한 낯으로 운동장 바닥을 내려다보던 재겸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느 순간, 잡귀가 그린 그림이 꿈틀거렸기 때문이었다. 잡귀가 그린 것은 교실 풍경이었다. 흙 위에 그려진 선이 저절로 움직였다.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영상처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저마다 생명력을 얻고 교실을 돌아다녔다. 잡귀가 그린 학생들은 놀랍도록 섬세했고, 인물의 특징을 아주 정확히 잡아내고 있었다. 잡귀는 그 와중에 사람 한 명을 더 그려 넣었다.

“이건… 이주열?”

재겸이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잡귀가 마지막으로 그린 것은 틀림없이 이주열이었다.

이주열이 움직인다. 사물함 위에 놓여 있는 주인 없는 물병을 발견한다. 물병을 집어 든다. 물병을 들고 창가 자리로 향한다.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물병의 뚜껑을 연다. 다시 주위를 살핀다. 이주열이 그대로 일시 정지하여 서 있다. 그때, 잡귀가 창가 쪽 어느 의자에 가방을 그려 넣었다. 그제야 이주열이 다시 움직인다. 이주열은 의자 뒤에 걸려 있는 가방으로 다가간다. 반쯤 열린 지퍼 사이로 물을 쏟아붓는다.

“설마….”

잡귀는 지금 자신이 본 광경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서 보여 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너, 도화귀(圖畵鬼)였구나.”

재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잡귀가 고개를 들었다. 돌멩이로 탑을 쌓을 때만 해도 흐리멍덩하던 눈에선 어느새 총기가 흐르고 있었다. 도화귀. 삼라만상을 그림으로 그릴 줄 알며, 그림에 미쳐 지내는 귀신이었다. 도화귀는 병풍 속에서 산다. 집집마다 병풍 하나쯤은 있던 과거엔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여간해선 그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도화귀가 초여름에도 덜덜 떨고 있는 것은 집으로 삼았던 병풍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병풍에서 나왔다가 갈 곳이 없어지자, 미술실이 있는 학교에 뿌리를 내린 듯했다. 예전엔 그림을 그리는 화인들이 일부러 도화귀를 불러내어 그림 실력을 탐했다가 시름시름 앓는 경우도 많았다.

도화귀는 자신이 직접 본 것만 그릴 수 있다. 때문에 이렇게라도 그림을 그려서 억울한 누명을 벗고 싶은 모양이었다. 구경만 했다더니 이걸 말하는 거였나.

범인은 이 그림 안에 있다. 우유를 던진 것 역시 이 녀석일 터.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 뒤에서 치졸하고 유치한 수작질을 부리고 있던 거였다. 생각보다 질이 나쁜 인간이었다.

재겸은 들고 있던 부적을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거 참. 그림, 잘도 그리네… 아니라고 말을 하지 그랬냐….”

말로 해 봤자 재겸은 믿어 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진짜 범인이 누군지도 몰랐을 테지만, 어쨌든 재겸은 궁시렁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애꿎은 돌탑을 무너뜨린 게 미안해지려고 했다. 그사이, 잡귀 둘은 방금 전의 일은 금세 잊어 먹었는지 흙바닥에 쪼그려 앉아 또다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잘 그렸나? 잘 그렸어!

“…….”

잠시 머뭇거리던 재겸이 잡귀 둘과 똑같이 손뼉을 쳤다.

“잘 그렸네.”

짝짝짝.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성의가 듬뿍 묻어 나오는 박수였다.

“재겸아!”

그때, 멀리 교문에서 두 손에 와플을 들고 선 조영우가 보였다. 재겸은 잡귀들에게 인사를 남긴 뒤, 조영우와 함께 사이좋게 집으로 향했다. 조영우가 사 온 와플은 맛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재겸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이주열에게 주먹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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