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책은 끝까지 안 읽어도 되니까. 읽을 수 있는 만큼만 읽어요. 읽다가 감명 깊은 문장이 있으면 그걸 인용해서 그 밑에 감상을 달아도 좋고, 읽은 내용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도 좋아요.”
청년이 친절하게 덧붙였다. 재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몸을 쓰러 왔는데 머리를 쓰라고 한다. 하루 종일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왔는데 또 책을 읽으라고? 차라리 청소를 시켜! 못마땅한 얼굴을 한 재겸이 짜증스레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뜬금없이 과제를 내준 청년은 데스크로 돌아갔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리본이 그려진 머그잔을 들어 올렸다. 식어 버린 믹스 커피를 소리 없이 들이켰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컴퓨터에 딸려 있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도서실 안이 조용해졌다. 들리는 소리라곤 청년이 마우스를 딸각거리는 소리와, 책 읽는 아이들이 이따금 사라락,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
문간에 멀뚱히 서 있던 재겸이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청년의 말대로 도서실 내부는 깨끗했다. 수많은 책은 각각 알맞은 자리에 정확하게 꽂혀 있었고, 멀끔한 바닥엔 휴지 쪼가리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다. 재겸의 눈으로 봐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보였다.
우선은 읽을 책을 골라야 했다. 책장 앞에 서서 물끄러미 제목을 훑던 재겸이 손을 뻗었다. 독서에 흥미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재겸에게 읽고 싶은 책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건 글씨였다. 재겸은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빼 들었다.
최대한 두께가 얇은 책을 고른 재겸은 열람석 테이블로 향했다. 노트와 볼펜이 올려진 자리로 가서 의자를 슬그머니 빼냈다. 의자에 앉자마자 저절로 에휴, 한숨이 나왔다. 회한이 담긴 한숨 소리에 책을 읽던 아이들이 재겸을 힐끔거렸다. 윤태희는 턱을 괴는 척하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재겸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책을 직각으로 펼쳐 들었다. 자세만큼은 웬만한 선비 저리가라였다. 재겸이 또렷한 시선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흠….”
10분 뒤, 재겸은 책을 눕혔다.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20분 뒤, 재겸은 턱을 괴었다. 자고로 책을 볼 땐 자세가 편해야 한다.
30분 뒤, 재겸은 책상에 얼굴을 누였다. 볼따구 한쪽이 찌그러졌다. 책과 눈높이를 맞춰야 내용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다.
1시간 뒤, 재겸은 그대로 한쪽 팔을 베고 잠이 들었다.
***
열람석에 앉아 책을 읽던 학생들이 하나둘 도서실을 떠났다. 어느 순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학생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끌리며 끼익, 불편한 마찰음을 일으켰다. 그러자 입을 벌리고 자던 재겸이 번뜩 눈을 떴다.
“어, 어… 미, 미안. 깼어?”
재겸이 눈을 부릅뜨고 가방을 메던 학생을 응시했다. 노려보듯 한기가 흐르는 시선에, 학생이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속삭이듯 사과를 건넸다. 학생은 순간적으로 사과를 해 놓고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내, 내가 잘못한 건가? 도서실에서 자는 애한테 깨워서 미안하다고 할 이유는 없지 않나? 표정이 하도 험악해서 저절로 사과가 나왔다.
학생을 째리던 재겸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혹여 누가 들을세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안 잤는데?”
“어?”
“안 잤다고.”
“아, 어….”
“안 잤어.”
학생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애네… 학생은 가방을 챙겨 후다닥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도서실 문이 닫히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재겸이 데스크를 슬쩍 곁눈질했다. 청년은 여전히 변함없는 자세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업무를 보는 중인지 무언가에 한창 열중한 모습이었다. 청년의 눈치를 살피던 재겸이 소리 없이 목을 가다듬었다. 뒤늦게 스프링 노트를 펼쳤다. 볼펜을 들고 흰 여백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간간이 책 내용을 힐끔거리며 진지하게 글을 끄적거리던 재겸이 어느 순간 볼펜을 내려놓았다. 펼쳐 놨던 노트 커버를 덮었다. 읽던 책도 덮었다. 책을 꺼낸 서가로 가서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두었다. 정리를 끝낸 재겸은 노트를 들고 청년이 앉아 있는 데스크로 향했다.
“다 했어요.”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청년이 힐끗 재겸에게 시선을 던졌다. “잠시만.” 청년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그러면서 재겸을 향해 한쪽 팔을 뻗었다. 재겸이 멀뚱멀뚱하게 서 있자, 청년은 내민 손을 까딱거렸다. 노트를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재겸이 빈손에 노트를 건넸다. 노트를 건네받은 청년이 그제서야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데스크에 가까이 붙어 있던 청년이 바퀴가 달린 의자를 뒤로 물렸다. 청년은 등받이에 허리를 편히 기댔다. 방금 전의 반듯하던 자세보다 훨씬 나른해 보였다.
“설마 책 한 권을 다 읽었어요?”
청년이 눈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아뇨. 다 안 읽었는데요.”
“그럼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재겸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읽는 속도가 느려서요.”
“그래요?”
청년이 조그맣게 웃으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럼, 얼마나 잘 썼는지 볼까.”
호기롭게 노트를 펼치자마자, 청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종이에 적힌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년이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뒷장을 확인했다가 금방 다시 돌아왔다. 청년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청년은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렸던 노트를 내리고 재겸을 응시했다.
“…….”
말없이 재겸을 바라보는 청년의 표정은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감상문이에요?”
