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고작 말 한마디만으로 상대방을 무력하게 만드는 게 바로 협박이야. 보통은 태생부터 더러운 협잡꾼에, 음험한 수작질을 일삼는 쓰레기라면 흔히들 애용하는 수법 중 하나고.”
그렇게 말하는 윤태희의 목소리는 아찔할 정도로 상냥했다. 실로 그러했다. 친절하게 덧붙이는 설명에 재겸의 뺨이 경련했다. 재겸이 이를 악물었다.
“건드리지 마.”
윤태희가 재겸의 넥타이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재겸의 어지러운 시야로 그림처럼 반듯한 이목구비가 한층 가깝게 들어찼다. 샌님처럼 곧고 단정한 윤태희의 손에 둘 사이의 거리가 속수무책으로 좁아졌다. 향수의 잔향이 코끝에서 불쾌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나는 협잡꾼이거나 쓰레기일지도 몰라. 뭐, 어쩌면 그보다 더한 씨발 새끼일지도 모르지. 네가 날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 뭐가 됐든 네가 보는 그 모습이 맞을 거야. 네가 나를 협잡꾼으로 본다면 나는 협잡꾼이 될 거고, 쓰레기로 본다면 쓰레기가 될 거니까.”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마음만 같아선 당장 이 손을 부러뜨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짜 협박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 손을 부러뜨린다면 이 손은 정주가 이룩해 낸 삶을 망칠 것이다. 정주의 뒤를 캐고, 정주의 앞길을 막고, 그걸 빌미로 삼아 정주가 쌓아 온 것들을 망가트릴 것이다.
“나는 네가 말하는 대로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될 생각이야.”
넥타이를 허락 없이 움켜쥐었던 무례한 손은 그대로 재겸의 목덜미를 향해 다가왔다. 아주 잠깐 사이에 쇄골 부근에 온기가 닿았다가 사라졌다. 길고 곧은 손가락은 재겸의 비뚤어진 칼라를 반듯하게 정리해 준 뒤, 미련 없이 멀어졌다.
“어때? 내가 아직도 협잡꾼에 쓰레기로 보여?”
윤태희가 물었다. 재겸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에 걸맞은 ‘협박’이라는 수법을 써서 재겸을 옭아맬 것이고,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나자에 대한 입장을 번복하는 셈이니 전처럼 윤태희를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할 것이었다.
교묘하고 친절한 외통수였다.
***
이영신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목욕재계를 했다. 귀한 산삼 동자를 맞이해야 하니 응당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산삼 동자에 관한 조사는 일찍이 끝마친 상태였다. 여러 플랜을 세워 놓고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고, 바로 오늘이 결전의 날이었다.
이른 아침, 차를 몰고 이층집에 도착한 이영신은 심호흡을 했다. 골반에 두른 힙색 안에는 필요한 제구를 몇 가지 골라 미리 넣어 둔 참이었다. 힙색을 단단히 조여 매고 대문 앞에 선 이영신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희끄무레한 안개와도 같은 것이 집 전체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황색 페인트로 칠한 대문에선 유난히 서늘하고 무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결계가 쳐져 있다.
그래서였군. 이영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매만졌다. 최종 위치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 이후에도 몇 차례나 멧새에게 집 내부의 동태를 살피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하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어째서인지 멧새는 담장 가까이로는 접근하지 못했고, 날려 보낸 족족 하루 종일 집 주변만 빙빙 돌았다고 했다. 이유가 뭔가 했더니 결계 때문이었다.
이영신은 힙색의 지퍼를 열어 장갑 한 장을 꺼냈다. 손에 장갑을 끼고 대문을 더듬거리자 안개와도 같던 무형의 결계가 손에 만져졌다. 결계의 질감을 느끼던 이영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딱할 줄 알았는데 물컹하다. 물렁하다는 건 결계를 겹겹이 쳐 놨다는 증거였다.
보통은 결계의 벽이 돌처럼 딱딱하기 마련이었다. 설계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강도가 높아서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단점은 일정 이상의 힘을 받으면 쉽게 깨진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물렁한 결계가 훨씬 파훼하기 어렵다. 쉽게 비교하자면 이건 말랑한 젤리였다. 딱딱한 비스켓은 힘만 주면 쉽게 부술 수 있지만 젤리는 그럴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만약 딱딱한 보통의 결계인 줄 알고 그대로 귀기를 써 파훼하려고 했다간, 이 물렁한 결계는 그 귀기를 흡수할 것이며 그 귀기를 그대로 반동하여 침입자는 그만큼의 데미지를 돌려받았을 것이다. 장갑을 낀 손으로 결계를 미리 파악한 것이 백번 잘한 일이었다.
