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서울이요?”
똘망똘망하던 눈에 미심쩍은 기색이 묻어나자, 되는대로 말을 뱉어 버린 이영신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이영신이 짐짓 태연하게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네, 서울에 계십니다.”
메산이가 말없이 등을 돌렸다. 이영신은 순간 손을 뻗어 그대로 메산이를 붙잡을 뻔했다. 이대로 놓치면 큰일이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산삼 동자는 천성이 순진하고 타인을 해칠 줄 모르며 거짓에 서툰 탓에 인간의 꾐에 손쉽게 넘어간다. 관련된 설화도 많았다. 그래서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차에 태울 생각이었건만, 아무래도 너무 허술하게 뻥구라를 친 모양이다.
“서울?”
이상하다. 나리는 아침에 학교를 가셨는데? 메산이는 생각에 잠긴 낯으로 ‘서울’을 곱씹고 있었다. 알쏭달쏭한 메산이의 표정을 지켜보던 이영신은 제법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외형이 어린아이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나. 역시 의심하는 것 같다. 아씨. 그냥 밧줄로 묶어서 데려갈까. 귀여워서 조심조심 데려가고 싶은데…. 이영신이 심각하게 고민하며 머리를 싸맸다.
“서울….”
이영신이 안절부절 못하며 힙색의 지퍼를 열려던 순간이었다.
“아하! 서울이라면, 정주 님이 계신 곳이네요?!”
아씨 놀라라, 이영신이 화들짝 놀라 손을 뒤로 감췄다. 어쩐지 동자님의 안색이 환해져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기도 했다. 동자님의 깜찍한 미소에 이영신은 그 와중에 또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메산이가 기쁜 어조로 물었다.
“나리께서는 정주 님을 만나러 가신 거죠?”
“크흠, 예?”
“혹시 정주 님과 화해를 하러 가신 건가요?”
정주 님은 또 누구람. 이영신이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거지요? 그렇지요?”
“어… 아, 그, 네. 그렇죠!”
뭔진 모르겠지만 동자님은 손뼉을 치며 아주 좋아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서울에 정주 님과 함께 계신 거군요!”
메산이가 폴짝폴짝 뛰며 얼굴에 남은 물기를 슥슥 닦아 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선 장정이 무섭고 두렵기만 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물론 낯선 인간이라 약간 겁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저의 나리가 심부름을 보낸 인간이니 믿을 만한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에게 언질 하나 없이 학교에 가는 척을 했던 것은, 그간 자신이 마음고생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래켜 줄 심산에서 그런 것일 터였다.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직접 서울로 가서 화해할 생각을 하시다니…!
메산이가 퉁퉁 부은 눈으로 방긋 웃었다.
“영신 님. 어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
“…예, 예?”
“나리께서 절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영, 영신 님? 감격한 이영신은 눈물이 핑 돌았다.
***
이영신은 메산이를 조수석에 태운 뒤, 안전벨트를 단단하게 채워 주었다. 차체를 돌아 운전석에 앉자마자 요상한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새삼 꿈결 같았다. 토깽이 같은 자식을 옆에 태우고 드라이브하는 것이 이영신의 로망이었더랬다. 근데 토깽이가 아니고 산삼 동자를 태울 줄이야.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한 것치고는 꽤나 수월하게 데려올 수 있었다. 동자님을 차에 태운 이 순간, 모든 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이대로 액셀만 밟으면 된다.
“동자님.”
“네?”
“노래 좋아하세요?”
“노, 노래요?”
차에 시동을 걸던 이영신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쁘게 따라나서긴 했지만 막상 차에 오르고 나니 동자님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로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동자님의 기분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솔직히 말하면 점수를 따고 싶다는 사심이 좀 생기던 참이었다. 철딱서니 없는 어른은 어린아이의 관심을 필요로 했다.
“에헴.”
이영신은 헛기침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심각한 얼굴로 음악 스트리밍 어플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차에 연결된 스피커에서 웅장한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불안한 시선으로 창밖을 힐끔거리던 메산이가 고개를 들었다.
뽀뇨 뽀뇨 뽀뇨 아기 물고기-
“저 푸른 바다에서 찾아왔어요. 뽀뇨 뽀뇨 뽀뇨, 오동통통….”
다음 소절을 이어 부르던 이영신과 메산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
“…….”
메산이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이게 무슨, 노래인가요?”
“벼락 맞은 뽀뇨라고….”
“아….”
별론가.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이영신이 시무룩한 얼굴로 액셀을 밟았다. 하긴 겉모습만 어린애지, 나보다 오래 살았을 텐데. 취향을 너무 우습게 봤나 보다. 환심을 사는 데 실패한 이영신은 쓸쓸히 노랫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회심의 일격은 정확히 23번째 재생이 되던 순간부터 먹혀들었다. 톨게이트를 지날 무렵이었다.
“뽀뇨가 너무 좋아요.”
“새빨간 모습에.”
“뽀뇨 뽀뇨 뽀뇨.”
주거니 받거니 열창하는 둘을 태우고, 자동차는 한껏 속력을 높였다.
정오를 지난 시각. 목적지는 나례청이었다.
***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이후로 한 시간이 흘렀다.
“아, 흑. 미치겠네, 진짜.”
