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뽀뇨… 뽀뇨, 뽀뇨….”
이영신은 흐리멍덩한 얼굴로 귀에 익어 버린 멜로디를 하릴없이 따라 불렀다. 발랄하고 깜찍한 노래는 어느새 가련하고 구슬픈 곡소리가 되어 있었다.
윤태희를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시간은 오후 6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달렸다면 이미 서울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산중이라 그런지 훨씬 이르게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이영신이 퀭한 낯으로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얼이 빠져 있던 이영신이 어느 순간 눈을 빛내더니, 벼락같이 몸을 일으켰다.
스슥….
수풀 너머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헐레벌떡 수풀을 헤치고 마중을 나가자 점차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영신이 울먹이며 양팔을 벌릴 때였다.
“야! 왜 이제 와, 전화한 지가 언젠….”
환영 어린 투정을 내뱉던 이영신이 낯을 굳혔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사람은 오매불망 기다리던 윤태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태희만큼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수석니임! 이 수석님!”
“헥헥, 저희 왔습니다!”
검은 슈트를 입은 네 사람이 이영신 앞에 나타났다. 산을 얼마나 험하게 탔는지 슈트가 지저분했다. 뒤쪽에 서 있던 한 명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짐가방을 낑낑대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 너, 너희 여기 어떻게 왔어?”
눈앞의 네 명은 이영신이 이끄는 제구부 제1팀 휘하의 소속 나자들이었다. 예기치 못한 부하들의 방문에 이영신은 매우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으헤헤, 깜짝 놀라셨죠? 그러니까 저희도 데려가 달라고 했잖아요. 거보십쇼, 수석님. 혼자 가겠다고 그리 고집을 피우시더니. 이렇게 고생하고 계실 줄 알았다니까요.”
나자 한 명이 숨을 몰아쉬며 뿌듯하게 말했다.
“들키면 혼날까 봐 멀리서 따라오고 있었거든요. 근데 산밑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으시기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셨나 해서 올라와 봤습니다.”
혹시라도 본청에 동자삼의 존재를 들킬까 봐 걱정되어 은밀히 움직였던 이영신이었다. 예상치 못한 팀원들의 방문이 반가웠지만 동시에 걱정이 앞섰다. 이영신의 굳은 표정을 본 나자들이 알 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 네. 본청에는 잘 둘러대고 나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잘 따돌렸거든요. 고로 절대 들킬 일은 없을 테니 저희 좀 믿으세요. 제1팀은 한 몸 아닙니까, 섭섭하게.”
제구부 제1팀의 나자들은 의기투합하여 상관의 역경에 동참해 왔다. 그제서야 비로소 감격한 이영신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제구부 제1팀 소속의 나자들은 팀원 간 유대감이 끈끈하여 꽁꽁 뭉치기로 유명했다. 팀은 그저 팀일 뿐, 나례청을 향한 충성심이 먼저인 다른 나자들과는 달랐다.
좋게 말하면 팀워크가 좋았고, 나쁘게 말하면 팀 전체가 사이좋게 엉망진창이었다. 제구부 제1팀에 대한 평가는 ‘발명에 미쳐 버린 망나니 집단’이라는 한 문장으로 간단히 설명 가능했다.
제구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채집하기 위해선 먼저 상부에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제1팀 나자들은 그냥 전기톱부터 들이밀었다. 그에 평소 점잖기로 유명한 제구부 부장이 제1팀에게 ‘야 이 무법자 새끼들아, 나가 죽어!’ 하고 쌍욕을 한 사건이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였다.
팀 내 분위기는 팀을 이끄는 수석이 누구냐에 따라 좌우되기 마련이라, 제1팀은 수석의 허당스러운 괴짜 기질을 모두가 물려받았다. 이들에게 다른 건 중요치 않았다. 얼마나 새롭고 재밌고 멋진 것을 만들어 내느냐, 이것이 제1팀의 원동력이었다. 참고로 이번년도 제구부 제1팀의 슬로건은 ‘우리 사랑 영원히♡’로 결정되었다.
“수석님, 이럴 때일수록 꽁꽁 뭉쳐야죠. 다른 것도 아니고 귀하디귀한 동자삼이지 않습니까. 동자삼은 장차 우리 팀의 보물이 될 겁니다. 모두가 함께라면 해낼 수 있어요.”
이영신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팀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팀원들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나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한데 모았다.
“아악, 우리 사랑! 영원히-!”
고요한 산중에 우렁찬 구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몇 시간 넘게 미동조차 없던 메산이가 거짓말처럼 슬쩍 눈 한쪽을 떴다. 그 사실을, 다섯 명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 사람들은 뭐, 뭐지. 왜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있으며, 지금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정주 님께서 오고 계실 거야. 메산이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늘어난 인원을 훔쳐볼 때였다.
“가지가지들 하시네요.”
반대쪽 나무 뒤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당황한 메산이가 황급히 눈을 감았다. 놀란 것은 제구부 나자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울며불며 주접을 떨다 말고 다섯 명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향했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얼굴을 훤히 드러낸 제구부 나자들과는 달리 목소리의 주인은 진회색 수트를 입고 있었으며, 얼굴엔 기묘한 전통 탈을 쓰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다소 삐딱한 자세로 서 있던 남자가 기척 없이 느리게 걸어 나왔다. 이영신을 제외한 제구부 나자들이 숨을 들이켰다. 전통 탈은 축역부의 상징이었다.
“수석님. 저분은 누구…?”
이영신이 꽥, 소리를 지르며 반갑게 튀어 나갔다.
“야, 윤 수석! 전화한 지가 언젠데 이제 와!”
