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울다 지쳐 까무룩 잠들었던 메산이는 눈을 뜨자마자 재겸을 찾았다.
애석하게도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혹시 그새 어디론가 떠나 버리신 건 아닐까? 메산이는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방 안을 자세히 둘러보니, 벽 한쪽에 걸려 있던 교복과 가방이 사라져 있었다. 간밤에 집을 발칵 뒤집어 놓고, 저의 나리는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온 메산이가 마루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메산이를 기다리던 산새들이 앞다투어 지지배배 인사를 건넸다. 평소라면 배시시 웃어 주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메산이의 얼굴은 간밤에 쏟은 눈물로 인해 찐빵처럼 퉁퉁 부어있었다. 메산이는 수심이 가득한 낯으로 고즈넉한 산자락을 올려다보았다.
‘잘 잤어? 잘 잤어? 잘 잤어?’
“아아니… 잘 못 잤어….”
메산이가 무릎을 세우고 양팔로 다리를 끌어안았다.
정주는 어젯밤 서울로 떠났다. 갑작스레 촬영을 중단하고 장시간 자리를 비웠던 상황이었다. 금방 돌아오겠다 해 놓고 밤이 되도록 정주가 나타나질 않자, 3분에 한 번 꼴로 전화가 빗발쳤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메산아. 우리가 재겸이랑 같이 보낸 세월이 얼만데. 홧김에 그냥 해 본 소리일 거야.’
‘그, 그렇겠죠?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시겠죠?’
‘그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그동안 잘 달래 주자.’
정주는 평소 들고 다니던 여분의 휴대폰을 메산이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부탁하기를, 재겸의 동태를 살펴 하루에 한 번씩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했다. 집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간 재겸의 귀에 들어갈 우려가 있으니 재겸 몰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라는 뜻이었다.
메산이는 손을 내려 주머니에 든 묵직한 휴대폰을 만져 보았다.
“우리 나리께는, 내가 없으면 안 돼.”
메산이가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
아침이면 언제나 부산한 복도였지만 오늘은 유달리 그 정도가 심했다.
2학년 3반 앞은 송사리떼처럼 구경꾼이 몰려 있었다. 앞문, 뒷문은 물론이고 창틀까지 다닥다닥 얼굴을 붙이고 교실 내부를 기웃거렸다. 덕분에 복도 한가운데가 꽉 막혀 버렸다. 3반 앞을 지나쳐야 할 아이들은 온갖 짜증을 내며 구경꾼 무리를 밀쳐 내야만 했다.
“없는데? 안 보이는데?”
“아직 안 왔나 봐.”
“개놈들아, 좀 비켜 봐.”
“야이, 밀지 말라고.”
3반 아이들 역시 얼떨떨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게 다 현직 연예인을 삼촌으로 둔, 신기한 동급생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보기 위함이었다. 재겸은 고작 단 하루 만에 학교의 유명인사로 거듭났다. 김재겸 이름 석 자는 전교 1등의 명성에 버금갈 정도로 널리 퍼져 있었다.
“야야, 3반 애들아. 김재겸 언제 와?”
“맞아. 빨리 좀 오라고 해 봐.”
“김재겸 휴대폰 번호 아는 사람?”
기다리다 지친 학생 두세 명이 질문을 던질 때였다.
“나 휴대폰 없는데.”
시장바닥처럼 왁자지껄한 와중에 뒤쪽에서 무심한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은 금세 묻힐 뻔 했으나, 근처에 있던 몇 명이 그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명찰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야, 야! 뒤에….
“왔다!”
그와 동시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모세의 기적처럼 순식간에 길이 생겼다. 인파에 치여 교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3반 아이들은 그 틈을 타 간신히 교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옆으로 물러선 학생들은 수군대며 대놓고 재겸을 구경하기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겸은 시큰둥한 낯으로 구경꾼들의 곁을 지나쳤다.
“이 자식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교실로 빨랑 안 튀어가?!”
그때, 계단을 내려오던 서 선생이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복도 끝에서 날아든 꾸짖음에 학생들은 아쉬운 눈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 와중에 교실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야아, 이따가 정주랑 영통 한 번만 해 주면 안 되냐?”
“나는 사인 한 장만, 울 누나가 받아 오랬어.”