“마음대로 쓰라면서요.”
재겸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희가 심각한 눈빛으로 노트를 다시 한번 얼굴 근처로 들어 올렸다. 일단 소년은 엄청난 악필이었다. 휘갈겨 쓴 듯한 글씨는 말 그대로 괴발개발, 아주 엉망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필체가 아니라 내용이었다.
2 학 년 3 반 3 4 번
김 재 겸
감자떡은 강원도 지방의 전통 떡으로 특유
의 쫀득거리는 식감이 일품이다
콩 앙금 또는 삶은 콩을 안에 넣어 빚는다
감상: 나는 감자떡보다 꿀떡이 더 좋다
윤태희가 망설임 없이 노트를 덮었다.
“…….”
“…….”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분량과 형식은 자유롭게 하라고 말은 했지만 이건 너무 자유로운 게 아닐까? 거의 파괴 수준인데…. 감명 깊은 구절을 인용하라고 했더니 감자떡을 소개하는 문장을 베껴 올 줄은 몰랐다. 침묵하던 윤태희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이게 책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네.”
“책 제목이 뭐예요?”
“<팔도의 맛을 찾아서>요.”
“작가가 누군데요?”
“전 모르는 사람인데요.”
“아니, 내 말은….”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윤태희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썹을 매만졌다. 윤태희는 팔걸이 위로 턱을 괴며 재겸을 빤히 응시했다.
“…….”
다소 앳된 얼굴의 소년은 그 흔한 감상문 한 번 써 본 적이 없는 듯했다. 어차피 감상문은 구실에 불과했다. 윤태희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고작 독후감 따위가 아니었다.
“좋아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청년이 눈매를 사르르 허물어트렸다.
“감자떡에 대한 부분이 감명 깊었군요.”
“네.”
“그리고 친구는 감자떡보다 꿀떡을 좋아하고요.”
“네.”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관이 확실하네요. 보기 좋아요.”
“흠, 네.”
“솔직하고 간결한 감상, 아주 인상 깊었어요.”
재겸은 말없이 볼따구를 긁적거렸다. 사실은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대충 아무 쪽이나 펼쳐서 보이는 대로 옮겨 적었다. 헌데 사서가 보기에 썩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전처럼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 기미가 보이는 듯하여 내심 귀찮아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사서는 담백한 칭찬을 건넸다. 처음엔 난데없이 감상문을 쓰라고 해서 화가 뻗쳤는데 이렇게 칭찬을 받으니 약간 쑥스러워졌다. 과연 칭찬받을 정도인가? 멋쩍어진 재겸이 눈을 내리깔 때였다.
“감자떡 먹어 봤어요?”
청년이 나지막이 물었다.
“네.”
“난 한 번도 안 먹어 봤는데. 어때요?”
잠시 고민하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콩 들어간 것보다 앙금으로 채운 게 맛있어요.”
“그래요? 혹시 콩 싫어해요?”
“아뇨. 그건 아닌데요.”
“나는 콩이 싫어요.”
청년이 살짝 인상을 썼다. 재겸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왜요?”
“맛없어.”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배가 덜 고파 봐서 그래요.”
다리를 꼬고 앉은 청년이 말없이 발끝을 살랑거렸다.
“…….”
잠시 뒤,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반창고와 노트를 꺼냈던 때처럼 드르륵, 데스크 서랍을 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무언가를 꺼내 들더니 멀뚱히 서 있던 재겸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청년이 재겸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손 좀 주세요.”
재겸이 눈꼬리를 세우며 경계심 어린 눈빛을 했다. 이번엔 또 뭘 하려고. 재겸의 표정을 본 청년이 조그맣게 웃었다. 청년이 서랍에서 꺼내 든 것은 동그란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는 종이였다. 청년은 파란색 스티커 한 개를 떼어 내 재겸의 손등 위로 붙여 주었다.
재겸은 뒤늦게 몸을 물리며 손등을 살폈다.
“이게 뭐예요?”
“칭찬 스티커.”
잠시 스티커를 내려다보던 재겸이 희미하게 인상을 쓸 때였다.
“참 잘했어요.”
청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재겸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었다.
“감상문이요?”
“감상문도 잘했어요.”
감상문도, 라니. 감상문 말고 칭찬할 게 또 있나? 재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청년을 올려다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데, 청년이 한발 먼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가고, 내일 봐요.”
재겸의 손이 순간 움찔거렸다.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그대로 따라서 손을 흔들 뻔했다. 재겸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내려 둔 가방을 챙겨 들었다. 느릿느릿 등을 돌려 도서실 문을 열었다.
등 뒤에서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재겸은 도서실 문을 등진 채로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하교 시간이 지난 복도는 도서실만큼이나 조용했다. 복도에 난 창문 너머로 뉘엿뉘엿 노을이 졌다. 재겸의 발등으로 시들어 가는 주홍빛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뭔가 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콕 짚어 대답하긴 힘들지만 아무튼 뭔가 이상했다.
귀찮게 다가오는가 싶으면 데면데면하게 굴었고, 모른 척하며 피하는가 싶으면 적당히 말을 붙여 왔다. 재겸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던 질문들 역시 종적을 감췄다. 서로 시시껄렁한, 시답잖은 말이나 몇 번 주고받은 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근데 그것이 제법 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실은 친구 하기 싫다고 해서 삐진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나.
“내일….”
재겸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손등에 붙은 파란색 칭찬 스티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스티커가 살갗에 착 달라붙은 촉감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