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눈 좀 떠 봐요.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터놓고 얘기 좀 해 봅시다. 계속 버티고 있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동자님은 한결같이 무응답으로 일관할 따름이었다. 동자님이 반응을 기다리던 윤태희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저씨들이 하는 얘기, 못 들었어요?”
“…….”
“무식한 새끼들이 도끼로 베어서 데려가겠다잖아요.”
“…….”
윤태희가 동자님의 감긴 눈에 시선을 맞췄다.
“…….”
“…….”
끈질기네.
마침내 윤태희가 지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동자님, 이러다가 진짜로 쟤들한테 발목 잘려요.”
윤태희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 굳게 닫힌 눈꺼풀 사이로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눈이 감긴 탓에 눈물은 채 맺히지도 못하고 그대로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메산이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내내 평온함을 유지하던 얼굴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숨죽이고 우는 아이를 말없이 응시하던 윤태희가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 좀 보세요.”
메산이는 결국 눈을 떴다. 시야에 가득 들어찬 탈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기괴한 낯을 하고 있었다. 탈 너머에서 저를 응시하고 있는 낯선 눈매는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동자님, 우리가 누군지 알아요?”
윤태희의 질문에, 오랫동안 미동조차 없던 메산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내내 저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긴 했으나, 대화만으로는 정확히 뭐 하는 사람들인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메산이가 아는 거라곤 딱 세 가지 뿐이었다. 저의 나리는 서울에 가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자신을 서울로 부른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영신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이었다.
수상한 자가 저를 속여 어딘가로 데려가려고 한다. 차 문이 열리지 않으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겁에 질린 메산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정주는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구하러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정주는 메산이에게 휴대폰 전원을 끄지 말고 반드시 몸에 지니고 있으라며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다. 동시에 도망칠 생각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절대로 위험한 행동을 해선 안 된다며 약속까지 받아 냈다. 하지만 메산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산으로 가도록 유인한 것은 순간의 기지였다. 산으로 가면 상황이 유리해질 거라고 믿었다. 운이 좋으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안 되면 그대로 뿌리를 내려서 움직이지 않으면 된다. 버티면 정주 님께서 꼭 와 주실 테니까….
하지만 결국 모든 걸 망쳐 버리고 말았다. 정주 님과 했던 약속을 어겨서 벌을 받는 것이다. 정주 님은 감감무소식이고, 저를 데려가려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발목을 잘라서 데려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눈물을 참았다.
“제발, 그냥 저를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메산이가 아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야말로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묵묵히 메산이의 얼굴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근데.”
윤태희의 말에 메산이가 슥, 눈을 들었다.
“나도 내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리고 내가 여기서 동자님을 놔준다고 해도 저 사람들은 동자님을 어떻게든 다시 찾아낼 겁니다. 겁주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실을 얘기하는 거예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를 가졌던 메산이가 끝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윤태희는 아이의 손목에 묶인 끈을 잠시 쳐다보았다. 이내 윤태희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안됐지만 동자님이 지금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뿐이에요. 발목이 잘린 채로 끌려가느냐, 성한 몸으로 직접 따라가느냐.”
메산이가 작게 애원했다.
“저는, 저는 갈 수 없어요… 나리, 나리께 보내 주세요….”
메산이가 몸을 덜덜 떨며 흐느꼈다. 그 어떤 것도 고를 수 없었다. 메산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나리 곁에 있고 싶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리. 나리, …나으리?”
윤태희가 메산이가 뱉은 단어를 주워서 발음했다.
“나리가 누군데?”
윤태희의 물음에도, 메산이는 고개를 숙인 채 울기만 했다.
“흑흑, 나리, 나리께 보내 주세요… 제발요, 보내 주세요, 저를 보내 주세요….”
윤태희는 기계처럼 알 수 없는 애원을 늘어놓는 동자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산신이라도 모시고 있는 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태희가 문득 고개를 틀어 뒤편을 응시했다. 나자들은 안달이 난 기척이었다. 윤태희가 혀를 찼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었다.
“돌아갈 수 있어요.”
윤태희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숨죽여 울던 메산이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윤태희는 한쪽 무릎을 꿇고 메산이에게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탈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응시해 왔다.
“내 말 잘 들어요. 오늘은 그냥 저 사람들을 따라가세요. 도저히 승기(勝機)가 보이지 않을 땐, 최악을 피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현명한 겁니다.”
