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네가 말해 주기 전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는 이 산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일 거야. 여기서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를 지목해 봤자 단번에 알아보긴 힘들지.”
이영신이 동자삼을 쉽게 가리킬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동자삼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윤태희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설마…, 그걸 어떻게 알아?”
“땅에 붙어 있는 발을 잘 봐.”
이영신을 비롯한 제구부 나자들이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발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몇 걸음 물러선 윤태희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채 동자님을 빤히 쳐다볼 때였다. 나자들의 눈에 일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진짜야, 땅을 디딘 게 아니라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
이영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영락없이 굳어서 무거워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동자삼이다. 본디 산을 수호하고 산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 태어난, 신묘한 능력을 지닌 동자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산 전체를 들어내지 않는 한 옮길 수 없을 겁니다.”
윤태희의 말에, 나자들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치, 귀기까지 실었는데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니까.”
“그게 말이 돼? 아무리 우리라도 산을 어떻게 옮겨요.”
이영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제껏 집채만 한 바위 혹은 한도 끝도 없이 뿌리를 내린 나무와도 다름없는 것을, 어쩌면 이 산 전체를 옮겨 보겠다고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는 얘기다.
“근데 왜 갑자기 산에 뿌리를 내린 걸까요?”
“맞아, 분명히 서울로 잘 가고 있었잖아요.”
나자들이 이영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이영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영신도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산의 정기가 다해 기운을 받겠다고 산에 온 거였는데 동자님은 어째서….
“왜긴요.”
그때, 윤태희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걸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영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윤태희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궁금증을 풀어 줄 해답이 탈 너머에서 대신 흘러나왔다.
“눈치 깐 거죠, 자길 데려가는 사람이 개새끼라는 걸.”
나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태희에게 향했다.
“…….”
“…….”
“…….”
“…….”
이영신이 상처받은 얼굴로 어물어물 입을 벌렸다.
“개, 개새끼라니. 야, 넌 말을 해도….”
그러나 서운해할 겨를이 없었다. 윤태희의 말대로 동자님이 뭔가를 눈치챈 거라면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모를 일이다. 분명히 사이좋게 뽀뇨를 열창했으며 휴게소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도 좋았는데?
“그럼 이제 어떡하죠? 나례청으로 데려가야 하는데….”
나자 한 명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영신을 비롯한 제구부 나자들은 이쯤 되자 윤태희만 쳐다보는 지경이었다. 축역부 수석이 분명히 무슨 수를 써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본인 스스로 움직이게 해야죠.”
하지만 윤태희는 태평한 해답을 내어놓았다. 그러자 나자들의 표정이 허망해졌다. 그건 동자삼을 포기하라는 소리와 다름없이 들렸다. 더군다나 지금 동자님은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개, 개새끼라는 걸 아는데 그래 줄 리가….”
“야이, 박 주임, 우리가 왜 개새끼야?”
“솔직히 동자님 입장에서 틀린 얘긴 아니죠.”
“아, 이 수석님. 어떡해요. 망했잖아요.”
좌절한 신 주임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수석님, 그냥 상황실에 보고할까요?”
“이대로 공치느니 본청에 넘기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본청에선 어떻게든 수를 쓰겠지요.”
“얘들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절대 안 돼.”
이영신이 거품을 물고 반기를 들었다.
“텄네, 텄어. 이제 다 끝났어!”
“싸우지 맙시다. 구호 한 번 외쳐요.”
“이 와중에 뭔 구호냐! 너 혼자 해.”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우리 사랑 영원하자매!”
똘똘 뭉치기로 유명한 제구부 제1팀은 난데없는 위기에 봉착했다. 추한 꼴을 말없이 지켜보며, 윤태희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짝다리를 짚었다.
“…….”
윤태희는 조용히 아이를 곁눈질했다. 아이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지금 동자님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을 거라는 직감적인 확신이 들었다. 윤태희가 집요한 시선으로 동자님을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아, 아! 잠깐만요!”
박 주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왈왈거리던 소란이 뚝 그쳤다. 모두가 박 주임에게 주목했다. 물론 윤태희의 시선만은 여전히 동자님을 향해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뿌리를 내렸으면 나무와 다름없다는 거잖아요?”
박 주임이 환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럼 도끼로 밑동을 베어내면 그만 아닌가요?”
탈 너머로 윤태희의 얼굴이 냉랭하게 굳었다. 윤태희는 마치 슬로 모션처럼,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려 박 주임을 응시했다. 일그러진 탈의 표정이 기괴했다.
