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5)화 (35/348)

#35

오늘로 교내 봉사 나흘째. 재겸은 지난 사흘 동안 세 개의 감상문을 제출했고, 그때마다 청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참 잘했어요.’ 칭찬 스티커를 붙여 줬다.

‘스티커는 잘 모아 두고 있어요?’

어제, 사서 청년이 재겸의 손등에 스티커를 붙여 주며 했던 말이었다.

‘예? 뭐요?’

‘칭찬 스티커. 이걸로 세 개째잖아요.’

재겸이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손등만큼은 순순히 내어 주던 참이었다.

‘그걸 내가 왜 모아요?’

‘칭찬 스티커는 다 모으면 선물 주는 거 몰라요?’

‘…….’

당연히,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무슨 선물이요?’

‘궁금해요?’

재겸이 대답 대신 눈썹을 꿈틀거리자, 청년은 조그맣게 웃었었다.

‘남은 이틀 동안 스티커 다섯 개 다 채우면 그때 알려 줄게요.’

선물은 뭔 개 풀 뜯어 먹는 선물이냐.

그렇게 생각한 재겸은, 집에 가자마자 거울에 헐렁하게 붙여 뒀던 스티커를 살금살금 떼어 냈다. 간직하려고 붙여 놓은 건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청년의 말대로 모아 둔 셈이 되었다. 귀가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는 것이었고, 손을 씻으려고 보면 항상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사실은 버리기도 귀찮아서 대충 떼어 내 거울에 붙여놨던 참이었다. 메산이가 떼어 내서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기대감이 전혀 없었는데, 거울 한구석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스티커를 보자마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선물을 받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선물이 무엇인지, 그건 좀 궁금했다. 그래서 재겸은 이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스티커를 꼬박꼬박 모아서 선물의 정체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내가 달란 것도 아니고 지가 먼저 주겠다는데, 뭐. 받아 보고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얄짤 없이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세 개의 스티커를 모았으니, 앞으로 두 개만 더 모으면 사서가 선물을 줄 것이다. 재겸은 어느샌가부터 도서실에 가는 것이 기다려졌다. 하루종일 도서실에 갈 생각만 했다. 가서 무슨 책을 읽을지 미리 생각도 해 놨다. 재겸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후다닥 도서실로 향했다.

재겸은 성큼성큼 도서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습관처럼 응시한 데스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청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빨리 왔나? 책 읽으면서 기다려야지….

재겸은 미리 골라둔 책을 꺼내 들고 열람석에 앉았다.

“진짜 이런 곳에 계신다는 게 맞나?”

“아, 증말! 맞다고 하지 않슴까!”

서가 뒤쪽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누가 있던 모양이다. 재겸은 슬쩍 상체를 젖혀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한 명은 책꽂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한 명은 재겸을 등지고 서 있던 탓에 그 뒷모습만 보였다. 그리고,

귀신이네.

발밑에 그림자가 없는 걸 확인한 재겸이 눈을 끔뻑거렸다. 방금 들은 대화로 유추했을 땐 꽤나 뚜렷한 이지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뒷모습으로 보이는 그 옷차림이 상당히 독특했다. 초여름에 웬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 혹시 영귀인가? 학교 근처에서 영귀를 봤던 기억은 없었는데, 잠시 털가죽을 응시하던 재겸은 열람석으로 향했다.

재겸은 원래 해를 끼치는 귀신이 아니라면 웬만해서 손을 대지 않는 편이었다. 학교의 잡귀들을 모르쇠로 지나쳤던 것처럼, 악의를 지닌 원귀라고 해도 충돌을 빚지만 않으면 대부분 신경을 껐다. 인간만큼 다양한 공간에 머무르는 것이 바로 귀신이었다.

뭐, 도서실이니 책이라도 읽고 싶어서 왔나 보지. 그리 생각하던 재겸이 열람석에 앉아 대수롭지 않게 책이나 뒤적거릴 때였다. 지나가던 그 생각이 대뜸 발목을 잡았다. 문득 청년이 생각났다. 저 귀신들이 진짜 책을 보러 온 거라면, 상당히 심기에 거슬릴 것 같다.

혹시 저 영귀들은 도서실에 자주 오는 걸까?

설마 사서 청년한테 장난질을 벌이거나 해코지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근데 왜 오지 않으신단 말이야?”

“잠시 자리를 비우신 모양임다. 차분히 기다리시죠?”

평범하고, 성가시고, 약해 빠진 인간에게 괜히 신경 쓰인다.

“나는 이를 데 없이 차분해, 소란스러운 건 언제나 새로 너지.”

“패현이야말로 언제나처럼 말을 개뼉다구처럼 하심다.”

투닥거리는 대화를 흘려듣던 재겸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팔락! 거칠게 책 페이지를 넘겼다. 이 공간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혹여 인간이 있다는 걸 알면 알아서 자리를 피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새로,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아니나 다를까, 재겸이 낸 소리를 듣고 서가 뒤쪽에 서 있던 귀신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겸을 향해 걸어온 영귀 둘은 열람석 앞에 떡하니 서더니, 재겸을 대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서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귀신은 옛날 복식을 입고 있었다. 옷차림과 말투를 보아하니 꽤나 오래 묵은 모양이었다.

재겸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재빠르게 곁눈질을 마쳤다.

“잉, 뭐야. 어린 인간 아이잖슴까. 난 또 태희 님인 줄.”

태희 님? 귀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이름에, 재겸의 눈동자가 슬쩍 움직였다.

“헉! 너, 방금 나 봤지!”

“…….”