이영신이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과연. 산삼 동자가 쳐 놓은 결계인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귀한 힘을 가진 몸이니 호락호락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산삼 동자라면 능히 이렇게 치밀하고 꼼꼼한 결계를 칠 법도 했다.
장갑이 없었다면 결계에 직접 손도 댈 수 없었을 것이다. 장갑을 낀 팔을 결계 안쪽으로 휘적거려 보았다. 팔을 끝까지 집어넣었는데도 대문이 손에 닿질 않는다. 눈으로만 보면 코앞에 대문이 있건만 실로 훌륭한 솜씨였다. 결계를 치는 건 정화부가 전문인데, 정화부에서도 이런 결계를 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렇게 나와 주셔야지.”
이영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힙색의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도구를 써야 하고!”
자문자답하던 이영신이 방정맞게 어깨춤을 추며 신나게 힙색 안을 뒤적거렸다. 귀기를 무력화할 때 쓸 밧줄이며, 움직임을 봉쇄할 부적 등 여러 종류의 제구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이영신은 그중에서 동그란 건전지 하나를 꺼냈다.
“바깥에서 귀기를 쓰면 그대로 돌려받는다, 이거지?”
비록 생긴 건 평범한 건전지였으나 안에는 전해 물질이 아니라 이영신의 귀기가 응축되어 있다. 나례청 안에서는 이것을 은륜지(隱淪池)라고 불렀다. 이영신은 장갑을 낀 손에 은륜지를 옮겨 쥐었다. 아까처럼 물렁한 결계의 벽 안쪽으로 손을 넣고 은륜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럼 안쪽에서 귀기를 쓰면 어찌 되려나.”
제구부 수석은 발상의 전환이 뛰어났다. 결계에 은륜지를 심은 이영신이 캬캬, 웃으며 손을 뺐다. 장갑을 벗어 힙색 안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빼꼼 기울여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이영신이 합장을 하듯 손뼉을 짝, 마주 쳤다.
“무술(戊戌) 오월기미삭(五月己未朔) 초칠일경오(初七日庚午).”
한순간에 이영신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영신이 은륜(隱淪)(물건이 가라앉아 보이지 아니하다.)의 시한을 종료합니다.”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안쪽에 심어 놨던 은륜지가 부서졌다. 퍼엉, 응축된 귀기가 강하게 터지며 결계가 일순 거세게 흔들렸다. 옳지. 이영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접었다.
삼. 이. 일. 세 번째 손가락이 접히는 순간,
퍼엉!
결계는 흡수한 귀기를 다시 한번 토해 냈다.
“와우. 브라보….”
이영신이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쳐 댔다. 약간의 시간 차, 도합 두 번의, 내부에서 일어난 충격으로 결계가 찢어졌다. 바깥에 서 있던 이영신은 아주 안전했다. 은륜지가 만들어 낸 커다란 구멍은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엔 충분한 크기였다. 이영신은 주황색 대문을 열고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크, 넓다! 넓어!”
힙색 지퍼를 닫으며 마당을 휘휘 둘러볼 때였다.
“어어! 나리, 오셨습니까?!”
이영신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마당 뒤편에서 어렴풋한 인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얼핏 듣기에도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다다다, 뛰는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진다 싶더니 이층집 모퉁이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튀어나왔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멀뚱히 서 있던 이영신이 고개를 내려 아이를 쳐다보았다.
“어….”
“아….”
허리춤에서 눈이 마주쳤다.
“…….”
“…….”
한차례 정적이 흘렀다. 아이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이영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영신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굳어 있던 아이가 흠칫, 물러섰다. 이영신이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갔다. 아이는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동자님.”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누, 누, 누, 누구셰요?!”
이영신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뒤늦게, 지금 이 순간에서야 기억이 났다. 깨닫자마자 엄청난 위기감이 엄습했다. 동자님은 너무도 작았다. 산삼 동자는 어린아이의 외형이니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작아도 너무 작았다. 손도, 발도, 머리통도….
이영신이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힘겹게 대답했다.
“저는, 이영신이라고 하는데요….”
“아. 어어, 그. 그. 그런데요?”
돌아온 대답에, 이영신이 입을 틀어막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저는 이영신인데, 네. 제가 이영신인데요.”
이영신과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메산이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횡설수설하던 이영신이 고개를 숙인 채 비틀비틀 다가오기 시작했다.
“동자님, 진짜 죄송한데….”
뭐지, 이 사람! 겁에 질린 아이가 부랴부랴 뒷걸음질을 칠 때였다. 이영신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아하니 뭔가에 충격을 먹은 듯했다. 아이가 몹시 당황하며 숨을 들이켰다. 씩씩거리던 이영신이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메산이에게 달려들었다.
“한 번만 안아 봅시다!”
이영신은 아이를 끔찍이 예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