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내와 연관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한때 사내는 재겸의 세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버렸다. 그 긴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것이 변했다. 지금의 재겸은, 사내를 떠오르게 만드는 모든 흔적이 싫었다.
“아니, 내가 보기엔 똑같아.”
잊을 수 없다면 외면하고자 했다. 하지만 눈앞에 선 남자는 자꾸만 저를 들쑤셔 놓는다. 윤태희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돌이켜 보게 만들었다. 윤태희는 사내와 같은 나자였으며, 사내가 그랬듯이 정체를 숨기고 자신에게 접근했다. 마찬가지로 저를 이용하기 위해서.
“예나 지금이나 나자란 족속들은 변함이 없어. 너넨 뒤에서 음험한 수작질이나 일삼는 쓰레기들이야. 그런 주제에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잡귀만도 못한 인간이 너네야.”
자신을 겨냥하는 신랄한 비난을 듣고도 윤태희는 딱히 불쾌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태생부터 더러운 협잡꾼에, 음험한 수작질이나 일삼는 쓰레기라….”
사내는 재겸의 삶을 망가트린 원흉이었다. 재겸에게 있어 나자가 된다는 것은, 원수와 같은 곳에 적(籍)을 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나더러 나자가 되라고? 재겸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게까지 나자를 싫어하는 줄은 몰랐어.”
그때, 턱을 매만지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나자가 싫다면, 네 말대로 죽었다 깨어나도 나자가 될 일은 없을 것 같긴 하네. 어쩌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어서 정말 유감이야.”
윤태희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말했다.
“네 뜻은 잘 알겠어. 억지로 강요하고 싶진 않아. 너 말고도 귀재는 많으니까.”
재겸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윤태희는 순순히 물러섰다. 윤태희가 모자를 꾹꾹 눌러쓰며 중얼거렸다.
“물론, 누가 됐든 너처럼 마음에 들진 않을 테지만. 내가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은데. 아쉽고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수밖엔….”
윤태희가 미소를 지었다. 미소와 함께 한쪽 뺨에만 생겨난 선명한 볼우물을, 재겸이 말없이 노려보았다. 정중하게 물러서는 태도였지만 어쩐지 불순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그래서 말인데, 조영우는 어때?”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정말이지 난데없는 이름이었다. 윤태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재겸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무표정하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그러자 윤태희도 따라서 웃었다. 누가 보면 서로 농담이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보였다.
“야.”
말없이 피식거리던 재겸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나 협박하냐?”
“그럴 리가.”
윤태희가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같은 반이니까 잘 알지? 꽤 그럴듯한 친구 행세….”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재겸이 바람처럼 튀어 나갔다. 둘 사이를 가로지르던 매대는 어느덧 멀찍이 내던져졌다. 어딜 봐도 던질 수 있는 무게는 아니었으나 꼭 집어 던져진 모양새였다. 쿵, 소리와 함께 날아가듯 밀려난 매대는 이미 난장판이 된 서점을 또 한 번 어지럽혔다. 근처에 남아 있던 몇몇의 사람들에게서 부산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윽….”
성가신 방해물을 집어치우자마자 재겸은 윤태희를 냅다 발로 걷어찼다. 등에 가방을 메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윤태희가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반듯하게 쓰고 있던 모자는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뒤였다. 발에 차여 구석에 처박혀 있던 윤태희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한발 빠르게 몸이 저절로 일으켜졌다.
“어제 그냥 반 죽여 놨어야 했는데.”
중얼거리던 재겸은 윤태희의 멱살을 움켜쥐고 흡사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그렇게 둘은 마주 섰다. 벽 쪽에 내몰려 있던 윤태희가 작게 기침을 했다. 머리는 잔뜩 흐트러졌고, 입고 있던 검은색 칼라 티는 한껏 손아귀에 끌려 올라간 상태였다. 상의 안쪽에서 탄탄한 배가 한 뼘쯤 드러나 보였다.
“아파….”
살갗에 부딪쳐 오는 귀기가 무시무시했다.
“다시 말해 봐.”
우악스레 잡힌 멱살은 풀릴 줄을 몰랐다. 앳된 소년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살벌했다. 걷어차인 가슴팍이 아픈 건 둘째 치고, 이대로 내버려 두면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사람들이 보잖아.”
서점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게 바깥에서 깨진 유리창 주변을 서성이던 행인들도 전부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서서히 소란스러워지려고 했다. 주변을 힐끗, 곁눈질하던 재겸이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알 바 아냐.”
아까부터 윤태희는 범인의 이목을 인질로 삼아 제멋대로 굴었다. 생각해 보니 조심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다. 이런 상황을 만들기 싫으면 입을 그따위로 놀리면 안 됐다. 어차피 이곳이야 떠나면 그만이다. 더 이상 윤태희가 이끄는 대로 장단을 맞출 생각은 없었다.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조영우가 그렇게 걱정돼?”
