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8)화 (38/348)

#38

재겸은 저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풍경이 일시 정지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흑백처럼 아득해진 시야 속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윤태희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가려진 달의 뒷면에 대해서.’

‘꽁꽁 감춰진 뒷면엔 뭐가 숨어 있을까.’

그저 책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매가 허공을 선회하듯 변두리를 빙빙 돌던 의미심장한 말들은 정확히 역린을 겨냥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저를 향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재겸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이젠 서로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꼴같잖은 선생, 학생 행세도 끝났는데.”

윤태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재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다정과 친절을 벗어 던진 눈매는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윤태희는 이제 그 무엇으로도 가장하지 않았다.

“어제 봤던 귀신 둘, 기억 나? 내가 아끼는 영귀들인데 그중 한 녀석한텐 과거를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이름은 새로라고 하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소개해 줄게. 아무튼, 그래서 널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거든.”

소년은 허락도 없이 자신의 정체를 들춰 냈다. 보기 좋게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는 생각에 허탈했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자신이 소년의 정체를 들춰 낼 차례였다.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지난 며칠간, 새로는 그야말로 귀신 피 말리게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아직 멀었니?’

소년의 내력을 알아오라는 명령을 내린 뒤로 윤태희는 매일같이 새로를 도서실로 호출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해도 좋다고 말했던 게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째가 되던 날. 새로는 초췌한 몰골이 되어 윤태희 앞에 나타났다.

‘태희 님 말씀이 맞았슴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임까?’

새로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사를 쏟아 내자 윤태희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무얼 읽어 냈느냐고 묻자, 새로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말로 풀어냈다. 피의 양이 워낙 적었던지라 과거의 어느 짧은 순간을 스쳐 지나가듯 본 것이 전부였다.

‘옷차림과 배경을 보아하니 무척 오래전의 기억인 것 같았슴다. 피의 주인은 도포를 입고 있었고 웬 낡은 초가집에 앉아 있었슴다. 그리고 옆에는 스승처럼 보이는 사내와 함께 있었슴다.’

윤태희의 입술에 반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간의 짐작이 확신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의 말대로 윤태희의 추측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과거의 한 조각을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은 소년이 오래된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승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

윤태희가 웃음을 흘렸다. 늙은 소년이라니, 모순되는 표현이 현실에서 통하고 있었다. 윤태희는 자신이 속한 세계가 세간의 평범한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소년의 정체는 각별할 정도로 불가사의했고 신비로웠다.

‘그리고?’

윤태희가 비스듬히 다리를 꼬았다.

‘사내는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아 보였슴다. 근데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한 것이, 그 남자가 피의 주인을 제자라고 불렀슴다. 근데 스승이라면 뭔가 좀 말이 안 되는 게….’

눈을 굴리며 과거의 단면을 되짚어 보던 새로가 말을 흐렸다.

‘스승이 제자를 해할 리는 없지 않겠슴까.’

이어진 새로의 말에 윤태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남자가 아이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었슴다.’

‘…뭐?’

칼을 찔러 넣었다고? 윤태희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서?’

‘하필 장면이 거기서 끊겨 버려서 그다음은 보지 못했슴다.’

새로가 긁적이며 아쉽다는 듯이 대꾸했다. 피가 조금만 더 많았어도 지금보다 훨씬 오래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작 그만큼 가지고 이 정도까지 읽어 낸 게 용한 셈이었다.

‘…제자에게 칼을 꽂는 스승이라.’

윤태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원하는 베일을 한 꺼풀 벗겨냈음에도 여전히 소년이 궁금했다.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순간, 피를 잔뜩 쏟게 만들어 내력 전부를 파헤쳐 볼까 진지한 고민이 들었다.

아니, 그럴 순 없지. 가치가 있는 물건은 귀하게 다뤄 주는 것이 맞다. 어차피 곁에 두게 된다면 자연스레 알 터였다. 당분간은 내색 없이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성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공들였던 모래성은 무너졌고 판은 허무하게 뒤집어졌다. 윤태희는 시간 싸움에서 미련 없이 물러나기로 했다. 더 이상 잘 보일 이유도, 주변을 맴돌 이유도 없었다. 이제는 손에 쥔 것을 아낌없이 흔들어 줄 때였다.

