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다음 날, 재겸은 등교 시간에 맞춰 평소처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17번 버스에 올라탔다. 운전석 바로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구경했다. 어느덧 익숙해진 길을 따라 버스는 달리고 또 달렸다. 문득 고개를 돌릴 때마다 버스 안의 승객이 늘어나 있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재겸과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
“이번 정류소는 대륭 고교 사거리입니다. 다음 정류소는….”
스피커에서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자,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하나같이 몸을 일으켰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 모두가 썰물처럼 버스를 빠져나갔다. 단, 한 명만 빼고. 백미러를 힐끔거리던 버스 기사가 바로 뒤에 앉아 있는 재겸에게 말을 건넸다.
“학생, 안 내리고 뭐 해?”
멍하니 앉아 있던 재겸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약속한 한 달을 채우려면 당장 내려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재겸은 엄청난 중력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이 육중한 무게를 도저히 이겨 낼 자신이 없었다.
“안 내릴 거야?”
“네, 안 내려요.”
그래서 재겸은 뒷일 따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기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설사 다음 정류장이 낭떠러지라고 해도 지금은 내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라면 수백 번도 더 떨어질 자신이 있었다. 재겸은 오늘만큼은 정말 학교에 가기가 싫었다.
기사는 의아한 얼굴을 하더니 별말 없이 뒷문을 닫았다. 학교를 지나쳐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재겸은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생소한 간판들이 재겸의 눈동자를 긁고 지나갔다.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과 비슷한 속도로 시간이 흘렀다.
어젯밤, 재겸은 어두운 방 안에서 오래도록 뒤척였다. 주변은 온통 고요했다. 하지만 재겸은 귀가 시끄러워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희미하고 불쾌한 소리는 오직 재겸에게만 들렸다. 속았어, 넌 속았어, 또 속았어, 나자한테 또 속았어, 바보처럼 속았어….
윤태희는 재겸에게 ‘화났어?’ 하고 물었고, 그 말대로 재겸은 화가 났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재겸은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실망하는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윤태희가 귀재이자 나자라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윤태희는 정체를 숨기고 저에게 접근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리 알아차린 덕분에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했다. 앞으로 마주치지 않으면 된다. 또다시 얼쩡거리면 어제처럼 두들겨 패면 되고, 조용하다면 그대로 신경 끄면 그만이었다.
만약 윤태희가 정말 평범한 사서 선생이었다고 해도, 어차피 약속한 한 달이 지나면 더 이상 볼 일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몹시 실망스럽고 기분이 나빴다. 사포로 문댄 것처럼 마음이 까끌까끌했다. 재겸은 이런 자신에게 또 한 번 화가 났다.
예나 지금이나 나자란 족속들은…,
“씹새끼.”
재겸이 가만히 눈을 감고 혼잣말을 할 때였다.
“학생, 종점 다 왔어.”
버스가 차고지에 멈춰 섰다. 떠밀리듯 쫓겨난 재겸은 얼떨결에 낯선 거리를 배회했다. 왔던 곳은 있지만 갈 곳은 없기 때문이었다. 재겸은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일단은 어디로든 걷고 싶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따금 벤치가 보이면 잠시 앉아서 쉬기도 했다. 그러나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 망연히 걷고, 또 걸을 때였다. 어느 순간 재겸의 눈에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간판에 적힌 글씨를 본 재겸이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초원 문고….”
적당한 규모의 동네 서점이었다. 서점은 전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가게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커다란 책장엔 새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유리 너머를 기웃거리던 재겸은 괜히 가게 주변을 서성거렸다.
