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45)화 (45/348)

#45

한참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재겸은 살림살이가 난잡하게 굴러다니는 거실을 가로질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토록이나 목적이 선명하고 명확한 때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생활에 익숙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재겸은 2층 다락으로 올라갔다. 오랫동안 쓸모가 없었던 옛 물건들이 한데 모여 있는 자개함을 열었다. 낡고 바랜 물건들이 재겸의 손길에 뒤엉켰다.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아낸 재겸은 망설임 없이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 우두커니 선 재겸은 고요한 시선으로 손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구리로 만든 마패였다. 이게 얼마 만이더라. 손때가 묻고 여기저기 녹이 슨 마패는 지난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재겸은 발을 이용해 마당의 흙을 파헤쳤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마패를 그 자리에 묻고, 다시 흙으로 덮었다. 검지를 힘껏 깨물자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신기하게도 전혀 아프지가 않았다. 아플 겨를이 없었다.

재겸은 마패가 묻힌 위치에 대고 정확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가 허공에서 투둑 떨어졌다. 흙에 그대로 스며들자 색이 진해졌다.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재겸은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비마(飛馬)의 갈기는 방황을 멈추고 부름을 받으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땅 밑에서 우르릉, 천둥이 치는 듯한 괴이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발밑이 거세게 진동했다. 마패를 묻어 놓은 자리가 푹 꺼지는가 싶더니, 흙을 뚫고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히힝, 묵직한 말의 울음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아름다운 갈기가 눈앞에서 흩날렸다. 허공을 박차고 한차례 가볍게 뛰어오른 말이 늠름한 자태로 재겸의 앞에 멈췄다.

“오랜만이다.”

재겸이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비마는 꼬리를 좌우로 크게 펄럭이며 몇 차례 푸르르, 푸르르, 투레질을 해 댔다. 재겸은 말없이 투레질이 끝나길 기다렸다.

이윽고, 말이 사람의 말(言)을 하기 시작했다.

“호오라, 이게 누구신가!”

비마가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공자, 대체 이게 얼마 만이오?”

“기억 못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하도 기별이 없기에 나는 공자가 그토록 원하던 바를 이뤄 낸 줄로만 알았소. 허나 오늘 이렇게 다시금 마주하니, 딱하게도 공자께선 여직 명을 끊어 내지 못한 모양이오?”

재겸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뭐, 그렇게 됐어.”

“안됐소. 헌데 공자는 변함없이 옥안이로군.”

“너도 하나도 안 변했어. 똑같아.”

“도포는 어디 던져 두고 그런 희한한 옷을 입었소?”

옛날 복식 차림의 재겸이 익숙한 비마는, 교복을 입은 재겸이 신기하다는 듯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비마와는 과거, 사내를 통해서 맺은 연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고 만난 것이니 낯설 만도 했다. 재겸은 말없이 손을 뻗어 비마의 갈기를 만지작거렸다. 손에 묻은 피가 부드러운 갈기에 엉겼다.

“오랜만에 불러내자마자 이런 말 하긴 미안한데….”

비마가 실없이 발굽을 굴리며 투레질을 했다.

“공자가 날 찾는 연유는 늘상 한 가지뿐이잖소.”

“메산이가 사라졌어.”

“메산이라면, 공자의 꽁무니를 쫓던 그 동자삼 말이오?”

“그래, 맞아. 메산이를 찾아야 해. 데려다줘.”

“주인도 아닌 자에게 함부로 고삐를 내어 줄 순 없소.”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들었던 말이었다. 비마가 새초롬하게 고개를 돌렸다. 재겸은 비마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그 말인즉슨, 저의 주인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포기를 안 한 모양이다.

“매번 말하지만 난 네 주인이 될 생각이 없어.”

재겸은 언제나처럼 비마의 요청을 거절했고. 비마는 그런 재겸의 거절에 익숙했다. 고삐를 주지 않겠다고 뻗대는 것은 한때의 심술이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비마는 한 번도 재겸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대신에, 내 부탁을 들어주면….”

“또 저번과 같은 거래를 하려는 거요?”

“그래. 네가 꾸는 악몽. 내가 살게.”

비마는 날개 없이도 허공을 달릴 수 있는 귀마였다. 특별한 능력을 얻은 대신에 치명적인 결함을 짊어졌는데, 그건 바로 매일 밤 악몽을 꾸는 것이었다. 때문에 비마는 늘상 불면에 시달렸고 편히 잠을 자는 일이 드물었다. 해서 비마의 눈은 늘 섬뜩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해서, 비마는 주로 영귀를 비롯한 귀신들을 상대로 ‘꿈 장사’를 벌이곤 했다. 인간 중에서는 드물게 재겸도 그 고객 중 한 명이었다. 재겸은 비마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그 대가로 며칠간의 악몽을 샀다.

악몽을 판 비마는 그 시간 동안만큼은 악몽에서 벗어나 편한 잠을 잤는데, 어렵고 힘든 부탁일수록 악몽을 대신 꾸는 기간을 길게 제시했다. 재겸은 최대 한 달이 넘도록 비마를 대신해서 악몽을 꾼 적도 있었다.

“나야 거절할 이유는 없지. 괜찮겠소?”

“괜찮아. 네가 원하는 시간만큼 말해.”

“꽤나 절박한 모양이오. 정녕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오?”

“열흘이든,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상관없어.”

“됐소, 그냥 해 본 소리요.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으라고 하시오. 추적은 어렵지 않으니, 사흘 정도로 하겠소.”

재겸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나, 비마는 물렁한 흙에 뒷발을 툭툭 차며 난색을 표했다.

“그래. 고맙다.”