“그래, 죽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기어올라.”
멱살을 잡은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재겸이 싸늘한 눈을 치켜떴다.
“같잖은 협박도 사람을 봐 가면서 해야지.”
“협박이라니, 그런 거 아닌데.”
“그럼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거리야.”
윤태희는 제 멱살을 움켜쥔 재겸의 손목을 강한 힘으로 붙잡았다.
“나는 내 후임이 될 귀재를 찾기 위해 이 학교에 왔어. 그리고 너는 나자가 되지 않겠다고 했고. 이 학교엔 너 말고도 두 명의 귀재가 더 있어. 그중 하나는 조영우고. 네가 나자를 싫어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평범한 귀재들이라면 오히려 나자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거든.”
윤태희는 재겸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조영우한테 나자가 되어달라고 권유할지 안 할지는 내 자유고, 조영우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도 본인의 자유야. 어딜 봐도 네가 상관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그 친구도 귀재니까 나로선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자, 여기까지. 뭐 문제 있어?”
“웃기지 마. 그게 협박이 아니면 뭔데?”
윤태희의 말은 확실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일견 납득이 가면서도 동시에 재겸에게 이상한 압박감을 심어 주는 말이었다. 이게 윤태희의 의도일 것이었다. 이 학교에 재겸이 나름 정을 붙이고 있는 사람은 조영우가 유일하다는 것을, 과거까지 파헤친 윤태희가 모를 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윤태희는 재겸이 나자에게 품은 악감정을 알고 있다. 그런데 굳이 이 상황에서 조영우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저의란 정말이지 분명한 것이었다.
“아니, 이건 협박이 아니야. 협박이 뭔지 잘 모르는구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던 윤태희가 문득, 알 수 없는 오묘한 낯을 했다. 자신의 멱살을 틀어쥔 손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재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신상 받아 보니 출생 신고부터 완벽하게 되어 있던데. 어떻게 한 거야?”
“…뭐?
화제를 벗어나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재겸이 설핏 눈가를 일그러트릴 때였다. 누가 들을세라, 윤태희는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서류에 기재된 가족 관계는 당연히 가짜일 테고, 그럼 그 연예인이라던 삼촌이랑은 무슨 사이지? 이름이 아마, 정주라고 했던가….”
“…….”
재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나도 가끔 일 때문에 신분 위장하고 그러긴 하는데…. 그래도 나름의 절차가 있거든. 아무리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라고 해도 공문서를 위조하고 개인 인적 사항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곤란해. 학교까지 와서 보호자 노릇을 해 줄 정도면 그 사람이 네 뒤를 봐주고 있는 모양인데, 그 사람도 귀재야?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
윤태희는 고개를 기울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
“아무튼, 좀 조심하라고 전해 줘.”
“…….”
다정한 안부로 말을 마친 윤태희가 입꼬리를 반듯하게 올렸다. 재겸의 숨결이 점차 거칠어지더니, 멱살을 틀어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등 위로 뼈가 불거져 나올 지경이었다. 재겸의 얼굴은 어느덧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너.”
조영우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타격감이, 재겸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쳤다. 윤태희는 나만이 너를 안다고 했었다. 그 말이 진정으로 무얼 의미하는지, 재겸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왜, 왜 생각을 못 했지. 그래, 뭔가 이상했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다. 문득, 아주 오래전 사내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무자비하고 잔혹하지.’
‘나자를 만나거든 그때는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
누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것만 같았다. 그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다. 사내가 나자였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니 그렇게 바보처럼 당하고 만 것이다. 모든 건 사내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자인 윤태희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던 이유는 더 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윤태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진정으로 거기서 더 잃을 것이 없느냐고 묻고 있었다.
재겸의 눈동자가 황망하게 흔들렸다. 말없이 재겸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마침내 손에 힘을 줬다. 아까 손목을 틀어쥐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강한 힘이었다. 멱살을 틀어쥐고 있던 손이 어렵지 않게 떨어져 나갔다. 멍하니 서 있던 재겸이 뒤늦게 이를 악물었다.
퍽-!
재겸은 어제처럼 윤태희에게 주먹을 날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윤태희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하지만 어제와 같은 충격은 없었다. 주먹에 귀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귀기를 싣지 못한 건지, 싣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맨주먹이기는 해도 제법 아릿하긴 했다.
“전부터 느낀 건데… 손이 많이 험하시네.”
작게 중얼거리며, 윤태희가 살짝 부어오른 뺨을 쓸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 너,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쥐어짜듯 내뱉은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재겸이 윤태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집채만 한 파도처럼 분노가 몰아닥쳤다.
“이런 걸 협박이라고 해, 재겸아. 알겠어?”
확실히, 다르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