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아, 미친 이 나이에 똥 지릴 뻔했네.”
이영신이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며 휘유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당당히 화장실을 빠져나온 이영신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뒤늦게 휴게소 음식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비웠으면 응당 채우는 게 도리였다.
“우리 동자님은 뭘 좋아하시려나.”
이영신은 귀에 익어버린 뽀뇨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휴게소 스낵 코너 근처를 서성거렸다. 이왕 휴게소에 들른 김에 간단히 요깃거리라도 사 갈 생각이었다. 다양한 메뉴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이영신은 버터 바른 알감자와 핫바 두 개를 사 들고 차로 돌아왔다.
차창 안쪽으로 동자님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잠이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신은 별생각 없이 운전석 문손잡이를 잡아당기려다가 아차차, 중얼거리고는 차체에 그대로 손바닥을 붙였다. 그러자 문이 쉽게 열렸다.
“동자님, 저 왔습니당. 기다리셨죠?”
이영신이 운전석에 앉으며 음식이 담긴 포장지를 흔들었다. 밀폐된 차 안으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가득 찼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동자님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버터 바른 알감자를 뒤적거리던 이영신이 제일 실해 보이는 녀석을 일회용 포크에 꽂아 메산이에게 건넸다.
“짜잔, 휴게소에 왔으면 무조건 이 알감즈아…. 도, 동자님! 왜 그래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보자마자 이영신은 몹시 당황하여 하마터면 알감자를 떨어트릴 뻔했다. 부랴부랴 알감자를 내려놓았다. 곧바로 동자님의 눈물을 닦아 주려는데 동자님은 손길을 피하며 고개를 훽, 돌렸다. 이영신이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동자님, 왜 우세요? 네? 무슨 일이에요?”
“흐흑….”
“혼자 계시느라고 무서워서 그래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메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씀해 보세요, 네?”
“그, 그냥,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니 신, 신경 쓰지 마세요. 흑.”
이영신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몸이 안 좋다고요? 어디가 아프세요?”
“그냥, 머, 머리가 아프고 어, 어지러워서요.”
“머리가요? 갑자기 머리가 왜,”
“산….”
메산이가 훌쩍이며 조그맣게 대꾸했다.
“산에서 멀어져서 그런가 봐요….”
“산이요?”
이영신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저는, 산을 오랫동안 떠나 있으면 힘이 약해져요….”
메산이의 말에, 어느 순간 이영신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이영신 또한 조사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산을 떠나온 지 고작 한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메산이가 힘없이 말했다.
“그리고 산의 정기가 바닥나면 전, 죽고 말아요….”
죽기까지 한다고? 이영신이 흠칫 놀랐다. 그건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래서 미리미리 산의 정기를 받아서 비축해 놔야 해요, 근데 오, 오늘은 이렇게 먼 길을 나올 줄 몰라서, 미처 생각을, 그래서 평, 평소대로 정기를 모았는데 이, 이렇게 산에서 멀어져서….”
메산이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든지 눈을 가물가물 떴다. 이영신이 묘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을 때였다. 메산이가 아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지레 놀란 이영신이 큰 소리를 냈다.
“동자님, 괜찮으세요?”
메산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영, 신님…. 만약, 서, 서울에 계신 나리를 뵙기도 전에, 제 기력이 다해….”
가느다란 목소리도 너무도 연약하게 들렸다. 마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유언이라도 남기는 듯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영신은 덜컥 겁이 났다. 이영신은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메산이의 말을 도중에 끊어 먹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한 이영신은 침착한 손길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일단 가까운 산으로 가면 되는 거잖아요, 동자님.”
***
‘시간을 줄 테니, 차분히 생각해 봐.’
윤태희는 그 말을 끝으로, 난장판이 된 서점을 떠났다.
재겸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멀어져 가는 탄탄한 등을 지켜보았다. 마음만 같아선 도륙을 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서점이 뒤집어진 게 뭐 그리 구경거리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부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던 것이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무력감이 육중해서, 재겸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재겸은 실로 오랜만에 비참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내려갈 곳이 더 남아 있었다.
서점을 나온 재겸은 흡사 바람 빠진 풍선처럼 걸음을 옮겼다.
재겸은 정주의 삶을 지켜 주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평범한 유명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했다. 윤태희는 정주가 단순히 귀재인 줄로만 알고 있는 듯했다. 그건 다행이었다. 다만 그 자체로서도 불행이었다.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 정도는 되었다. 정주의 삶을 무너뜨리기에 적당한.