재겸은 현관으로 가서 신발장에 굴러다니는 메산이의 신발 한 짝을 주워 들었다. 한 손에 신발을 쥐고 마당으로 나오자, 비마는 다리를 한껏 굽혀 몸을 낮췄다. 재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마의 등 위로 훌쩍 올라탔다.

“여기, 기운을 찾아서 따라가면 돼.”

“알겠소, 맡겨만 주시오.”

비마가 마당을 맴돌며 몸을 풀었다.

“헌데, 감히 공자의 동자삼에 손을 댄 이가 대체 누구요?”

침묵하던 재겸이 낮게 중얼거렸다.

“몰라, 안 궁금해.”

비마가 폭소하듯 푸레질을 터트렸다.

“안 됐군, 그게 누구든지 말이오.”

비마가 땅을 힘껏 박차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

‘일단 가까운 산으로 가면 되는 거잖아요, 동자님.’

이영신은 곧바로 차를 몰아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기력이 약해진 동자님을 산으로 데려가 정기를 받게 할 생각에서였다. 되는대로 달리고 달릴 때였다. 도로 가드레일 쪽으로 경사진 비탈 하나가 보였다. 이영신은 곧바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동자님, 산이 좀 낮아 보이긴 하는데 여긴 어떠세요?’

다행히도 동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으로 좀 들어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

동자님이 기운 없이 말했다. 이영신이 곧바로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곳은 차가 쌩쌩 지나다니는 도로를 접한 얕은 기슭이었다. 응당 우거지고 무성한 산중으로 들어가야 산의 정기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이영신은 시름시름 앓는 동자님을 들쳐 업고 산을 탔다.

낮은 야산치고는 제법 산세가 험했다. 이영신은 새털처럼 가벼운 동자님을 업고 풀과 나뭇가지를 헤쳤다. 꽤 깊숙이 들어서자 우거진 나무들이 빙 둘러싼 평지가 나왔다. 주변엔 초목이 무성한 데다 인적이 남지 않아 기운이 제법 맑았다. 정기를 취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이영신은 동자님을 조심조심 내려 주었다. 그리고는 힙색에서 끈 하나를 꺼내 동자님의 손목에 팔찌처럼 끈을 동여맸다. 이렇게 하면 저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질 수 없게 된다. 만에 하나 동자님이 이곳에서 달아나거나 사라지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끈의 매듭을 꼼꼼히 묶은 뒤, 이영신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 혹시라도… 길 잃으실까 봐요.’

동자님은 시선을 내려 손목에 묶인 끈을 잠시 쳐다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들어 이영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표정이 오묘해서 이영신은 약간 긴장이 되었다. 방금 건 너무 부자연스러웠나. 다행히 동자님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더니 정자세로 반듯하게 섰다.

‘…여, 여기가 좋겠어요.’

동자님이 눈을 감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마치 명상에 잠긴 것 같았다. 이영신은 근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말로만 듣던 산삼 동자가 정기를 취하는 모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났다. 동자님은 완전히 풍경 속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어느덧 동자님을 둘러싼 모든 기척과 기운이 사라진 상태였다. 금방이면 될 줄 알았는데. 이영신이 동자님을 힐끔거렸다.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볼까. 동자님은 여전히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이영신이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목소리를 냈다.

‘…저, 동자님?’

하지만 동자님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작게 불러서 안 들리나? 잠시 망설이던 이영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동자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어, 지금은 좀 어떠세요?’

‘…….’

‘그, 저기, 동, 동자님?’

‘…….’

일절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이영신의 낯이 살짝 굳어졌다. 뭐지. 선 채로 잠이라도 들었나. 불현듯 불길한 감각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곤란했다. 초조해진 이영신은 동상처럼 서 있는 작은 몸을 향해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동자님의 몸에 손이 닿는 순간이었다.

‘어…?’

이영신이 불에 댄 듯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한 번, 동자님을 한 번, 번갈아 응시했다. 감촉이 이상했다. 아까 등에 업었을 때만 해도 동자님의 몸은 따듯하고 말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기라곤 없이 차갑고, 몹시도 딱딱했다.

‘도, 동자님? 동자님!’

덜컥 당황한 이영신이 양손을 뻗어 동자님의 어깨를 덥석 움켜쥐었다. 잠든 사람을 깨우듯 어깨를 흔들려는데 작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영신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우째 이런 일이! 말도 안 되게 무거웠다. 동자님은 못처럼 박혀 있는, 망부석과도 같았던 것이다.

이영신은 동자님을 데려오기에 앞서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었다. 저를 따돌리고 달아난다거나, 어쩌면 공격적인 태세로 저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예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상황이었다.

도망치지도, 저항하지도 않고 미동조차 없다.

그렇게 이영신은 별의별 짓을 다 했다. 미친 듯이 온몸을 더듬거리고, 낑낑거리며 밀어도 보고, 힘껏 귀기를 실어 잡아당겨도 보았다. 안아 올리려고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큰 소리로 꽥꽥 불러 보아도 무정한 동자님은 눈 한 번 뜨지 않았다.

‘헉헉, 도, 도대체, 도대체 이게 무슨….’

바위와 씨름하듯 무의미한 사투를 벌이던 이영신은 결국 기진맥진하여 바닥에 엎어졌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확실한 건 하나뿐이었다.

이대로 동자님을 데려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영신은 광기 어린 집념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이 난관을 해결할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다. 여러모로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구세주처럼 가장 먼저 떠오른 이는 윤태희였다. 한두 시간 안에는 와 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데다가, 수석 직급에 있는 이영신을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알았어, 그리로 갈게.’

간신히 연락이 닿은 윤태희는 웬일로 순순히 위치를 말하라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이영신은 윤태희가 어떻게든 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긴장이 풀려 넋이 완전히 나간 이영신은 나무 그루터기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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