제구부 나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들어찼다. 탈을 보고서 축역부 나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윤 수석’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윤 수석은 본청 안에서도 만나기 힘든 인물인 데다가 그 이름값이 아주 비쌌다.
“이름 없는 산이라 좀 헤맸어.”
헤맸다는 사람치고 슈트가 아주 깨끗했다.
“윤, 윤 수석님, 안녕하십니까!”
제구부 나자들이 앞다투어 허리를 숙였다. 그걸 본 이영신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놈들 보게. 같은 수석인데도 취급이 아주 딴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구부 나자들은 직속 상관은 뒷전으로 밀어 두고 시키지도 않은 관등 성명을 늘어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영신이 불퉁한 낯으로 입을 삐죽였다.
“제구부 제1팀 주임 나자 신서영….”
“저도 주임, 주임 나자 박수원….”
윤태희가 고개를 숙이며 “네에, 안녕하세요.” 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받는가 싶더니, 금세 귀찮아졌는지 “네, 안녕요.”, “네, 안녀엉.” 하며 손을 흔드는 동시에 졸듯이 고개를 꾸벅거렸다.
“본청에서 지원 나와 줬네. 근데 날 왜 불러?”
제구부 나자들과 짧게 통성명을 끝낸 윤태희가 이영신에게 무심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혼자 있었던 이영신이 다른 나자들과 함께 있으니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얘네 정식으로 지원 나온 게 아니라 몰래 온 거야.”
“몰래 오다니, 상황실에 보고 안 했어?”
윤태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상황실에 보고를 뭐 하러 해.”
현대의 나례청은 체계가 잡힌 국가 기관인 만큼 절차를 매우 중요시했다. 따라서 원칙대로라면 나례청 상황실에 보고를 하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 일에 관해 가장 먼저 연락을 받은 것은 팀 내 최고 상급자인 이영신이었다. 그에 이영신은 동자삼을 발견한 팀원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며 외부로 정보가 새지 않도록 비밀 엄수를 당부해 놓은 상태였다.
“왜? 본청에 정식으로 보고하면 너희 팀 인센티브 엄청날 텐데. 제1팀 팀원들도 승진할 수 있는 기회 아닌가.”
윤태희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이영신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우린 인센티브 같은 건 관심 없어. 돈이랑 승진이 대수야? 지금 우리 애들한텐 동자님을 데리고 뭘 만들 수 있을지가 최고의 관심사라고. 본청에 얘기 들어갔다간 동자님 뺏길 게 뻔한데 누구 좋으라고 갖다 바치냐! 동자님은 내 거야, 아니. 우리 팀 거야. 그치, 얘들아?”
이영신이 나자들을 돌아보자, 네 명 모두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과연, ‘무법자 새끼들’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태도였다. 발명에 미쳐 버린 나머지 충성심 따위 개나 줘 버린 망나니들이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동자님에 대해 아는 건 너랑 우리 팀원들밖에 없어. 아무도 몰라. 그러니 널 불렀지. 윤 수석님, 좀 도와줘.”
이영신이 애원하듯 다시금 부탁을 해왔다. 윤태희는 딱히 승낙하는 말도, 거절하는 말도 없이 그저 목덜미를 매만질 따름이었다. 일단 불러서 오긴 왔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태희는 열의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동자님은 어디 있는데?”
이영신이 대답과 함께 턱짓을 했다.
“저기.”
“어디?”
“저기!”
“안 보이는데….”
다른 나자들도 윤태희를 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영신이 답답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들어 정확하게 가리켰다.
“바로 옆에 있잖아! 여기!”
윤태희가 의아한 기색으로 손가락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몇 걸음 멀지 않은 곳에 정말로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윤태희의 낯이 일순 기이해졌다.
…왜 못 봤지?
윤태희가 기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희한하네.”
윤태희가 느릿느릿 어린아이에게 다가갔다.
동자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건 다른 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멀찍이 서 있던 다른 나자들 또한 동자님 근처로 모여들었다. 이영신은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한마디로 굳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거네.”
설명은 들은 윤태희가 간단히 요약하며 손을 뻗어 동자님을 가볍게 쓸어 보았다. 굳어 버렸다는 이영신의 말대로 동자님은 돌처럼 딱딱했다. 눈을 감고 있는 어린 얼굴이 평온했다.
“응. 귀기 실어서 움직여 보려고 해도 안 통해.”
“수석님, 혹시 모르니 다 같이 한번 해 볼까요?”
나자들이 동자님에게 달라붙었다. 힘을 합세해서 들어 올려 볼 생각인 듯했다. 이영신은 지금껏 아무리 용을 써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사람 수가 늘어났으니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합류해 보기로 했다.
다섯 명이 자그마한 몸을 붙잡고 귀기를 실어 낑낑거렸으나 윤태희만은 예외였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선 뒤, 팔짱을 낀 채로 그 광경을 물끄러미 관전할 따름이었다. 이따금 눈을 감았다가 뜨고, 손으로 시야를 가렸다가 치우고,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기도 했다.
“비켜 보세요.”
말없이 서 있던 윤태희가 나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던 나자들이 뒤로 물러섰다. 동자님에게 가까이 다가간 윤태희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땅을 딛고 있는 동자님의 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동자님의 발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동자님의 감긴 눈 위로 손바닥을 흔들었다. 마치 깨어있나 의식을 확인하듯이.
“…….”
탈 너머로 보이는 윤태희의 눈매가 휘었다.
“백 명이 붙어도 동자님을 옮길 순 없을 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영신이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동자님은 산과 이어져 있어.”
윤태희가 손끝으로 동자님의 딱딱한 볼을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