책이나 읽을까? 문득 도서실에서 읽다 말았던 책이 떠올랐다. 서점 안에는 책을 읽고 있는 몇 명의 손님들이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재겸은 충동적으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직원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자, 재겸은 대답 없이 고개만 꾸벅 숙였다. 천장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 가느다란 클래식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잔잔한 연주는 평화롭고 조용한 서점의 분위기와 제법 잘 어울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 막 5교시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평소 귀가하던 시간과 비슷하게 맞춰서 집에 들어가야 메산이가 의심을 안 할 것이다. 교복을 입고 집을 나왔으니 메산이는 자신이 학교에 간 줄로 알고 있을 터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재겸은 이곳에서 나머지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재겸은 흡사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점 안을 돌아다녔다. 새 책 냄새와 가라앉은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점차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매대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책을 둘러볼 때였다. 재겸이 대뜸 발길을 세웠다. 책 겉면에 둘려 있는 띠지가 눈에 들어왔던 탓이다. 형광색으로 된 띠지에는 ‘중고등학생 필독 도서’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재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다.
읽어도 되나?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재겸은 그대로 서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띠지에 적힌 글귀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다. 대충 살펴봐선 유명한 작품인 듯했으나, 재겸에겐 낯설기만 했다. 꼼꼼히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재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페이지를 넘길 때였다.
“재밌어?”
“응.”
조용하게 날아든 질문에 재겸이 웅얼거리듯 대꾸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책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칫했다. 책을 내려다보고 있던 재겸이 번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
재겸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맞은편 자리에 윤태희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흰색 캡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는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윤태희가 맞았다.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다. 재겸이 읽고 있던 책과 같은 책이었다.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윤태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재겸에게 던진 질문은 윤태희 본인에게도 유효한 질문이었으나, 그 부분에 관해서 윤태희는 딱히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살짝 당황한 재겸과는 달리 윤태희는 평소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뭐냐, 너?”
평정심을 되찾은 재겸이 뒤로 살짝 물러섰다. 항상 셔츠 차림이던 윤태희는 검은색 칼라 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백팩까지 메고 있어서 언뜻 보면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였다.
“가방 놓고 갔길래 돌려주려고.”
윤태희는 마치 제 물건인 양,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재겸은 자신의 가방을 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가방이 없는 줄도 몰랐다. 어제 도서실에 그대로 두고 나왔던 모양이었다. 재겸은 새삼 정신을 빼놓고 다닌 스스로가 한심해지려고 했다.
“그래, 그럼 주고 꺼져.”
재겸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나 윤태희는 보란 듯이 못 들은 척을 했다. 본인 입으로 가방을 돌려주러 왔다고 해 놓고는 갑자기 책 읽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좋은 책 골랐네. 나도 이 책 좋아해.”
“가방 이리 주고, 꺼지라고.”
윤태희가 능청을 떨자, 재겸이 대번에 낯을 굳혔다. 경고하듯 낮게 내뱉은 목소리에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부딪쳤다. 안 통하네…. 윤태희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이상, <날개>)
윤태희가 던진 뜬금없는 말에 재겸이 눈을 치켜떴다. 문득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방금 전에 읽고 있던 책의 도입부였다. 저번처럼 윤태희는 책에 나오는 문장을 외웠다.
“첫 문장부터 대단한 명문이라고 생각해. 넌?”
윤태희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재겸을 향해 상체를 살짝 기울이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재겸이 보란 듯이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윤태희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사라졌다. 완전히 무표정해진 얼굴은 서늘하기만 했는데, 그 와중에 한쪽 뺨이 살짝 부어 있었다.
“근데, 나라면 유쾌할 것 같지는 않은데….”
잠시 말을 흐리던 윤태희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덧붙였다.
“박제가 된 기분은 어때? 재겸아."
재겸이 아주 천천히 눈을 들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모호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의미심장한 단어가 폐부를 깊이 찔러왔다. 마주 선 둘의 시선이 서로를 정확히 관통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윤태희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러면 나랑 얘기할 마음이 좀 생겼으려나.”
윤태희가 상체를 살짝 기울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믿고 따르던 스승에게 배신을 당해서 경계심이 강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밀어 내진 마.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잖아.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는데 말할 기회 정도는 줘야지.”
순간, 불쾌한 전율이 뒷골을 꿰뚫고 지나갔다. 재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