“뿌리째 옮길 수 없다면 그냥 잘라 내서…!”
박 주임이 눈을 빛내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 발목을 자르자는 얘기야?”
이영신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을 잘랐다.
“네, 그렇죠. 그냥 나무랑 똑같은 거 아니에요?”
“듣고 보니 그렇네, 따지고 보면 동자삼도 식물이잖아요.”
“아! 가방에 도끼 있는데. 일단 꺼내 올까요?”
나자들이 수런거리며 박 주임의 의견에 동조했다. 나자 한 명이 짐가방을 질질 끌고 왔다. 동요하는 표정으로 서 있던 이영신은 망설이는 목소리로 난색을 표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작고 어린 애를….”
“에이, 수석님. 뭐예요. 그새 정이라도 든 겁니까?”
“외양만 어린애죠. 산 세월은 우리보다 많을걸요.”
답지 않게 왜 저러신담, 나자들이 어깨를 으쓱이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평소엔 제일 먼저 도끼부터 집어 들었을 사람이 깨갱 하며 감정적으로 굴자 답답한 듯했다.
그때, 신 주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윤 수석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나자들이 자문을 구하는 시선으로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내내 말없이 삐딱한 자세로 서 있던 윤태희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탈을 고쳐 썼다. 얼굴에 탈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
한참 만에 윤태희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지극히 나자다운 발상이긴 하네요.”
무성의한 목소리였다. 모호한 대답에 나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윤태희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도 않았지만 나자들은 거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영신을 몰았다.
“들으셨죠? 수석님, 나자답게 질러 봅시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해 봐야죠.”
이영신이 시무룩한 얼굴로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내심 윤태희가 만류해 주길 바랐던 것이다. 직접 나서서 말리자니 살짝 염치가 없고, 그러라고 내버려 두자니 동자님과 함께 뽀뇨를 열창하던 순간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신 주임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산 밑에서부터 짊어지고 올라온 커다란 짐가방 안에는 제구가 한가득이었다. 이영신은 힙색 안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제구만 챙겼으나, 나자들이 가져온 짐가방 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신 주임은 도끼를 골라잡고 동자님을 향해 다가갔다.
“으으, 난 못 보겠어…,”
이영신이 눈을 질끈 감으며 팔에 얼굴을 묻었다. 외양만 어린 애라는 걸 알고 있지만 차마 그 광경을 볼 자신이 없었다. 도끼를 든 신 주임을 필두로, 나자들은 동자님을 에워쌌다. 동자님은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으며 변함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자리를 잡은 신 주임이 도끼를 들어 올릴 때였다.
“잠깐만.”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윤태희가 짧게 입을 열었다. 신 주임이 도끼를 든 채 행동을 멈췄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윤태희가 작게 한숨을 쉬며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윤 수석님, 왜 그러십니까?”
나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탈을 쳐다보았다.
“내가 합니다, 도끼 이리 줘요.”
“…예?”
윤태희가 휘적휘적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수석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윤태희가 수고로운 일을 자처하자 신 주임이 당황하며 만류하려고 했다.
“윤 수석님, 그냥 저희가….”
하지만 윤태희는 두 번 말하지 않고 빈손만 까딱였다. 무언의 압력에 신 주임은 결국 공손히 도끼를 건넸다. 팔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이영신이 눈을 끔뻑거렸다.
“영신아.”
“어, 어.”
“잠깐 자리 좀 비켜 줘.”
날을 예리하게 벼린 도끼를 훑어보며, 윤태희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게 갑자기 뭔 상황이람. 이영신이 의아한 얼굴로 팀원들을 쳐다볼 때였다.
“여러분도 같이요.”
윤태희가 짧게 덧붙였다.
“윤, 윤 수석님, 왜 그러시는….”
“도와 달라고 불렀으면 입 다물고 하라는 대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난데없는 축객령에 이영신의 시선이 사뭇 진지해졌다. 탈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얼마간 윤태희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이영신이 마침내 무표정한 얼굴로 나자들을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희의 뜻에 따르라는 신호였다.
이영신이 제구부 나자들을 이끌고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뒤편으로 자리를 물렸다. 기척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윤태희가 동자님에게 다가갔다.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윤태희는 손에 든 도끼를 늘어트리며 허리를 숙였다.
“동자님, 안녕.”
윤태희는 땅에 닿은 도끼에 양손을 걸치고 편하게 체중을 실었다. 인사를 건네도 대답이 없는 동자님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던 윤태희가 귓속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다 듣고 있는 거 알아요.”
탈 너머에서 윤태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