씨발, 짜증 나네. 재겸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움직였을 뿐인데, 시선이 살짝 빗나가는 바람에 티가 났던 모양이다. 귀신 하나가 삿대짓을 하며 되도 않는 호들갑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그 말에, 곁에 선 다른 귀신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전에 절 쳐다봤슴다!”

“착각이다. 저 아이에겐 우리가 보이지 않아.”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쫓아 버릴까. 품에 지니고 있던 축퇴부를 떠올리며, 잠시 고민하던 재겸은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책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그랬다간 십중팔구 괜히 귀찮은 상황이 생길 것 같았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청년이 들어올 것이었다.

“게다가, 묘하게 낯이 익는데….”

그때, 새로라 불린 영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재겸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새로가 재겸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뒤에 서 있던 패현이 새로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태희 님은 애꿎은 인간에게 손대는 걸 싫어하신다.”

“흥, 저도 알고 있슴다. 누가 물어봤슴까?”

저지를 당한 새로가 궁시렁거리며 패현의 손을 떨쳐 냈다. 곁에 서 있던 패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살짝 피곤해지려고 해서, 패현은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찾아뵙겠노라 미리 기별을 드렸겠지?”

“안 드렸슴다. 자고로 선물처럼 나타나 줘야 훨씬 기쁘지 않겠슴까.”

“새로, 넌 정말 어찌 그리 생각이 없는 거지?”

패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새로가 항변했다.

“여기가 귀신 쫓아내는 나례청도 아니고, 우리가 오면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슴까?”

“여긴 태희 님의 일터나 다름없는 곳이야. 허락도 없이 함부로 찾아와서는 안 되는 곳이고, 이렇게 대책 없이 들이닥쳤다가 태희 님께 결례가 되면 어찌하려고….”

새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받아쳤다.

“몇 번이고 절 여기로 불러내셨슴다. 그래서 제가 혼자 오겠다고 하지 않았슴까? 같이 가고 싶다고 바득바득 우긴 건 패현 당신임다.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먼저 가십쇼?”

패현이 냉랭하게 낯을 굳히며 언성을 높였다.

“태희 님은 나례청에 들일 후임 나자를 찾기 위해 이곳에 오신 거야. 그렇다면 그 후임은 응당 귀재일 텐데, 당연히 우리의 모습을 볼 가능성이 있다는 걸 모르나? 만일 모습을 들켰다가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어쩔 거지? 태희님이 나례청에서 빠져나올 구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셨는지 알면서….”

새로는 성난 패현이 쏘아붙이던 말을 싹둑 잘라먹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이 없는 이곳으로 오지 않았슴까? 제가 몇 번 와 봤는데, 그때마다 이곳엔 항상 다른 사람은 없고 태희 님만 계셨슴다. 오늘은 저 인간 아이가 있긴 하지만 평상시엔 언제나 태희 님만 계셨단 말임다!”

영귀 둘의 말다툼이 고조되어 가던 순간이었다.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재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사납게 오가던 언성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뚝 끊겼다. 영귀 둘의 시선이 자연스레 재겸을 향해 꽂혀 들었다. 재겸은 둘의 시선을 무시하며 열람석 테이블 위에 그대로 책을 내려 두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메지도 않은 채 문간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망설임 없이 도서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가슴 속을 가득 메웠던 도서실 내부의 답답한 공기를 단숨에 토해 냈다. 어째선지 자꾸만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데, 막상 나오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청년의 옆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청년은 이따금씩 저에게 ‘재밌어?’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책이 재밌냐고 묻는 것이었지만 재겸은 그때마다 ‘네.’, ‘그냥 그래요.’, ‘아뇨.’ 내용과는 상관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대답을 했다. 그러면 청년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사실 재겸은 아주 가끔 되묻고 싶었다.

그러는 너는 어떤데? 네가 오늘 읽는 책은 무슨 내용이야? 너는 지금 읽는 책 재밌어?

가만히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에 빠지기도 했다. 고작해야 삼십 분 남짓이었지만 깜빡 졸다가 깨어나면 이상하리만치 나른하고 평온한 기분이 되곤 했다. 청년은 다리를 꼬고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저는 반쯤 엎드려 열람석을 물들이는 햇살을 멍하니 구경하고….

몽롱한 풍경 속에 있노라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때만큼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이 삶이 언제 시작 되었고, 언제 망가졌으며, 어쩌다 여기 있는지. 아무렴 괜찮았다.

“안녕.”

느리게 계단을 내려가던 재겸이 걸음을 멈췄다. 몇 칸 아래서, 한 손에 머그잔을 든 청년이 웃고 있었다. 머그잔을 절반 이상 채운 커피에서 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몸을 우뚝 세운 재겸은 말없이 청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뭐였더라?

“잠깐 얘기 좀 나누느라 늦었….”

“늦었네.”

재겸이 불쑥 말을 채 갔다. 그러자 사서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름이 뭐야?”

곧바로 이어진 물음에, 사서 청년의 눈이 조금 더 동그래졌다.

“…나?”

“응.”

“…….”

청년은 잠시 묘한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숙여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응시했다. 약간 식긴 했지만 사기 너머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말없이 커피를 내려다보던 청년은 다시 눈을 들어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정확하게 맞물렸다.

“나 태희.”

한참 만에 나온 대답에, 재겸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성은?”

“윤.”

“그래.”

재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 층계를 하나씩 내려갔다. 그에 따라 재겸을 올려다보고 있던 윤태희의 시선 또한 차츰 낮아졌다. 윤태희는 말없이 거리를 좁히며 가까이 다가오는 재겸을 응시했다. 점점 둘의 높이가 엇비슷해졌다.

한 칸, 두 칸, 세 칸, 네 칸, 그리고 다섯 칸….

재겸은 코끝을 파고드는 향수 냄새를 맡으며, 윤태희에게 주먹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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