라는 식의, 애절하고도 질척한 부탁을 맡겨 두고 떠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서 선생은 조회를 끝낸 뒤, 이주열과 재겸을 복도로 불러냈다. 순순히 불려 나온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 이후로 둘은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서 선생은 이주열과 재겸에게 방과 후, 닷새간의 교내 봉사 처분을 내렸다.
사실, 말만 교내 봉사일 뿐 학교 차원에서 정식으로 징계를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엇비슷한 피해를 봤으니 이 이상 일을 키우지 않고 담임 선에서 무마하기로 했다. 학주와 상의를 나눈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정주가 메산이를 대동하여 병원으로 달려갔던 노력이 허사가 되지는 않은 셈이었다.
재겸은 본관에 별관, 그 하고 많은 장소 중에서 하필이면 도서실을 청소하게 되었다. 서 선생으로부터 도서실로 가라는 지시를 듣자마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주열은 무거운 장비가 한가득 쌓여 있는 강당 기자재실로 불려 갔다. 둘이 바꾸자고 해 볼까 생각도 해 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주열에게 말을 거는 건 더 싫었다.
방과후, 도서실 문 앞에 선 재겸은 애먼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 문짝과 눈싸움을 하듯 뚫어져라 노려보던 재겸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재겸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어….”
서가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다시는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원래도 가깝게 지내던 건 아니었지만 넥타이를 돌려주던 그 날 이후로 재겸과 청년 사이엔 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안녕.”
오랜만에 본 얼굴임에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모른 척할 땐 언제고, 청년이 씩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괜히 심기가 뒤틀린 재겸은 뻣뻣하게 고개만 슬쩍 숙였다. 재겸을 빤히 쳐다보던 청년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얼룩덜룩하네요.”
재겸의 뚱한 눈빛을 읽어 낸 청년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얼굴 말이에요.”
“아, 뭐….”
재겸이 말을 흐리며 괜시리 볼따구를 쓸어 보았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어쩌다 그랬느냐고 묻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청년은 재겸이 여기에 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처럼 필요 이상으로 질문을 하진 않으니,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서가 앞을 서성이던 청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재겸은 저를 향해 다가오는 줄 알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하지만 청년은 그대로 재겸을 지나쳐 데스크로 향했다. 지척에서 익숙한 향기가 풍겼다. 몇 번이고 맡았던 적 있는, 관능적인 그 향수 냄새였다.
잠시 눈치를 보던 재겸은 구석 한켠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도서실 내부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데스크 옆에는 못 보던 테이블 하나와 의자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길쭉한 테이블에는 학생 두세 명이 앉아 열심히 책을 읽는 중이었다.
“저 뭐 해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재겸이 물었다.
“마음에 드는 책 아무거나 골라서 읽어요.”
“저는 교내 봉사하라고 해서 청소하러 온 건데요.”
“어쩌지, 청소는 아까 전에 내가 다 했는데.”
청년이 다리를 꼬고 앉으며 평이하게 대꾸했다. 청년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럼 전 뭐 해요?”
“책 읽으라니까요.”
“…….”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순간 말문이 막힌 재겸이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엔 황당함이 묻어나왔다. 청년이 데스크 위를 톡톡 건드렸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의자를 뒤로 물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할 일이 필요해요?”
청년은 드르륵,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손에 든 것은 얇은 스프링 노트와 모나미 볼펜 한 자루였다. 청년은 노트와 볼펜을 테이블의 비어 있는 자리에 반듯이 올려 두었다.
“그럼 책 읽고 감상문 쓰세요.”
뭐? 재겸이 단박에 인상을 구겼다.
“청소는 내가 다 했고, 책 정리도 방금 내가 다 했고, 그래서 친구가 할 일은 없고, 근데 친구는 할 일이 필요하고, 그러니까 책 읽고 감상문 쓰세요.”
“아니. 감상문 쓰는 거랑 교내 봉사랑 무슨 상관인데요?”
“싸운 벌로 도서실에 온 거니까 뭘 시킬지는 사서 선생님 마음이지.”
테이블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고 선 윤태희가 짓궂게 웃었다.
“형식과 분량은 자유롭게 해도 좋아요. 반, 번호, 이름 쓰는 거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