윤태희가 동자삼에게 손을 뻗었다. 딱딱하고 차갑던 아이의 몸은 어느새 평범한 감촉을 전하고 있었다. 일단 나례청에 데려가기만 한다면 제구부 나자들은 동자삼을 애지중지 모셔 둘 것이다. 가치가 높고 희소한 물건을 함부로 다루지는 않을 테니, 이 순간만 지나면 안전할 터다.
“짧으면 석 달 안에, 내가 동자님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할게요. 어쨌든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메산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깜빡였다. 석 달이면 메산이로서는 긴 시간이 아니긴 했다. 나중에 돌려보내 주겠다니. 그게 정말일까? 어쩌면 이자도 이영신처럼 저를 꾀어내려고 하는지도 몰랐다. 얼굴을 가린 탈도 수상했다. 게다가 저 사람들과 한패인 게 분명한데….
“…거, 거짓말.”
메산이가 소심하게 쏘아붙이자,
“거짓말 아닌데.”
탈 너머로 조용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피식거리던 윤태희가 메산이의 귓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더니, 귓속말을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움찔하던 메산이는 이내 귀를 기울였다. 은밀히 귓속말을 끝낸 윤태희가 허리를 세웠을 때, 메산이는 어딘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메산이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윤태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그게 정, 정말인가요?”
“그래서 둘이 있을 때 얘기하잖아요.”
윤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쉿, 하고 검지를 세웠다.
“비밀이에요.”
난데없이 윤태희와 비밀을 공유하게 된 메산이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탈이 여전히 수상하긴 했지만, 뜻밖의 말을 듣고 나니 묘하게 의심이 누그러지면서 실낱처럼 미약한 믿음이 생기려 했다.
어쩌지? 만약 저 사람의 말대로라면….
메산이가 주저하며 탈을 응시할 때였다. 윤태희가 몸을 일으켰다. 시선이 훌쩍 높아져 메산이의 고개도 저절로 따라왔다. 바르게 선 윤태희가 메산이에게 손을 건넸다.
“그럼, 가 볼까?”
차렷 자세로 서 있던 메산이가 코앞에 내밀린 커다란 손바닥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저 손을 잡아도 되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윤태희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다만 이따금 손가락을 장난스레 살랑일 따름이었다.
마침내 결심한 메산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한 발자국 다가서며 떨리는 손을 뻗었다. 윤태희가 가만히 내밀고 있는 손에, 메산이의 손끝이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뻐억-.
눈 깜짝할 사이에 무언가가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그에 메산이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정확히 윤태희의 손을 맞고 튕겨 나간 무언가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정중앙에 깊게 박혀 들었다. 귀기가 실린 돌멩이였다. 메산이는 당황하여 나무에 박힌 돌을 쳐다보았다.
“저, 저게 무슨….”
메산이는 윤태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가, 이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윤태희는 그 자세 그대로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손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던 것이다.
“…….”
윤태희가 휘청이듯 한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다친 손을 느릿느릿 얼굴 근처로 들어 올렸다. 중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세 개가 부러졌다. 붉은 피가 슈트 소매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굴 손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기도 전에,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산이의 눈이 한순간에 커졌다. 그건 윤태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느끼는 낯선 감각이 발끝까지 퍼졌다.
환청인가? 그럴 리가….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탈 너머의 시선은 돌이 날아온 방향을 정확히 찾아냈다. 어둠이 내려앉은 산중, 지척에서 가장 높게 솟은 어느 나무 꼭대기에 교복을 입은 소년 한 명이 서 있었다. 윤태희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
네가 왜 여기에?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소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바람결에 짧은 머리칼이 한차례 나부꼈다. 놀란 윤태희가 뭐라 입을 달싹이려는 순간이었다. 재겸을 뒤늦게 발견한 메산이가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리, 흐어엉!”
탈에 가린 윤태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사고가 멈췄던 머릿속이 팽이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리라고? 상황 파악에 확신이 들기도 전에 윤태희는 서둘러 눈을 피했다. 멀쩡한 손을 들어 탈을 단단히 고쳐 쓸 때였다.
“야! 동자님 깼….”
윤태희가 당황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메산이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뒤쪽에서 이영신을 비롯한 나자들이 냅다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 뭐야? 쟤 누구야?”
나무를 딛고 선 낯선 소년을 발견한 이영신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나자들도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윤태희는 이영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검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키고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뭐라는 거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영신이 의아한 낯으로 눈을 찌푸릴 때였다.
“아니, 태희야! 손에서 왜 피가….”
재겸의 시선이 한순간에 윤태희를 향해 꽂혔다.
“…….”
“…….”
“…….”
“아, 씨발.”
윤태희가 제 얼굴인 양 탈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