이영신은 아주 힘겹게 운전 중이었다. 출발할 당시만 해도 신나게 뽀뇨를 열창하던 이영신은 어느 순간부터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젠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던 메산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영신이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 근육이 파들파들 경련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를 깍 깨물고 액셀을 밟던 이영신이 어느 순간 꽥, 소리를 질렀다.
“아악, 휴게소!”
난데없는 큰 소리에 놀랐는지, 동자님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미처 달래 줄 여유가 없었다. 휴게소 표지판을 보자마자 일단 핸들부터 틀었다. 이영신은 지금 화급을 요하는 긴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톨게이트를 통과하던 그 순간부터 아랫배에 신호가 왔던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일단은 쉬지 않고 가는 것이 맞았다.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다.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몇 번이나 휴게소를 지나쳤다. 일단 달렸다. 그렇게 이영신은 말 그대로 하늘이 노래진다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서울까지 가려면 지금까지 온 거리의 절반은 더 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중대한 사안이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은 저버릴 순 없었다. 황급히 차를 세운 이영신이 다급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 문을 열고 후다닥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어, 어, 어디 가세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메산이가 이영신의 옷을 잡아당겼다. 도로를 달리던 차가 난데없이 휴게소에 멈춰 선 데다, 이영신이 설명도 없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당황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영신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먹거렸다.
“동, 동자님, 제가 그, 헉, 화. 장실….”
“…예?”
“헉, 참을라고 했, 는데 지릴까 봐 그래. 서….”
“…….”
“밖, 으로 절대 나오면 안 돼, 요. 여기서 기다려….”
“…….”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메산이는 당황하고 말았다. 알아들은 내용이라곤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이영신은 그 말을 끝으로 차에서 뛰쳐나갔다. 아니, 뛰쳐나갔다가 금방 다시 돌아왔다. 후다닥 돌아온 이영신은 차체를 노크하듯 세 번 두들겼다.
“웅?”
조수석에 앉아 있던 메산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이영신이 힘겹게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이내 등을 돌리더니 번개처럼 화장실로 뛰어갔다.
메산이는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이영신의 뒷모습을 창 너머로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래도 금방 오시겠지? 잘 달리던 차가 멈춰 서자 메산이는 제법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이러다 늦게 도착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분께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실 텐데….
“아, 그렇지!”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던 메산이가 어느 순간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옷을 깊숙이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바지 속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만져졌다. 메산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바지춤에서 물건을 쑥 끄집어냈다.
“전화를 드리면 돼!”
메산이가 꺼내 든 것은 일전에 정주가 줬던 휴대폰이었다. 원래는 재겸의 눈을 피해 거실 서랍장에 숨겨 놨었다. 근데 어느 날인가 저의 나리에게 들킬 뻔했던 적이 있어서, 그때부턴 그냥 몸에 지니고 다니던 참이었다. 깜빡 잊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
정주 님께 금방 가겠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려야지! 메산이가 서툰 손길로 꺼진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는 정주가 알려 준 대로, 더듬더듬 몇 개의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자 신호음이 들렸다. 설레는 마음에 다리를 동동 굴릴 때였다.
- 어, 메산아?
익숙한 목소리에 메산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주 님!”
- 그래, 무슨 일이야?
“어어, 지금 잠깐 멈췄는데 금방 갈 거예요!”
휴대폰 너머에서 정주가 말했다.
- 응? 뭐가 멈췄다고?
“자동차요, 영신 님의 차가 잠깐 멈췄어요.”
- 뭐? 누구?
“영신 님이요, 어어, 절 데리러 오신 분이요!”
메산이가 휴대폰에 대고 열심히 대답했다.
“지금 서울로 가고 있어요!”
그리고는 해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덧붙였다.
- …….
갑자기 휴대폰이 잠잠해졌다. 방금 전까지 목소리가 잘 들렸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있던 메산이가 눈을 끔뻑거릴 때였다.
- 메산아.
“네에.”
메산이가 착하게 대답했다.
- 너 지금 어디에 있어?
“저는 지금 영신 님 차 안에 있어요.”
메산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휴대폰 너머에서 우당탕, 하고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괜찮으세요? 배우님! 어디 가세요? 하는, 처음 들어 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정주 님?”
- 메산아. 그, 그 사람, 지금 옆에 있어?
메산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상시와 다름없던 정주의 음성이 웬일인지 다급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요! 잠깐 어딜 가셨어요. 근데 정주 님. 목소리가 왜…,”
- 차, 차 문 열어 봐!
“…네?”
- 차 문 열고 밖에 나가봐, 얼른!
갑자기 왜 이러시지? 메산이는 일단 정주가 하라는 대로 했다. 문손잡이를 잡고 바깥쪽으로 밀어보았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주 님, 문이 안 열려요.”
- 문이 왜 안 열려. 잠, 잠겨 있을지도 몰라. 메산아, 저번에 내 차 타 봤지? 문 안 열릴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문, 문손잡이 그쪽에, 어? 알려 줬었잖아. 그거 풀고….
정주의 말대로 메산이는 잠금 버튼을 풀고 문을 열었던 일을 금세 기억해 냈다. 다행히 지금 타고 있는 차는 정주의 차와 생김새가 비슷했다. 기억을 되살려 손잡이 근처를 만지작거리던 메산이의 낯이, 어느 순간 이상해졌다.
- 메산아, 잠겨 있는 거 풀었어?
“정, 정주 님….”
메산이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문, 안 잠겨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