윤태희는 새로를 통해 전해 들은 과거를, 그 과거의 주인에게 간단히 되돌려 주었다. 자신의 과거 한 토막을, 타인의 입을 통해 회상하게 된 재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낡은 초가집과 제자를 칼로 찌른 스승.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멍하니 넋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배짱으로 낯짝을 들이밀었나 했더니….”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재겸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희가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했다. 음영 속에 숨어 있던 단정한 얼굴선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윤태희의 얼굴에 감탄 어린 기색이 묻어났다. 재겸의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귀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서점 안 사람들은 태평하기만 했다. 험악한 기운은 오직 윤태희만을 향하고 있었다. 살갗이 저밀 정도로 단단하고 노골적인 적의가 윤태희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멋대로 과거를 엿봐서 기분 나빴어? 싸우려고 한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 그냥 나는 네가 궁금했을 뿐이니까. 알고 있겠지만, 내가 너한테 관심이 좀 많거든.”

윤태희가 옅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

재겸의 입에서 시릴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세상에 너의 진짜 알맹이를 아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나는 널 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그리고 너도 날 알지.”

재겸은 형형한 눈으로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고요하던 기류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서점 안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던 클래식 선율이 어느덧 격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쾅쾅 두들겨 대는 무자비한 피아노 소리가 재겸의 귓가에 벼락처럼 꽂혀 들었다.

“나자가 되어 줬으면 해.”

정중하고도 무례한 대시였다.

“서로 숨길 것 없는 새끼들끼리 좀 편하게 지내보자는 얘기야.”

윤태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덧붙일 때였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이 경련했다. 피아노 선율에 희미하게 웅, 진동 소리가 깔렸다. 윤태희는 재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볼륨 키를 눌러 진동을 껐다.

“지금처럼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당연히 매달 돈도 나올 거고, 따로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줄게. 직급상으로는 내 부하가 되겠지만 동등하게 대우해 주겠다고 약속할게. 어때? 이 정도면 손해 볼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윤태희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재겸을 응시했다. 잠잠해졌던 휴대폰에서 또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윤태희는 전화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봐, 권태롭고 불우한 인생에 적당한 소일거리 하나쯤은 있어야지.”

재겸은 마침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가면을 집어 던지고 본색을 드러낸 윤태희는 말 그대로 반듯한 무뢰한에 가까웠다. 아쉬운 쪽은 본인이면서 지나치게 오만한 말투였다.

박제. 배신. 권태. 불우. 윤태희가 뱉어 내는 단어는 하나같이 불쾌한 추락감을 선사했다. 재겸은 윤태희의 목에 겨누고 있던 귀기를 거둬 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가볍게 훑어보는가 싶더니,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귀기가 사방으로 둥글게 폭발했다.

“꺄아악!”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점 전면에 설치되어 있던 유리창이 와장창 소리와 함께 한순간에 깨졌기 때문이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전등 역시 모조리 파열되어 유리 파편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폭풍이 몰아치듯 서점 안팎으로 유리 조각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모두가 혼비백산하는 와중에 멀쩡히 자리에서 서 있는 것은 재겸과 윤태희, 단 둘뿐이었다. 날카로운 조각이 윤태희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길쭉한 생채기에서 피가 배어났다.

“…….”

윤태희가 잠시 말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귀기로 물리력까지 행사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손등으로 볼을 훔쳐 내던 윤태희가 헛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이 와중에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윤태희는 진동을 무시하며 손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았다. 또 피 났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화끈하시네.”

윤태희의 얼굴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재겸은 무심한 낯으로 정수리에 내려앉은 유리 조각을 툴툴 털어 냈다. 평화롭던 서점은 어느새 난장판이 되었다. 보는 눈이 많아 직접 손을 댈 수 없다면, 직접 손을 대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봐주니까 정도를 모르고 기어오르지.”

그렇게 말하는 재겸의 눈에서 희미한 경멸이 묻어났다.

“거창한 비밀이라도 알아낸 것 같아서 기분 째지냐?”

윤태희는 무례하게 문을 부수고 허락 없이 재겸을 침범했다. 그렇게 갈취당한 과거는 현재의 인질이 되어 윤태희의 발밑에 깔려 있었다. 재겸은 이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동요했고, 허를 찔린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 맞아. 근데 씨발, 그게 뭐 어쨌다고.”

재겸은 윤태희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고 있든 난 관심 없어. 그걸 빌미로 삼으면 내가 벌벌 떨면서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줄 알았나 본데….”

나자가 되어 달라. 결국은 이 얘기가 하고 싶어서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자가 될 일은 없어.”

“왜?”

윤태희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자란 족속은 태생부터 더러운 협잡꾼 새끼들이니까.”

윤태희는 오로지 나만이 너를 알고 있노라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재겸은 그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헛웃음이 삐져나오려고 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네가 정말 나를 안다면 나자가 되어 달라는 소리를 지껄일 리가 없다.

“…나자를 잘 아나 봐?”

윤태희가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잘 알지.”

재겸이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스승이 나자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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