‘조심하라는 말은 진심이야. 그 바닥, 나자 밭이거든.’
‘유명인이 귀재라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들 거야.’
‘이래 봬도 내가 직급이 꽤 높아. 나라면 지켜 줄 수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윤태희가 정주를 지켜 줄 수 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윤태희의 말은 나례청 내부, 그러니까 안에서 손을 쓰겠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확실히 재겸의 능력 바깥에 있는 일이었다. 재겸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망가트리지 않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자신이 나자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내가 나자가 된다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재겸은 처음으로 멀미를 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버스에서 내린 재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걸었다. 메산이와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던 구멍가게를 지나자 포장도로가 뚝 끊겼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재겸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
재겸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산길 끄트머리로 익숙한 대문이 보였다. 그 순간, 기이한 감각이 재겸의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주황색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메산이는 산자락에 마실을 나갈 때면 담을 넘어 다닌다. 고로 저 문은 열려 있으면 안 되었다. 결계를 걸어 둔 문을 열 수 있는 건 결계를 쳐 놓은 자신, 그리고 정주뿐이다.
재겸의 걸음이 빨라졌다. 대문 가까이 이르러서는 거의 뛰었다. 마당에 뛰어 들어간 재겸이 황급히 마당을 둘러보았다. 마당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던 재겸은 당장에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설마, 하는 예감이 괴로웠다.
“메산아!”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집 안에 들어섰을 때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재겸이 뒷걸음질을 쳤다. 집 안 꼴이 엉망이었다. 무슨 도둑이라도 든 것 같았다. 모든 물건이 다 뒤집어져 있고 가구며 집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뭐, 야….”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이 집에. 초대한 적도 없는 누군가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거실로 들어선 재겸이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시선을 내리자 바닥에 남은 무수한 신발 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메산이의 신발 자국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넌 또, 맨발로 다닌 모양이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
“…….”
재겸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마치 묵념을 하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재겸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재겸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황망한 날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황망한 하루 중에 가장 차분한 순간이 될 것이었다.
나자, 스승, 원수, 배신, 협박, 윤태희, 정주….
더 이상 아무런 상념도 들지 않았다. 다 필요 없었다. 이젠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냥 정신이 맑았다. 모든 사고는 또렷해졌다. 거실 유리창에서 노을이 번져 들었다. 재겸이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딨어….”
귀기가 섬광처럼 번뜩이는 눈동자였다.
***
난장판이 된 서점을 빠져나와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윤태희는 눈썹 한쪽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액정 화면을 스크롤하는 손길에서 귀찮음이 묻어났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열렬하게 전화를 걸어 대는가 했다. 아주 가관이었다. 통화 목록이 한 명의 이름으로 빼곡했던 것이다. 이영신. 이영신. 이영신. 이영신….
3분에 한 번 꼴로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은 낯으로 액정을 응시할 때였다. 때마침 다시 진동이 울렸다. 멀뚱히 서 있던 윤태희가 순순히 휴대폰을 귓가로 갖다 대는 순간이었다.
- 야, 윤태희-!
전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뒷골이 울릴 정도로 날카로운 포효가 날아들었다. 윤태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휴대폰을 멀리 떨어트리더니, 무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신아, 나 고막 나가.”
이영신이 서럽게 울부짖었다.
- 너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바빴으니까.”
윤태희가 가볍게 대꾸했다.
- 너, 너 지금 어디야? 어?!
“나? 여기가 어디냐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허둥지둥 말을 붙이는 이영신에 비해 윤태희는 태연하기만 했다. 대수롭지 않은 낯으로 주변을 느리게 둘러보던 윤태희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길바닥.”
- …….
잠시 조용하던 이영신이 갑자기 허응, 흥, 어헝,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속사포처럼 뭐라 말을 하긴 하는데 횡설수설해서 내용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영신아, 천천히. 뭐라는지 나 못 알아들어.”
- 어흐흐, 으, 큰일 났어, 동자님이, 큰일 났다고호….
평소 허술한 면이 많은 이영신이지만 직급이 수석이니만큼 일할 때만큼은 프로였다. 며칠 전부터 이영신은 동자삼을 데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더랬다. 헌데 이렇게까지 평정심을 잃고 동요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 나, 나 좀 도와줘, 윤 수석. 여, 여기가 어디냐면….
“동자님이 큰일 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윤태희가 차분히 되물었다.
- 동자님이 움직이질 않는다고….
윤태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